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53)
사진1. 적들이 겨눈 총구에서 김일성 주석을 구원한 김정숙 여사
▲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전투지휘를 하느라 미처 적들이 겨눈 총구를 알지 못했던 김일성 주석을 위기일발의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한 몸으로 막아나서며 적들에게 명중탄을 안겨 모두 소멸하였다. 이러한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의 친위전사의 실천적 모범에 의해 적의 총탄을 피할 수가 있었으며 대사하치기전투를 빛나는 승리로 장식하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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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하치기”
먼저 언어에 대한 정리부터 해야겠다. 현재 남쪽의 보통사람들은 우리말 혹은 외래어 그리고 외국어를 지나치게 뒤섞어 쓰다보니 어떤 것이 우리말인지 어떤 것이 외래어인지 조차 가려보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그 말의 뜻 역시 모르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사실 우리말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겨레가 우리말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하는 그 대표적 실례가 바로 불교용어 내지는 불경에 대한 해석문제이다. 불교용어와 불경은 그대로 우리말이다. 즉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를 한 것이 불교용어요 불경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말 경문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했음에도 자신들이 외우면서 내는 소리 자체가 그대로 우리말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그 뜻글자를 해석해서 그게 바로 불경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라고 엉뚱한 해석을 해댄다.
우선 대사하치기에 대한 해석을 하기전에 불교용어에 대한 몇 가지만 해석을 해보도록 하자.
부처(佛陀님): 부처에 대한 어학사전의 내용을 보자.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되어 있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부처”는 “빛”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부=비는 바로 “밝”이다. 밝은 곧 “빛”을 말한다. 따라서 비와 처의 초성음인 “ㅊ”을 취한다. 결국 비+“ㅊ”=빛이 된다. 따라서 부처를 마치 사람인양 부처 뒤에 “님”자 까지 넣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결국 엉뚱한 종교적 믿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상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건 불교 본질적 믿음의 대상인 바로 중생이며 모든 중생들은 빛의 세계 즉 “밝”은 세계에서 귀한 존재로서 사람의 삶을 살게 하자는 믿음에서 상(像)을 만들었으며 머리 위에 원광을 표현한 것이다. 즉 모든 중생들은 그 자체가 신(神)이요 하늘이요 빛이기에 머리위에 원광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자 불교용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그에 대한 해석을 하거나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 접는다. 필자가 굳이 불교용어 하나를 사례로 하여 설명했지만 그만큼 우리 자신들은 우리겨레의 고갱이말도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대사하치기》는 과연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큰 물길 옆에 있는 오르막길을 말 한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치》이다. 치는 고개, 령(嶺), 재, 티를 일본식으로 표기를 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고개를 치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정말 주목을 들여야 할 것이 있다. 이 땅 전국 방방곡곡에 수도 없이 많은 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들 중에 “곰티” “말티” “새티”, …… 등이 있다.《터》가 고개 길에서는 《티》로 변형이 된 것이다. 본래 우리네 땅이라는 말의 변화과정을 보면 티〉 터〉 타〉딴·탄 〉땅이다. 또 땅의 고갱이 우리말에는 《달》도 있다. 그럼 우리의 고개를 말 하는 고갱이 우리말 《티》와 일본식 고개 이름인 《치》를 보면 발음상의 차이이지 《티》가 변형되어 《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일본이 사용하는 고개 이름 《치》는 고개의 고갱이 우리말 《티》이다.
결론적으로 《대사하치기》는 물길 바로 옆에서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고개 길을 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필자는 또 대사하라고 해서 수량도 엄청나게 많고 매우 넓은 물 길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그저 작은 시내에 불과하다. 물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1930년 ~ 1945년 시기까지는 수량도 많고 강의 폭도 넓었었는지 모르겠다.하지만 오늘 날의 대사하는 이름과는 달리 작은 시내에 불과하다. 물론 물이 흐르는 시내 주위로는 제법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어 밭으로 개간을 하고 강냉이 재배를 하고 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물이 흐르는 양도 줄어드는 지도 모르겠다.
사진2. 오늘 날의 대사하 물길
▲ 오늘 날의 대사하 물길이다. 공사중이기는 하지만 흐르는 물의 양이 거의 없다. 그 점에서는 소사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사하나 소사하 모두 흘러가는 물의 양이 대단히 적었다. 솔직히 대사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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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내하는 이송덕 선생이 갈밭 숲을 해치며 대사하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으로 우리는 안내를 한다. 비록 오르는 길이 대단히 멀다거나 높은 것은 이니지만 오르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지난 회 차에도 언급했지만 그 오르는 길이라는 것이 겨우 15m 내외 밖에 안 된다. 갈밭 숲과 작은 나무들로 들어찬 언덕을 오르니 또 다시 넓은 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그 곳 역시 밭으로 개간을 하여 강냉이를 재배하고 있다. 물론 전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가 오른 자리에서 잠깐 대사하치기에 대한 전투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 곧바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옮겨간 자리는 김정숙 항일의 여 투사가 대사하치기전투 당시 적들이 겨눈 총구를 보지 못하고 전투를 지휘하던 김일성 주석을 몸으로 막아 적 세 명을 명중탄을 날려 사살하고 구원한 장소이다.
대사하치기전투는 1940년 3월 화룡현 홍기하 골짜기에서 마에다 토벌대를 멸살시키고 소할바령회의를 가지기 위해 이동을 하는 도중 1940년 6월 안도현 대사하에 도착을 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인솔하던 부대를 은밀하게 뒤 따르던 일본군들과 벌인 전투이다. 이때 일본군 토벌대들은 이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에 김일성 주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은밀성을 보장하면서 악착같이 따라붙어 토벌을 하려하였다. 사실 이 대사하치기전투에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벌어졌다.
그럼 아래에서 대사하치기 전투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가지고 분석해보기로 하자.
대사하치기전투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
먼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항일무장투쟁사 전문연구를 하고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오고 있는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먼저 보기로 하자. 참고로 이송덕 선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의 90%이상을 수집정리하신 분이며 박물관 부관장을 역임했다. 그럼 아래에서 대사하치기 전투에 대한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인용해보기로 한다.
❝ 홍기하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적들은 악에 받쳐 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를 소멸하려고 더욱 미처 날뛰었다. 화라즈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적의 《토벌대》가 집중되였다.
이러한 정황에 대처하여 사령관동지께서는 1940년 4월 안도현 화라즈에서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대부대선회작전의 빛나는 승리를 총화하고 분산활동을 전개하여 적을 도처에서 기습소탕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분산활동의 나날에도 사령부를 보위하는 것을 조선혁명의 운명과 관련되는 제일차적 임무로 여기고 한 몸이 그대로 방채가 되어 장군님의 신변을 보위하였으며 경위대원들에게 조선혁명앞에 지닌 사명감을 깊이 깨우쳐 주었다.
그해 6월 하순 소할바령을 향해 행군하고 있던 부대는 처창즈로부터 소사하를 지나게 되었다.
……
주력부대가 안도현 대사하치기에 이르러 막 강을 건느려고 할 때였다. 뒤따르던 적들이 고지에서 불의의 사격을 가해왔다. 놈들은 사령관동지께서 대오를 친솔하고 계신다는 기미를 알고 미친 듯이 발악하였다. 이 부대는 가장 악질적인 안도현 《신선대》였다. 이 《신선대》를 이끌고 온 자는 3년전 안도현 금창전투에서 최현부대의 불벼락을 맞아 죽은 악명높은 리도선의 형인 리도일이란자였다. 이 자는 동생의 원쑤를 갚겠다고 이를 갈았고《대일본제국》을 위해 분신쇄골이 돌지언정 싸운다고 날뛰는 일제의 특등 주구였다.《신선대》의 주요성원은 이미 우리 군의 징벌을 받아 저승에 간 악질반동들의 자식들과 친척들로 조직되였다.
우리 군은 이처럼 극악한 원쑤들과 불의에 맞다들었던 것이다. 그냥 강을 건너 개활지대로 달려나간다면 적의 화력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을 수 있었다.
장군님의 과담성있는 조치로 하여 불리했던 정황을 유리하게 전변시켜놓았다.
수세에 빠지게 된 적들은 계속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전투는 치렬했다. 장군님께서는 산중턱 바위우에서 전투를 지휘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령관동지의 곁에서 그이의 신변을 지키면서 주변의 정황을 예리하게 살피였다.
갈밭에서 바람결처럼 설레이는 속에 누런 그림자가 사령관 동지께서 계시는 산중턱으로 총구를 겨누는 것을 발견한 김정숙 동지께서는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사령관동지!》 하고 다급하게 웨치며 몸으로 막아나섰다. 그와 함께 싸창의 방아쇠를 당기였다. 순간 총성과 함께 앞에 나오던 적 한놈이 비명을 지르며쓰러졌다. 뒤이어 사령관동지께서 김정숙동지의 어깨너머로 적을 쏘아눕혔다. 김정숙동지의 싸창은 연신 불을 뿜었다. 갈밭으로 기여들었던 대여섯놈의 적들은 모조리 전멸되였다.
거연히 바위우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시는 사령관동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김정숙동지의 얼굴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이처럼 김정숙동지는 사령관동지의 신변안전을 위하여서는 원쑤의 총구앞에서도 서슴없이 나서서 한몸이 그대로 방탄벽이 되고 성새가 되었다.
사령관동지의 안녕과 만수무강을 위하여 바친 김정숙동지의 빛나는 위훈과 불멸의 업적은 천추만대를 두고 길이 빛날 것이다. ❞
〈불굴의 항일녀투사 김정숙동지. 조선민족연구소. 이송덕. 196~199쪽〉
참고로 이송덕 선생이 쓴 대사하치기 전투에 대한 내용은 조선인민혁명군 제4사 연대의 통신원으로서 대사하치기전투에 직접 참가를 한 박춘일 항일투사와 함께 현장을 답사하고 전투상황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이다. 대사하치기전투에 직접 참가한 생존 항일혁명투사로부터 들은 사실이니 독자들은 위 글에 대해 100% 신뢰를 해도 된다. 당연히 북에서 강조하고 있는 항일무장투쟁사 역시 남쪽 수구세력들이 음해하는 황당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할 가치도 없으며 100% 신뢰를 해야 한다.
1940년 6월 안도현 대사하에서 있었던 대사하치기전투는 화룡현 홍기하 골짜기에서 《마에다토벌대》를 소멸하고 화라즈 수림 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걸어온 노정에 대해 총화를 하고 곧 있게 될 《소할바령회의》를 열기 위해 이동을 하는 도중 안도현 대사하부근을 지나게 되자 이를 미리 알아차린 적들이 은밀하게 뒤를 따르다가 대사하치기에서 벌인 전투이다.
일반독자들은 아마도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가 적들의 총구에 겨눠진 위기일발의 정황에서 김일주석을 몸으로 막아나서며 명중탄을 날려 적들을 소멸하고 구한 일화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다만 그 전투가 대사하치기전투인지 어떤 전투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모르고 있을 것이다. 또 그 전투가 높디높은 산 중턱이나 고지등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대부분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사하치기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높디높은 산 정상이나 중턱도 아니고, 커다란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강변에 있는 평범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올라서면 또 제법 널따란 벌판이 있는 그런 곳이다. 단 대사하치기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그리 길다거나 먼 고갯길이 아닌 그저 15m정도나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아주 낮은 언덕이다. 그러나 그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는 오르막 산길이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비록 높지는 않지만 칼로 뚝! 베어저린 듯 깎아지른 수직으로 서 있는 언덕이라서 맨 몸으로는 어떤 사람도 오를 수가 없는 특이한 지형지세이다.앞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대사하치기 역시 백두산자락의 지형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대사하치기전투에서 두 가지의 커다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역적가문에서는 대대로 역적이 나올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북에서는 부단한 교양과 교습 그리고 학습을 통해 그러한 고리들을 잘라낸다고는 하지만 현재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과 고향을 배신하고 자본주의사회로 이탈해 나온 소위 악질 탈북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의 조상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대략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아버지가 잘 못된 길을 걸으면 그 자식 또한 자라서 비슷한 길을 걷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고 자란 것이 그렇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못된 습성이 베어들기 마련이다. 물론 인간사회라는 것이 자연과학법칙처럼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이라는 등식이 불변의 법칙처럼 통하는 것이 아니라서 가끔 부모세대가 잘 못을 저질렀어도 자식들은 그 부모세대의 잘 못을 반성하고 자식들은 절대 그 길을 가지 않고 올바른 길 정의와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부모세대가 올바른 길을 걷는 자식들보다 그렇지 못한 부모의 자식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높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바로 형 이도일과 그 친동생 이도선이를 보면 그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대략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집안에 악질 민족반역자 역적이 한 사람도 아닌 둘 그것도 형과 동생이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 그의 집안내력을 그대로 증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잘 못된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동생이 민족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를 받았다면 응당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을 하고 민족을 위한 길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 찾았어야 함에도 반성을 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단죄를 한 민족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이를 갈았다니 역적도 천하에 이런 역적이 또 있겠는가.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으로 본다. 민족에 대해 반역죄를 짓고 욕되게 살다 가느니 차라리 한 목숨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니겠는가 한다.
우리네 속담이자 명언이 있다.
“참대 끝에 참대 나고, 싸리끝에 싸리 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만큼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도일, 이도선 악질 민족반역자 형제들을 그 부모들에 대해서 가문에 대해서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을 듯하다. 어쨌건 그 집안은 악질 민족반역자 형제를 둘씩이나 둔 덕에 대대손손 영원히 집안의 치욕으로 남아있을 것이 확실하다.
둘째. 친위전사의 자세이다. 위 인용문의 내용만 봐도 지휘부나 사령부 그리고 지도자를 결사옹위를 한다는 것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우선 친위전사는 자신의 한 몸 보다는 지휘부, 사령부의 안위가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 친위전사가 가져야할 자세를 대사하치기전투 현장에서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가 그대로 보여주었다.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가 보여준 친위전사의 귀감이 될만한 대표적인 전투를 보면,
“위기일발의 순간 김일성 주석을 한 몸으로 막아 나서 적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해버린 대사하치기전투를 비롯하여 잘루목전투, 홍기하전투, 홍두산전투, 만강부근전투 등이 있다.이 전투들에서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지휘부, 사령부결사옹위를 삶의 전부로, 드팀없는 신조로 삼고 투쟁해온 친위전사의 귀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 외에도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지휘부와 사령부를 결사옹위하는 길에서는 타협을 몰랐으며, 자신의 한 몸 서슴없이 바쳐가며 투쟁을 해왔다.
참고로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오산동(현재 함경북도 회령시 동명동)에서 아버지 김춘삼, 어머니 오씨와의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 김세준, 언니, 그리고 아래로는 남동생 김기송이 있다.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의 가족은 모두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던 당시 조선족연구가가 말 해주었다.
이송덕 선생이나 또 다른 조선족학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명사수일 뿐 아니라 마음 또한 비단결처럼 고왔다고 한다. 항일아동단을 지도할 때나 조선혁명군 작식대, 재봉대 활동을 할 때에도 나 보다는 늘 동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과 민족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끔찍한 만행을 일삼고 있던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는 뼈 속 깊이 원한을 새기었으며 그 앞에서는 그 어떤 용서나 주저함도 없이 무자비했다고 한다.
가슴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넘쳤기에 항일의 여 투사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혁명의 든든한 거목으로 자랄 수가 있었다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두 역사연구사 선생들은 말 해주었다.
위에서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이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대사하치기전투에서 지휘부 결사옹위 사령부 결사옹위의 귀감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사진3. 대사하치기전투현장에서 해설중인 이송덕 선생
▲ 대사하치기전투가 벌어졌으며, 전투지휘를 하느라고 적이 겨눈 총구를 미쳐 보지 못하여 위기일발의 순간을 맞은 상황에서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가 자신의 한 몸으로 막아나서 적들을 소멸하였던 바로 그 장소에서 이송덕 선생이 이창기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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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하치기전투에 대한 북측 자료
대사하치기전투에 대한 북측 자료를 인용해보도록 한다.
대사하치기전투에 대한 북측 자료로는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중 중 김명화 항일의 여 투사가 쓴 내용을 참고로 인용하기로 한다.
❝ 1940년 6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사령부직속 경위중대를 친솔하시고 소할바령을 향해 행군하시던 때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 김정숙동지께서 작식대원으로서 함께 가시였다.
대오가 안도현 대사하치기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에는 높지 않은 산이 있었고 앞에는 허리밑까지 오는 대사하강이 가로놓여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한 후 대원들이 막 강을 건느려고 할 때였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강바닥에 탄알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이 대렬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신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뒤따르던 놈들이 뒤미처 그곳까지 도착하여 고지우에서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한것이였다.
정황은 매우 위급하게 되였다. 그냥 도하한다면 적들의 화력을 집중적으로 받아 큰 손실을 입을수 있었다.
만약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대담하고도 민활한 지휘가 없었더라면 이 위험한 고지에서 벗어날수 없었을것이다.
적들의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싸창을 빼드시고 고지를 향하여 돌격명령을 내리시였다. 뒤이어 요란하게 울리는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대원들은 일제히 《만세》소리 높이 비호처럼 고지를 향하여 육박하였다.
순식간에 정황은 급변하였으며 아군의 공격에 질겁한 적들은 수세에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악랄한 놈들은 고지에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전투가 한창 가렬하게 진행되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중턱 바위우에 올라서시여 전투를 지휘하고계시였다.
이때 김정숙동지께서는 곁에서 그이를 호위하고계시였다. 그이의 신변을 념려하여 주위를 경각성있게 살피고있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군데군데 작은 나무들이 서있는 갈대밭속으로 대여섯놈의 적들이 총을 겨눈채 줄을 지어 배밀이로 기여오고있는것을 발견하시였다.
참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그 순간 그이께서는 급히 사령관동지를 몸으로 막아나서시면서 맨앞에 엎디여 총을 겨누고있는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그놈을 거꾸러뜨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어느사이에 벌써 김정숙동지의 어깨너머로 두번째놈을 거꾸러뜨리시였다.
이어 세번째놈을 김정숙동지께서 거꾸러뜨리시였다. 이렇게 두개의 싸창이 연방 불을 뿜어 그자리에서 마지막놈까지 소멸해버리시였다.
이것은 한가지 실례에 불과하다.
장구하고도 간고한 투쟁의 나날에는 이러한 위험한 일들이 한두번만 있지 않았다.
그때마다 위대한 수령님의 충직한 전사들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처럼 위험한 고비마다에서 한몸이 그대로 방패가 되여 위대한 수령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였던것이다.
항일무장투쟁의 불길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된 김정숙동지는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서도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쳐 투쟁하시였다.
참으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생애는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 계급적원쑤들에 대한 비타협적투쟁정신, 혁명적동지애, 당과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직성을 보여준 숭고한 모범으로서 오늘도 우리들을 무한히 고무하여주고 있다. ❞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중 김명화 씀〉
대사하치기전투에 대한 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은 북측이나 이송덕 선생의 자료나 대동소이하다. 두 자료 모두 “친위전사의 자세” “지휘부결사옹위정신” “사령부결사옹위정신”이란 어떤 것인가를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가 실천적으로 보여준 전투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총탄이 오가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듯 하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어나가는 판에 내 한 몸을 던져 지휘관과 사령부를 몸으로 방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오늘 남쪽의 현실에서 보면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오늘 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일축해버리고 말 것이다. 대사하치기전투에서 보여준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의 주휘부, 사령부결사옹위정신은 후세들에게는 그만큼 빛나는 귀감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을 보면
“장구하고도 간고한 투쟁의 나날에는 이러한 위험한 일들이 한두번만 있지 않았다.
그때마다 위대한 수령님의 충직한 전사들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처럼 위험한 고비마다에서 한몸이 그대로 방패가 되여 위대한 수령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였던것이다.”
라고 하여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의 사령부결사옹위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말 해주고 있다. 이송덕 선생과 함께 대사하치기전투현장을 방문하여 대사하치기전투에 직접 참가를 하였던 박춘일 항일투사는 “당시 해당전투에서 사령관의 몸을 막아 나서며 적을 소멸하는 과정에서 적이 쏜 총알 세 발이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의 옷깃을 뚫고 지나갔다.”고 한다.그만큼 항일의 여투사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충실성 그리고 사령관에 대한 결사옹위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사하치기전투였다.
또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홍기하전투에서도 사령부를 결사옹위하기 위해 결사전을 벌이다 적이 쏜 두 발의 총알이 짊어지고 있던 배낭에 맞았는데 나중에 보니 다행이도 그 총알이 양재기를 뚫고 지나가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친위전사의 “지휘부결사옹위정신” “사령관결사옹위정신”의 귀감을 실천적 모범으로 보여준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였다.
북측의 자료들은 보면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의 사격술을 신출귀몰했었다고 한다.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갔을 때 이송덕 선생이나 다른 연구자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에 대해서 인정을 하였다. 백발백중 빚나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나라를 빼앗고 자신의 가정도 빼앗아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와 복수심이 그러한 백발백중의 명줄사격줄을 가지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김일성 주석이 이끌던 조선인민혁명군은 불의의 기습을 받은 대사하치기전투에서도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전투지휘를 한 지휘자의 뛰어난 전술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특히 대사하치기전투를 지휘하다가 적들이 겨눈 총구에 위기일발의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였던 임시지휘처가 자리한 곳은 사면팔방으로 적들의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는 사방이 확 트인 곳이다. 그만큼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유리한 전투지휘처를 자치하고 대원들의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하였다.
또 하나의 대사하치기전투승리의 요인은 지휘자의 명령에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서슴없이 바쳐가며 싸운 항일혁명투사들의 용맹성과 용감성 그리고 투철한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항일혁명투사들은 지도자의 명령이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 정도의 높은 명령수행정신이 대사하치기전투에서 승리를 안아올 수 있었다.
사진4. 항일의 여투사 김정숙 여사의 고향 함북 회령
▲ 원래 김정숙 여사의 조상들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할아버지 때 함경북도 회령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으며 김정숙 항일의 여투사는 회령에서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고 한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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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당시 세계 최강의 국력과 무력을 갖췄다고 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정규무력의 지원도, 익측(翼側)도 후방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연전연승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사령관과 유격대원들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싸운 사상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사하치기 전투가 벌어졌던 오늘 날의 대사하부근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시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해보 무방할 것이다. 가장 먼저 흐르는 물의 양이다.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대사하치기전투가 벌어질 당시까지만 해도 물이 대단히 많이 흘러갔었던 듯 싶다. 하지만 오늘 날에는 대사하를 흐르는 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줄어있다. 물론 계절적 차이도 있을 수 있다. 대사하치기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6월 이었고 우리가 항일전적지 답사를 하던 시기는 10월 말이었으니 계절적 차이에 의해서도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계절적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물이 흘러가는 폭을 보면 결코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다. 물이 흘러가는 강폭 역시 대단히 좁다.
대사하치기전투가 벌어졌던 대사하의 풍경 또한 당시와 많이 달라진 듯하다. 이송덕 선생이나 당시 전투상황을 묘사한 자료들을 보면 그 곳은 대단히 드넓은 갈밭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모두 밭으로 개간을 하여 강냉이를 재배하고 있다. 갈밭은 겨우 언덕 아래 물이 흐르는 좁다란 도랑 주위에만 조금 있을 뿐이다.
또 대사하치기전투가 벌어졌던 언덕 위를 봐도 당시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그래도 나무들이 들어선 수림지대였다고들 한다. 하나 오늘 날 그 곳도 예외 없이 개간을 하여 강냉이를 재배하고 있으며, 언덕 낭떨어지와 바로 그 위에 작은 나무들만 산재되어 있다. 답사 내내 필자는 좀 황량한 느낌을 받았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 우리는 대사하치기전투현장 답사를 마치고 다음 답사 길에 올랐다.
※※※ 다음 회 차에는 지난번에 채 다루지 못한 대전자전투를 다루도록 한다. ※※※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6년 10월 5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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