[귀농통문] 계획이나 원칙을 세우지 않는 삶, 이정아·송용석 부부
2003년 5월 정아 씨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인생에 가장 큰 지지자였던 엄마가 췌장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의사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으니 그냥 집으로 가라고 말했다. 고작 환갑도 채 되지 않으셨는데…. 엄마의 삶을 그냥 그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몇 군데 다른 병원을 더 찾아가 보았는데 같은 상황이었다. 암울하고 막막했지만 맥없이 손 놓고 있을 수 없어서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찾아 나섰다. 그러다 '암환자 시민연대'라는 단체를 만났다.
그곳은 암에 대해 환자와 가족이 함께 공부하고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당장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 환자와 가족이 함께 하는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건강과 자연을 깊이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생활환경부터 바꿔야겠다 싶어서 경기도 안성으로 엄마 집을 옮겼다. 내 생활 기반을 통째로 옮기지 않은 간접귀농(?)을 시도한 셈이다. 엄마는 시골생활에서 한결 여유를 찾았다. 삶에 감사하고 늘 웃음 잃지 않고 행복해하시는 엄마의 한 생애가 새록새록 다가왔다.
엄마는 시골로 이사해서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동안 모자랐던 내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불어 지나간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해 거듭 자문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삶을 찬찬히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내달린 인생이 안쓰러워졌다.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이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이때가 귀농으로 가는 첫 번째 변곡점이자 전환기였다.
국토순례와 여성귀농학교라는 전환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내 삶에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우울 증상에 시달렸다.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년 대상 책 읽기 봉사에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중고생 아이들은 분노가 많았고, 가족이라는 둥지에서 따뜻함과 애정을 받아보지 못한 채 바깥으로 겉돌았다.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이 공명을 일으켰다. 분노와 좌절을 털어버리고 더 큰 시야에서 인생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이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어 국토순례를 계획하였다.
2009년 매주 금요일 밤 출발해 주말까지 꼬박 1년에 걸쳐 해남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국토순례를 마쳤다. 바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만의 목표를 이룬 데서 오는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묵은 짐을 털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경제적인 이유와 목표가 다인 삶에 매이고 싶지 않았다. 시골로 내려가서 생태적인 삶을 살자고 결단을 내렸다.
엄마가 떠나가기 전후로 스콧 니어링, 서정홍 농부시인, 권정생 선생님 등의 글을 읽으면서 생태주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이즈음인 2013년에 사회복지 활동에 지치기도 해서 휴식도 취할 겸 3박 4일 동안 여성귀농학교에 참가했다. 여기서 당도은의 책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행성B 펴냄)을 읽고 진짜 귀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산 활동을 하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가꾸는 삶을 꿈꿔 왔는데 바로 그 모습이 책 속에 들어있었다. 더 이상 귀농을 늦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첫눈에 반해 결정한 귀농지
2014년 여름휴가 기간을 탐타 4박 5일 간 전북 순창 여름귀농학교를 마쳤다. 꽤나 오랫동안 귀농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지만, 남편은 마이동풍으로 흘려들었던 터였다. 휴가 대신 가보자고 꼬드겼는데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남편은 귀농교욱 기간 내내 남의 일 구경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지냈다. 하지만 강의가 영 낯선 세상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간 아내를 통해 생태주의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만큼 강한 실행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해 10월에 귀농학교 동기들과 이곳에 방문했는데, 첫눈에 반했다. 어릴 적부터 왠지 산을 넉넉히 끼고 있는 병풍과 같은 풍광이 좋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정겹게 다가왔다. 사실 귀농지에 대해 특별한 기준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는데, 단박에 정리가 되었다.
아내는 '인생에 정해진 계획은 없다'는 주의로 산다.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성격이다. 남편은 심사숙고하고 하는 편이어서 '주저하고 망설이다 끌려 내려왔다'고 표현하지만, 이미 깊숙이 아내에게 동조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서로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는 조화로운 부부관계이지 싶다.
귀농 이듬해 옮긴 집은 동네 가장 안쪽에 숨어 들은 듯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다. 1킬로 이상 구불구불 이어진 진입로 거개가 좁은 비포장이다. 가로등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주변에 묘지가 군데군데 널려 있다. 밤에도 거리가 환하고 이웃이 빼곡한 집단 주거지에 살다 와서 잘 적응이 될까, 무섭지 않을까? '외딴집이라서 온전히 자연을 느낀다. 빛과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어서 좋다.' 주변에 묘지가 널려 있어도 전혀 겁나지 않을뿐더러, 묘지가 주변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준단다.
마을공동체와 연결된 귀농 이후의 삶
경북 상주 모동면 시흥리 36가구 가운데 세 가구가 귀농인인데, 이 마을은 유독 40대가 중심 세대이다. 시골에서는 흔치 않게 원주민의 자식 세대들이 귀향을 많이 했다. 포도농사로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도시에서 벌어먹기가 얼마나 팍팍하고 어려운가. 연 소득이 4~5000만 원에 이른다 하니 중상층 농가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아주 빈한하고 지역에서도 고립된 마을이었다. 대다수가 20여 년 전에 논농사에서 환금성이 뛰어난 과수농가로 전환했다.
올해로 귀농 3년 차요, 농사로는 2년 차다. 새로 집을 짓고 임대한 포도밭 2000평과 고구마, 토마토, 고추, 양파, 마늘, 잎채소 따위를 100평 텃밭에서 가꾼다. 포도 농가 10여 가구가 모여 친환경 무농약 공부하며 점진적인 유기농 전환을 시도 중이다. 여기 포도밭은 20년 이상 관행농으로 지은 땅이어서 땅심으로 키우는 농사가 될 때까지 족히 5년은 걸린다. 올해는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성과가 거의 없었다. 올 초 들여놓은 스프링클러 장비 값도 못 건졌다. 직거래하면 펑당 만 원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일반 농사에 비하면 꽤 괜찮은 소득이다. 더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포도주를 가공해야 하는데, 지금 키우고 있는 캠벨포도는 당도가 떨어져서 포도주 담그기가 마땅치 않다.
- 대형 거위농장 신축 반대 운동을 벌였다는데?
"귀농자가 주측이 되어 1년 넘게 수없이 회의하고 집회하며 투쟁했다. 현재 행정소송 1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상태다. 원주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귀농자에 대한 선입관을 없애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빠른 시간에 마을에서 신뢰를 얻었다.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각성된 사건이었다."
- 귀농 3년 차를 지나며 초기와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처음에 생태주의와 '자발적 가난'이라는 이념에 끌렸다. 생태와 자립이라는 이념이 매력적이었다. 목적의식성과 자존감이 한창일 때였다. 그런데 귀농 첫해에 낡은 단칸방도 집도 어디냐며 호기롭게 살림을 펼쳤지만,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손들었다. 뭔가 '멋지고 다른 삶'은 결코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삶의 원리는 도시나 농촌이나 다르지 않더라."
- 생태주의는 현실에서 무력한 이념인가?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내적 동기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념이 가진 역할이다. 이념은 현실을 만나 풍부해지고 유연해지는 과정에서 성숙해간다. 이념을 잣대 삼아 수십 년 살아온 업과 습으로 굳어진 삶의 방식을 손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 생태농과 관행농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은 안 생기는가?
"어떤 사람은 관행농 눈치를 보느라, 독자적인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서서히 적응하고자 한다. 생태농과 관행농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 마을공동체는 왜 중요한가?
"생활 단위가 고립적이거나 너무 작아도 자기만족에 그칠 수 있다. 고령화로 마을이 공동화될 위기에 처했는데, 일단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살 것 아닌가. 그래서 젊은 세대가 중요하다. 다양한 생활양식이나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분위기도 생기고, 미래가 보이니까 내 자식이 농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늘어난다."
- 포도농사 외에 일반 농사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쌀농사, 밀농사,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사를 짓고 싶은데 아직은 몸과 마음이 따로다. 당분간은 포도농사와 조그만 텃밭 외에는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중장기에 걸쳐 자급자족 가능한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얻을 수 있는 땅은 얼마든지 있다."
- 예비 귀농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과 환상을 농촌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귀농하지 마시라. 도시 생활이 힘들어서 탈출구를 찾을 거면 귀농하지 말아야 한다. 도시든 농촌이든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은 그냥 아파트에서 살아야 조용히 혼자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농촌은 마을 자체가 가족처럼 대면해야 하는 공동체이고, 그 안에서 소소한 슬픔, 기쁨 등의 일상을 느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갖춰야 하는 것 같다."
지금 소농으로 생존가능한 삶의 방식
앞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사를 짓고 생활은 낮게 사상은 높게 가지려고 노력하겠다고 한다.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뜻과 이상이 높고 뚜렷하면 삶을 밀고 가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원칙 자체를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칙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풍부해진다고 믿는다.
현실적으로 소농이 생존가능하려면 지출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한데 이 방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끔 우울함에 바지게 만들더라. 지역에서 주민들의 재능을 모아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대안을 만들까 고민 중이다.
농촌으로 오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부부가 한꺼번에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남편은 귀농 1년 차에는 주말부부를 하면서 서울에서 하던 학원 강사 일을 놓지 않았고, 지금은 가까운 시내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다. 정아 씨는 옆 동네에 있는 '녹색농촌체험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소농으로 살아가고자 농촌에 왔고 처음엔 그렇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는데 지금은 '천천히 가자'고 다독인다. 돌아보면 운이 많이 따라주었다. 덕분에 빠르게 정착했고 만족스럽다.
"40여 년 살아온 업과 습으로 얽힌 삶의 방식은 쉽게 바꿀 수 없다."
"원칙은 타협을 통해 풍부해진다."
이 부부의 깨달음이다. 그들에게서 아집과 고정관념이 빠지지 않는 지혜를 보았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고상한 가치도 자칫 생명 에너지를 억압하는 도그마가 될 수 있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욕망, 삶의 동력을 이루는 자기 고유의(이기적이 아닌) 욕망(꿈)을 무시하지 말고 살려야 '살맛'이 난다. 우리 시대 소농에게는 '자발적 가난'보다 '아름다운 욕망'이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든 생각이다.
그곳은 암에 대해 환자와 가족이 함께 공부하고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당장 먹을거리를 비롯하여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 환자와 가족이 함께 하는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건강과 자연을 깊이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생활환경부터 바꿔야겠다 싶어서 경기도 안성으로 엄마 집을 옮겼다. 내 생활 기반을 통째로 옮기지 않은 간접귀농(?)을 시도한 셈이다. 엄마는 시골생활에서 한결 여유를 찾았다. 삶에 감사하고 늘 웃음 잃지 않고 행복해하시는 엄마의 한 생애가 새록새록 다가왔다.
엄마는 시골로 이사해서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동안 모자랐던 내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더불어 지나간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해 거듭 자문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삶을 찬찬히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내달린 인생이 안쓰러워졌다.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이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이때가 귀농으로 가는 첫 번째 변곡점이자 전환기였다.
국토순례와 여성귀농학교라는 전환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내 삶에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우울 증상에 시달렸다.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년 대상 책 읽기 봉사에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중고생 아이들은 분노가 많았고, 가족이라는 둥지에서 따뜻함과 애정을 받아보지 못한 채 바깥으로 겉돌았다.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이 공명을 일으켰다. 분노와 좌절을 털어버리고 더 큰 시야에서 인생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이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어 국토순례를 계획하였다.
2009년 매주 금요일 밤 출발해 주말까지 꼬박 1년에 걸쳐 해남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국토순례를 마쳤다. 바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만의 목표를 이룬 데서 오는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묵은 짐을 털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곧 회사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경제적인 이유와 목표가 다인 삶에 매이고 싶지 않았다. 시골로 내려가서 생태적인 삶을 살자고 결단을 내렸다.
엄마가 떠나가기 전후로 스콧 니어링, 서정홍 농부시인, 권정생 선생님 등의 글을 읽으면서 생태주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이즈음인 2013년에 사회복지 활동에 지치기도 해서 휴식도 취할 겸 3박 4일 동안 여성귀농학교에 참가했다. 여기서 당도은의 책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행성B 펴냄)을 읽고 진짜 귀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산 활동을 하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가꾸는 삶을 꿈꿔 왔는데 바로 그 모습이 책 속에 들어있었다. 더 이상 귀농을 늦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첫눈에 반해 결정한 귀농지
2014년 여름휴가 기간을 탐타 4박 5일 간 전북 순창 여름귀농학교를 마쳤다. 꽤나 오랫동안 귀농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지만, 남편은 마이동풍으로 흘려들었던 터였다. 휴가 대신 가보자고 꼬드겼는데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남편은 귀농교욱 기간 내내 남의 일 구경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지냈다. 하지만 강의가 영 낯선 세상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간 아내를 통해 생태주의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만큼 강한 실행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해 10월에 귀농학교 동기들과 이곳에 방문했는데, 첫눈에 반했다. 어릴 적부터 왠지 산을 넉넉히 끼고 있는 병풍과 같은 풍광이 좋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정겹게 다가왔다. 사실 귀농지에 대해 특별한 기준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는데, 단박에 정리가 되었다.
아내는 '인생에 정해진 계획은 없다'는 주의로 산다.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성격이다. 남편은 심사숙고하고 하는 편이어서 '주저하고 망설이다 끌려 내려왔다'고 표현하지만, 이미 깊숙이 아내에게 동조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서로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는 조화로운 부부관계이지 싶다.
귀농 이듬해 옮긴 집은 동네 가장 안쪽에 숨어 들은 듯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다. 1킬로 이상 구불구불 이어진 진입로 거개가 좁은 비포장이다. 가로등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주변에 묘지가 군데군데 널려 있다. 밤에도 거리가 환하고 이웃이 빼곡한 집단 주거지에 살다 와서 잘 적응이 될까, 무섭지 않을까? '외딴집이라서 온전히 자연을 느낀다. 빛과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어서 좋다.' 주변에 묘지가 널려 있어도 전혀 겁나지 않을뿐더러, 묘지가 주변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준단다.
마을공동체와 연결된 귀농 이후의 삶
경북 상주 모동면 시흥리 36가구 가운데 세 가구가 귀농인인데, 이 마을은 유독 40대가 중심 세대이다. 시골에서는 흔치 않게 원주민의 자식 세대들이 귀향을 많이 했다. 포도농사로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도시에서 벌어먹기가 얼마나 팍팍하고 어려운가. 연 소득이 4~5000만 원에 이른다 하니 중상층 농가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아주 빈한하고 지역에서도 고립된 마을이었다. 대다수가 20여 년 전에 논농사에서 환금성이 뛰어난 과수농가로 전환했다.
올해로 귀농 3년 차요, 농사로는 2년 차다. 새로 집을 짓고 임대한 포도밭 2000평과 고구마, 토마토, 고추, 양파, 마늘, 잎채소 따위를 100평 텃밭에서 가꾼다. 포도 농가 10여 가구가 모여 친환경 무농약 공부하며 점진적인 유기농 전환을 시도 중이다. 여기 포도밭은 20년 이상 관행농으로 지은 땅이어서 땅심으로 키우는 농사가 될 때까지 족히 5년은 걸린다. 올해는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성과가 거의 없었다. 올 초 들여놓은 스프링클러 장비 값도 못 건졌다. 직거래하면 펑당 만 원 소득을 올릴 수 있다. 일반 농사에 비하면 꽤 괜찮은 소득이다. 더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포도주를 가공해야 하는데, 지금 키우고 있는 캠벨포도는 당도가 떨어져서 포도주 담그기가 마땅치 않다.
- 대형 거위농장 신축 반대 운동을 벌였다는데?
"귀농자가 주측이 되어 1년 넘게 수없이 회의하고 집회하며 투쟁했다. 현재 행정소송 1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상태다. 원주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귀농자에 대한 선입관을 없애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빠른 시간에 마을에서 신뢰를 얻었다.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각성된 사건이었다."
- 귀농 3년 차를 지나며 초기와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처음에 생태주의와 '자발적 가난'이라는 이념에 끌렸다. 생태와 자립이라는 이념이 매력적이었다. 목적의식성과 자존감이 한창일 때였다. 그런데 귀농 첫해에 낡은 단칸방도 집도 어디냐며 호기롭게 살림을 펼쳤지만,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손들었다. 뭔가 '멋지고 다른 삶'은 결코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삶의 원리는 도시나 농촌이나 다르지 않더라."
- 생태주의는 현실에서 무력한 이념인가?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내적 동기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념이 가진 역할이다. 이념은 현실을 만나 풍부해지고 유연해지는 과정에서 성숙해간다. 이념을 잣대 삼아 수십 년 살아온 업과 습으로 굳어진 삶의 방식을 손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 생태농과 관행농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은 안 생기는가?
"어떤 사람은 관행농 눈치를 보느라, 독자적인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서서히 적응하고자 한다. 생태농과 관행농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 마을공동체는 왜 중요한가?
"생활 단위가 고립적이거나 너무 작아도 자기만족에 그칠 수 있다. 고령화로 마을이 공동화될 위기에 처했는데, 일단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살 것 아닌가. 그래서 젊은 세대가 중요하다. 다양한 생활양식이나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분위기도 생기고, 미래가 보이니까 내 자식이 농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늘어난다."
- 포도농사 외에 일반 농사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쌀농사, 밀농사,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사를 짓고 싶은데 아직은 몸과 마음이 따로다. 당분간은 포도농사와 조그만 텃밭 외에는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중장기에 걸쳐 자급자족 가능한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얻을 수 있는 땅은 얼마든지 있다."
- 예비 귀농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과 환상을 농촌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귀농하지 마시라. 도시 생활이 힘들어서 탈출구를 찾을 거면 귀농하지 말아야 한다. 도시든 농촌이든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은 그냥 아파트에서 살아야 조용히 혼자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농촌은 마을 자체가 가족처럼 대면해야 하는 공동체이고, 그 안에서 소소한 슬픔, 기쁨 등의 일상을 느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갖춰야 하는 것 같다."
지금 소농으로 생존가능한 삶의 방식
앞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사를 짓고 생활은 낮게 사상은 높게 가지려고 노력하겠다고 한다.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뜻과 이상이 높고 뚜렷하면 삶을 밀고 가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원칙 자체를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칙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풍부해진다고 믿는다.
현실적으로 소농이 생존가능하려면 지출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한데 이 방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끔 우울함에 바지게 만들더라. 지역에서 주민들의 재능을 모아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대안을 만들까 고민 중이다.
농촌으로 오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부부가 한꺼번에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남편은 귀농 1년 차에는 주말부부를 하면서 서울에서 하던 학원 강사 일을 놓지 않았고, 지금은 가까운 시내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다. 정아 씨는 옆 동네에 있는 '녹색농촌체험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소농으로 살아가고자 농촌에 왔고 처음엔 그렇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는데 지금은 '천천히 가자'고 다독인다. 돌아보면 운이 많이 따라주었다. 덕분에 빠르게 정착했고 만족스럽다.
"40여 년 살아온 업과 습으로 얽힌 삶의 방식은 쉽게 바꿀 수 없다."
"원칙은 타협을 통해 풍부해진다."
이 부부의 깨달음이다. 그들에게서 아집과 고정관념이 빠지지 않는 지혜를 보았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고상한 가치도 자칫 생명 에너지를 억압하는 도그마가 될 수 있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욕망, 삶의 동력을 이루는 자기 고유의(이기적이 아닌) 욕망(꿈)을 무시하지 말고 살려야 '살맛'이 난다. 우리 시대 소농에게는 '자발적 가난'보다 '아름다운 욕망'이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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