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사실의 판단과 가치의 판단
간혹 신의 ‘뜻’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후보자가 어느 교회에서 했던 강연의 내용 일부가 회자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하여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준 역사에 대해 신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 쓰나미와 같은 대형자연재해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 대형교회의 원로 목사가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큰 고통과 시련을 통해 거듭나게 하는 신의 섭리라고 해석하고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고통의 당사자와 많은 사람들은 신의 섭리를 의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고자 하는 생명에게 부당하게 착취하고 무참히 죽이는 일이 어찌 신의 뜻이냐고 건강한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묻습니다. 전염병과 자연재해가 신의 뜻이라면 그 뜻은 사랑의 마음인가를 의심합니다. 확신에 찬 종교인은 신앙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하는 영역이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예수님의 판단과 말씀이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상식과 합리에 기초한 ‘사실’을 벗어난 적이 있었을까요? 간혹 종교의 성전
에서 보이는 신비한 이적과 몇 가지 상징적 기호를 가지고 우리는 세상의 합리적 사실을 뛰어 넘으려고 합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라는 현실의 구체적인 인과 관계, 즉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종교인들이 상식에서 벗어난 왜곡된 발언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그렇게 발언하는 것입니다. 사실의 판단과 가치의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비록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혹은 알수 없지만, 고난 극복의 방편으로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의 재앙이 일어난 것은, 우리가 자연 앞에 겸손하라는 신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또는 어떤 불순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서 신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특정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 판단이 사실의 판단을 규정합니다.
세상의 이치가 이러이러 하다고 정확히 이해解하는 것이 사실의 판단입니다. 즉 존재와 현상의 구성 원리와 운동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이해에 바탕한 행위行입니다. 우리는 존재와 현상의 구성 원리와 운동의 속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면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해와 경험에 바탕한 확신信입니다. 그리고 이해와 믿음의 바탕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면서 진리를 내면화하고 자기화 하게 됩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삶, 진리 그대로의 삶證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믿음信· 이해解· 실천行·증험證의 신행체계입니다.
이 중에서 핵심은 존재와 현상, 즉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온갖 일들, 즉 사실을 잘 이해하는 ‘이해’입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불신과 맹신을 낳습니다. 그런 잘못된 믿음은 때로는 강압과 폭력, 차별과 갈등을 만듭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을 한없이 황폐화시킵니다. 여러분은 왜 부처님이 반복해서 강론하고 문답하고 토론하면서, 세상은 조건의 결합으로 생하고 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결 같지 않은 것이다, 한결 같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실체가 없다는 이치를 이해시키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지요? 그것은 이 세상의 존재하고 운동하는 전후의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 그에 근거한 바른 삶의 방향과 지향이 설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귀하고 천하게 결정되어 있다고 그렇게 알고 믿으면(사실의 판단) 노예계급을 만들고 그들을 혹독하게 강제 노동을 시킬 것입니다(가치의 판단).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까요? 그것은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것들의 다양한 운동과 변화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중론』제1 <관인연품>은 첫 게송은 존재와 운동의 성립에 대하여 네 개의 짝 여덟 개의 항목으로 구성하여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은 앞서 말했듯이 ‘그 무엇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그 무엇도 아니라면 지금 있는 것들의 생멸과 다양한 모습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것은 연기緣起한 것이다. 즉 있어 온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라는 설명입니다. 존재할 만한 조건이 성립되면 발생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첫 게송은 세상 사람들이 통상 이 우주의 존재의 발생과 운동에 대해 사유하고 설정할 수 있는 것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아니다, 아니다, 당신들의 이러저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부정합니다. 온갖 있을 수 있는 잘못된 견해들을 팔불八不로 집약합니다. 즉 우리가 흔히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범하기 쉬운 여덟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진멸시키시도다. 내가 (이제)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
처음 게송에서 부정하고 있는 팔불의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모든 생명체나 무정물의 존재는 새롭게 생겨나거나 완전히 소멸되어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온갖 제도와 관습, 다양한 차별과 갈등, 투쟁과 불행, 선과 악의 현실적인 모습들은 (미리서부터)‘있었던 것’이 생겨난 것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경우든) ‘있을 수 없는 것’이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항상 그 모습 그대로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없고, 그렇다고 완전한 단절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어느 누구나 어떤 무엇으로부터, 즉 최초의, 영원히, 불변하는, 일자一者로가 창조했거나 그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지금 여러 학파의 이 여덟 가지 주장이 정확한 사실의 판단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의 이어지는 곳곳에서 존재의 발생과 운동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면 가치의 판단, 즉 인간의 보편 윤리와 올바른 가치 지향에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가르주나는 첫 머리에서 올바른 ‘가치의 판단’을 위하여 ‘올바른 사실의 판단’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당시 인도사회의 각 종교와 학파의 주장을 전면 오류라고 선언합니다.
당시 존재와 운동에 대한 다양한 주장은 『중아함』의 「도경」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늘 존재하고 있는 어떤 불멸의 단독자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발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는 그로부터 변화하고 분화되어 세상 만물이 발생하고 그가 우리의 모든 삶을 주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전생의 어떤 행위로 인해 금생의 모든 신분과 선악의 행위들이 미리서부터 결정되어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어떤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그저 우연으로 행복과 불행, 선악의 행위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존재에 대한 설명이 사실에도 부합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그리 믿는다면 윤리와 삶의 가치 실현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논파합니다. 만약 ‘누가’ 우리의 존재를 만들고 의지와 감정을 주재하고 조정한다면, 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전생에서부터 미리 결정되고 예정된 것이라면, 그리고 지금 우리의 행위와 결과가 아무런 원인없이 발생한 것이라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할까요?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의 ‘자유 의지’ 즉, 수행을 통하여 번뇌를 소멸하고 해탈과 안락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팔불八不은 이렇게 우리의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삶의 모습을 그릇되게 해석하면 그대들의 삶에 심각한 오류와 왜곡이 발생한다. 그러기에 알아야 한다. 고정불변하는 그 ‘누가’ 세상 만물을 만들었고 ‘그 무엇’에서 변화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것은 사견이고 희론이다. 인간의 무지와 욕망이 구성한 허구적인 망상이다. 이 세상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모든 것은 “조건이 있으면 발생하고 조건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만들었느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만들어졌느냐고 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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