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거대동물 배설물 사라지자, 지구 영양균형 흔들

거대동물 배설물 사라지자, 지구 영양균형 흔들

조홍섭 2015. 10. 30
조회수 4290 추천수 0
멸종과 남획으로 '거대 배설물' 줄자 영양분 수송 90% 이상 급감
고래, 바닷새, 연어 등은 바다에서 육지로 양분 순환시키는 주요 통로

Anim1754_-_Flickr_-_NOAA_Photo_Library_s.jpg» 길이 30m, 몸무게 180t에 이르는 대왕고래는 지구에 존재한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크다. 심해의 크릴을 하루 3.6t까지 잡아먹고 바다 표면에 배설해 바다밑의 영양분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일을 하지만 남획으로 99% 이상의 개체수가 줄었다. 사진=미 국립해양대기국(NOAA)

바위 속 광물이 풍화하고 침식되면서 녹아나온 영양물질은 결국 강물을 따라 바다로 가고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는다. 그렇게 굳은 해저 퇴적암은 해양 지각이 되어 대륙 밑으로 파고든 뒤, 화산활동과 지각변동과 함께 땅위로 돌아온다. 식물의 필수영양소인 인 등 영양물질은 이렇게 순환하며 지구를 돈다.
 
그러나 수억년이 걸리는 이런 긴 순환만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한 생물은 생명활동을 통해 영양물질을 짧은 시간 동안 순환시킨다. 거대 동물은 이 과정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고래는 바다 밑 100m 수심의 깊은 바다에서 먹이를 잡은 뒤 바다 표면에서 배설하면서 심해의 풍부한 영양물질을 바다 표면으로 옮긴다. 연어처럼 바다에서 자란 뒤 강으로 거슬러 올라 번식하고 죽는 물고기는 바다 영양물질을 육지로 나르는 효율적인 수송수단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고래는 바다의 농부, 영양 듬뿍 배설물이 '거름')
Ice_age_fauna_of_northern_Spain_-_Mauricio_Antón_s.jpg» 약 1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까지 매머드 등 다양한 거대 초식동물이 육상 생태계를 지배했다. 그림=Mauricio Antón, 위키미디어 코먼스
 
바다와 육지 사이뿐 아니라 육지 안에서도 거대 동물은 넓은 범위를 옮겨다니며 막대한 양의 배설물을 흩뿌려 영양물질을 분산시키는 기능을 해 왔다. 적어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기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플라이스토세의 대량멸종 사태를 겪으면서 거의 모든 대형 초식동물은 사라졌다.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남획으로 고래와 연어 등의 개체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대규모 영양 수송 수단이 멈춘 지구 생태계는 무사할까.
 
Becharof_Wilderness_Salmon_s.jpg» 여러해 동안 바다에서 자란 뒤 강 상류에 돌아와 번식하고 죽는 연어는 바다 영양물질을 육지로 순환시키는 중요한 생태적 기능을 한다. 알래스카 번식지로 거슬러 오르는 홍연어 무리. 사진=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국

크리스토퍼 도티 영국 옥스퍼드대 환경변화연구소 박사 등 국제연구진은 26일치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에서 거대 동물의 영양물질 순환 능력이 90% 이상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바다와 대륙 내부에서 영양분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지구생태계의 펌프가 작동을 거의 멈춘 상태라고 연구자들은 진단했다.
 
몸집과 이동 범위 면에서 영양분 수송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동물은 고래다. 길이 30m에 몸무게가 180t에 이르는 대왕고래는 낮 동안 바다 밑 100m 깊이에 숨어 있는 크릴을 하루 3600㎏까지 잡아먹고 물 표면에서 배설한다.
 
1970년대 대왕고래의 포획이 중단되기까지 최대 서식지인 남극해에서만 33만 마리가 포획돼 남은 개체수는 애초의 0.15%로 줄었다. 지난 300년 동안 세계의 고래는 66~90% 줄었다. 연구자들은 고래와 다른 해양동물이 과거보다 77% 줄어들면서 이들이 심해에서 표면으로 옮기던 영양물질은 3억 4000만㎏에서 7500만㎏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fig.jpg» 과거 거대 동물이 바다와 육지, 육지 안에서 영양분 순환을 하던 잠재량 및 현재 감소폭. 그림=크리스토퍼 도티 외 <피나스>

연어 등 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고래 다음으로 영양물질 수송에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 그 양은 1억 4000만㎏이었지만 96%가 줄었다. 바다에서 성장한 연어는 배설물보다는 몸 자체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주검이 육상 생태계를 살찌우는 영양분이 된다.
 
매머드를 비롯해 구석기시대 육지를 어슬렁거리던 거대 동물들도 18만㎏의 영양물질을 분산시키는 노릇을 했지만 92%가 멸종했다. 특히 자동차 크기의 나무늘보 등 거대 초식동물이 15종으로 가장 많았던 남아메리카는 이들이 모두 멸종하면서 영양물질을 분산시키는 기능이 사실상 중지됐다.

g1.jpg» 육상 대형 초식동물에 의한 영양물질 수송 변화. 맨 위가 과거, 가운데가 현재, 맨 아래는 과거 대비 변화율. 그림=크리스토퍼 도티 외 <피나스>

주 저자인 도티 박사는 “과거에 동물은 영양분의 이동에 중요한 구실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로 동물이 지구를 비옥하게 유지하는데 핵심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멸종과 개체수 감소로 이런 기능을 과거보다 10% 이하로 줄어들었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식물의 필수영양소인 인은 현재 인광석에서 채취한다. 그러나 채굴 가능한 양은 앞으로 50년 안에 사라질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의 경작지 가운데 30%는 인 부족을 겪고 있으며, 반대로 일부 지역은 인 과다로 부영양화 문제를 안고 있다. 대안은 뭘까.

g2.jpg» 바다에서 육지로 나르는 인의 양(단위는 연간 평방킬로미터 당 킬로그램). 위는 연어, 아래는 바닷새. 그림=크리스토퍼 도티 외 <피나스>
 
연구자들은 고래와 물개 등 대형 해양동물과 영양분 수송에 큰 구실을 하는 바닷새의 보전과 복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바닷새는 육상 대형 초식동물이 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630만㎏의 영양물질을 바다에서 육지로 옮긴다.
 
멸종한 대형 초식동물을 가축이 대신할 수는 없을까. 연구자들은 이미 가축의 생물량은 멸종한 거대 초식동물을 넘어섰지만 이를 대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가축은 좁은 지역에 갇혀 있어 고농도의 배설물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뿐 넓은 생태계에 고루 퍼지지 않는다. 또 가축은 단일종이어서 생태계에 적합한 다양한 종이 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연구자들은 가축 종을 다양화하고 방목하는 방식은 일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Christopher E. Doughty et. al., Global nutrient transport in a world of giants, PNAS, doi: 10.1073/pnas.1502554112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5/10/23/1502554112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87년의 실패, 반복하지 않으려면…"


[백년포럼] 1987년의 꿈과 2015년의 현실
성현석 기자 2015.10.31 09:39:36


1987년 6월 항쟁 당시 태어난 이들이 지금 28살이다. 취업준비생이거나 말단 사원인 그들이 보고 겪은 한국은 어떤 곳일까. 각종 통계가 입증한다. 부모 잘 만난 소수에겐 꽤 살만한 곳이다. 나머지 다수에겐 '헬조선'이다. 극심한 경쟁, 미래에 대한 불안, 파괴된 공동체, 약자에 대한 조롱….

민주화를 향한 싸움 속에서 숱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꿈꿨던 미래가 이런 것일 리는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민주화를 이끌었던 세대와 젊은이가 만나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마련됐다. 새로운 백년을 모색하는 연구단체 사단법인 '다른백년' 창립준비위원회가 진행한 '백년포럼' 분과 창립포럼이다. 서울시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410호 강당에서 진행된 이날 포럼의 주제는 "민주화 세력은 왜 좌초하였나?-1987년의 꿈과 2015년의 현실"이었다. 이부영 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전 국회의원)과 권형택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나유경 '청년연합 36.5' 대구경북위원장 등이 발제자로 참가했다.

민주화 세력이 좌초했다고 단정 짓다니…. 지나친 자학이라는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백년포럼 대표를 맡고 있는 박인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은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학이냐, 자부심이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진실 그 자체라는 것. 경제가 성장했지만 사회 구성원이 느끼는 절망감은 오히려 더 증폭됐다. OECD 1위를 기록한 자살률이 확인시켜준다. 이런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다. 박 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사회를 맡았다. 

▲1987년 6월26일 부산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 참가한 한 시민이 태극기 앞에서 윗옷을 벗고 시위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직선제 이후'에 대한 기획이 없었다"

세 명의 발제자는 연령대는 제각각이지만, 공통분모가 뚜렷했다. 현실의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봤고,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이부영 전 상임의장ⓒ연합뉴스
이부영 전 상임의장은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1980년대 재야 운동의 지도부였으며,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의 지적은 울림이 컸다.

직선제 개헌을 이룬 뒤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는 점이 첫 번째 지적이었다. 과거의 정치사회 운동은 현실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함께 마련했다. 일제 강점기 신간회 운동, 해방 직전의 건국 동맹 등이 그렇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역시 미래 전망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했었다. 그러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라는 도식적 틀에 갇혀서 생명력을 잃었다. 이 전 상임의장이 보기에 NL과 PD는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었다. 관념적인 전망에 갇힌 이론과 실천은 결국 운동권의 대대적인 체제 투항 및 전향으로 이어졌다.

더 구체적으로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를 어떻게 치러낼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이 전 상임의장은 '전두환 정권이 관리하는 선거가 어떻게 공정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탄식했다. 그는 "4월 혁명 뒤 허정 과도정부의 경우처럼 '전두환 퇴진-선거관리 과도정부 수립운동'이 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직선제 쟁취 다음 목표를 제시해서 민주화 세력이 흩어지는 걸 막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무관심

아울러 그는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한국 민주화 세력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나라 안에서는 1970~80년대가 엄혹한 독재 체제였다. 하지만 나라 밖에선 냉전 체제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른바 '데탕트(긴장 완화)' 흐름이다. 이 전 상임의장은 "데탕트의 도래가 한반도의 군부독재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상 위에 로드맵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부독재가 '6.29 직선제 수용'을 발표하자 그 한 가지 페인트 모션(기만술책)만으로 휘청거린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노태우 정권의 중국-러시아와의 수교,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비핵화선언 합의에 대해 공안탄압을 받으면서도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라는 반성도 나왔다. 그는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 의제가 야권과 재야민주화운동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며 "(1980년대 이후)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남북문제에서 북측이 수세로 돌아선 것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야권과 재야의 냉정한 인식전환이 요청되던 시기"였다는 지적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이 세계사적인 '데탕트' 흐름에 둔감했던 근거로, 이 전 상임의장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꼽았다. 당시 온 나라가 울음바다였다. 비록 전두환 군사독재 정부가 기획한 행사였으나, 그 뒤에 있는 에너지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었다. 남북 화해를 염원하는 숨은 에너지를 똑바로 읽지 못한 건 당시 민주화 세력의 한계였다는 게 이 전 상임의장의 생각이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합뉴스


양김 분열의 지독한 후유증

1980년대 민주화 운동가들의 진로는 다양하다. 일부는 계속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했다. 나머지 많은 수는 생업을 찾아 나섰고, 또 일부는 드라마틱한 전향을 했다. 이른바 '뉴라이트' 인사들 가운데 전직 운동권이 종종 있다. 나머지 가운데 또 일부가 제도 정치에 도전했다.

지금 젊은이들이 1987년 세대를 불신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정치에 있다. 정치권에 뛰어든 범민주화 세력이 썩 신뢰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정치인은 다 똑같다"라는 정치 혐오와도 맞닿아 있다. 이날 포럼 참가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것도 이 대목이다.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거쳤음에도, 한국 민주주의는 왜 이 지경인가. 한국 정치는 왜 이 모양인가.

참가자들이 내놓은 답은 대체로 일치했다.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른바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분열에서 비롯됐다는 것. 1987년 대선 당시 노골적인 관권, 부정선거가 진행됐음에도 노태우 당선자의 득표율은 36%에 불과했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 했다면, 이길 수 있는 선거였다. 그들의 분열로 말미암아, 6월 항쟁으로 위기를 맞았던 수구 세력은 기운을 회복할 여유를 얻었다. 군부 세력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민주화 운동 대오는 뿔뿔이 흩어졌다. 민주 세력은 힘이 빠지고, 수구 세력은 오히려 더 견고한 진지를 마련했다. 그뿐 아니다. 숱한 목숨을 잃어가며 싸운 결과가 군부 세력의 승리였다는 패배감은 정치 및 사회 참여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다.

노태우 정권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잇따라 들어섰지만, 이는 민주 세력의 독자 집권이 아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통해 수구 세력에게 투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5.16 쿠데타 세력과 손잡고서야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 실현, 남북 화해 등은 불가능했다. 198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출마를 정당화한 논리였던 '4자 후보 필승론'은 지역 구도를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 상임의장은 "'4자 후보 필승론'을 재야민주화운동 출신들이 제안했다는 점은 통렬한 한계"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이들이 "대선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대선에 따른 지역분열 후유증을 내다보지 못했을 리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 역사적 후유증을 지금까지 앓고 있다는 말도 곁들였다.

권형택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역시 양김의 분열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 진영이 겪은 패배가 낳은 후유증이 너무 큰 탓이다. 그는 당시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어떻게든 후보 단일화를 강제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권 전 부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당시 양 김 씨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성서 속) 솔로몬 재판에 나오는 한 여인처럼 (…) 대통령 후보를 양보할 수는 없었을까? (…) 자신의 희생으로 대의를 이루는 큰 정치인이 이때 나왔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치 풍토가 많이 나아졌을 것이고,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민의 기대도 지금처럼 땅바닥에 추락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운동장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서 나란히 앉은 김대중, 김영삼. ⓒ 연합뉴스


"12년짜리 회사에 인생 걸라고요?"

1987년 당시,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과반수였다. 이들의 염원이 꺾인 후유증은 지금 젊은이들이 겪고 있다. 국민의 염원과 의회 정치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가 정착하면서, 젊은이들의 절망감을 제도적으로 풀어낼 장치가 사라졌다. 1990년에 태어난 나유경 '청년연합 36.5' 대구경북위원장은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문제를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왜 청년은 정치와 멀어졌는가. 정치를 통해 자기 문제를 풀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물론 청년의 정치 참여 통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계가 명확하다. 나 위원장은 "출세 지향적인 소수의 청년에게만 통로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런(출세 지향적인) 청년을 이용만 하려는 기성세대 때문에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 쌓여간다"고도 했다. 또래 젊은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솔직하게 담아내는 통로는 아직 없다는 지적이다.

이어 나 위원장은 당장의 생존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대표적인 게 취업난이다. 일자리가 적다. 그래서 경쟁이 살인적이다. 또래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이에 대해 기성세대는 '눈높이를 낮추라'라고만 한다. 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주문이다.

나 위원장은 일본과 한국의 기업 수명을 비교하며, 기성세대의 주문을 반박했다.

"일본은 1000년 이상 된 회사가 7개, 300년 이상 된 회사가 604개, 200년 이상 된 회사가 3113개, 100년 이상 된 회사가 2만2000여 개가 있다. 반면, 한국은 100년 이상 된 회사만 7개, 60년 이상 된 회사가 184개다. 더 충격적인 건 한국 중소기업의 평균 수명은 12년이라는 점이다.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에 취업하라는 건, 12년짜리 회사에 인생을 걸라는 말이다."

12년을 못 넘기는 회사에, 20대 후반에 취업하면, 결혼해서 낳은 아이가 학교 갈 무렵에 관둬야 한다. 열악한 사회안전망을 고려하면, 미래가 끔찍해진다. 결혼과 출산이 두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일자리 줄어서 불안?일자리 나누는 법을 만들면 된다!"

30년 뒤,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나 위원장은 일자리 부족을 이야기했다. 자동화의 진전 등에 따라 좋은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옆에 있던 이부영 전 상임의장이 한마디 했다. "(젊은이들이) 국회에 들어가 법을 바꾸면 되지."

"(일자리가 줄어들면) 근로시간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는 법을 만들면 된다. 그게 정치다."
프레시안 조합원, 후원회원으로 동참해주세요. 좌고우면하지 않고 '좋은 언론'을 만드는 길에 정진하겠습니다. (☞가입하기)

교육과 복지, 재벌 문제를 주로 취재했습니다. 복지국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내려고 김용철 변호사의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과학자, 아니면 역사가가 되고 싶었는데, 기자가 됐습니다. 과학자와 역사가의 자세로 기사를 쓰고 싶은데, 갈 길이 멉니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황태성 평전 출판..손녀 황유경 씨, 명예회복 요구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
승인 2015.10.30  16:49:19
페이스북트위터
  
▲ 황태성의 일대기를 다룬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출판기념회가 29일 저녁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열렸다. 진혼굿이 진행되면서 남측에 남겨진 유일한 혈육인 손녀 황유경(왼쪽) 씨가 눈물을 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가 되도록 하려던 내가 이렇게 가야했느냐. 날 잊지말라."
만신의 몸을 빌어 베를 찢으며 저승길로 향하는 황태성의 목소리에 손녀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분단이후 최대 거물급 남파 공작원이라던 황태성은 과연 간첩인가. 밀사인가. 그를 형님처럼 따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를 왜 죽여야 했는가.
한국 현대사 미스테리 중 하나인 '황태성 사건'의 전모와 인간 황태성을 조명한 책『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김학민.이창훈 공저) 출판기념회가 29일 오후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열렸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황태성의 넋을 달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날 출판기념회에서 공동저자인 김학민 씨는 "황태성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52년이 지났다"며 "이분의 일생을 더듬어서 일제시대의 삶을 다시 연구해보고 말이 많은 1961년 소위 간첩사건의 진상은 무엇이고, 남북 현대사가 어떻게 흘렀는가를 추론해 본 책"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간첩인가 밀사인가의 논란만있지, 이 분이 일제시대 항일운동하면서 독립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를 몰랐다"라며 "이 책은 황태성 선생의 행적과 생각을 드러내고 정리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성과가 아닐까 자부한다"고 말했다.
  
▲ 책『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공동저자인 김학민, 이창훈 씨(오른쪽부터).[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황태성의 조카사위로 간첩사건에 연루된 권상능 씨는 "내가 할 수있는 모든 사실관계를 증언해주고 저자들의 애국적인 정신, 조국통일을 위한 정신이 이 책을 통해서 온 국민들에게 알릴 수있는 계기가 된다면 고인 정신 기리는데 도움된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손녀 황유경 씨도 "저는 너무 어려서 할아버지 기억은 그리움밖에 없는데 애써주신 데 대해서 부끄럽고 감사하다"며 "앞으로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기념회는 양춘승 씨의 사회로 곽한나 연주가의 피리연주에 맞춰 박종순 씨가 시가창으로 고혼을 했으며, 오우열 만신이 진혼굿을 맡았으며, 1백여 명이 참석했다.
  
▲ 책『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황태성(1906~1963)은 경북 상주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와 연희전문을 다닌 엘리트였다.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 교사 배척 동맹휴교, 광주학생운동 서울지역 전파 등에 앞장섰으며, 1935~1940년 항일조직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리고 신간회 김천지부 대표, 조선공상단 경북도당 조직부장,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회 후보위원, 경북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 임종업 건준 김천군 인민위원장과 함께 경북지역 사회주의 3인방으로 불렸다.
1946년 11월 월북한 그는 당 중앙위원, 산업성 지방산업관리국장, 무역성 서리 겸 부상 등 고위인사였으나 1961년 5.16쿠데타는 안락할 수 있던 삶을 바꿔놓았다. 같은 해 8월 김일성 수상의 남북협상 밀명을 받고 남파, 박정희를 만나려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돼 1963년 12월 57세의 나이에 간첩죄로 처형됐다.
이러한 그의 일생을 황태성의 남측 혈육인 손녀 황유경 씨, 조카 임미정.권상능 씨 부부, 김민하 씨등의 증언과 역사자료 등을 토대로『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가 빛을 봤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황태성의 항일운동활동도 담겼다. '푸른역사'에서 출판했고 가격은 2만원이다.
  
▲ 곽한나 연주가의 피리연주에 맞춰 박종순 씨가 시가창으로 고혼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1백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황태성의 손녀 황유경(왼쪽)과 조카사위 권상능 씨.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미니인터뷰] 황태성의 남쪽 손녀 황유경 씨.
황유경 씨(67세)는 황태성이 남쪽에 남긴 맏아들 황경옥의 외동딸이다. 황경옥은 1948년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됐다. 황태성의 둘째 아들 황기옥은 세브란스 의대 재학 중 함께 월북, 평양의대를 졸업했으나 현재 생사를 알 수없다.
남쪽을 내려온 황태성은 1961년 손녀 황유경을 만났다. 황유경은 당시 동덕여중 1학년생이었으며, 훗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내가 황태성씨의 손녀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 미국 샌디에고에 거주하고 있다.
  
▲ 황태성의 손녀 황유경 씨. 뒷편 할아버지의 사진과 닮아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중학생 시절 어떻게 할아버지를 만났는가.
■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처음으로 임미정 고모(권상능 씨 부인)가 학교를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친구분이 보자고한다라고 그러시더라구요. 고향에서 오셨다면서. 그래서 따라갔죠. 김민하 씨 집에. 그때 처음 뵜어요.
□ 처음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어떤 인상이었나.
■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어려서 외갓집에서 자랐거든요.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서울에 오셨어요. 그래서 저는 외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은데 고모 손에 끌려왔으니까. 저녁먹고 가라고 해도 마음이 외할머니한테만 있어서 할아버지가 붙잡는데도 뿌리치고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래서 엄마한테 말씀드렸더니 아무래도 할아버지 보통 분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고모한테 가서 친할아버지인 줄 알았죠.
□ 할아버지를 자주 만났는가.
■ 같이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라고 알았을 때는 이미 중앙정보부에 계셨어요. 거기가 동대문 전차역 종점인데. 제가 동덕여중 다녀서 걸어서 왔다갔다하면서 매일 만났어요. 거기서 저녁도 같이 먹고. 기간이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가.
■ 우리 할아버지니까 물론 좋죠. 인자하시고 선하시고..그런 모습만 기억나요.
□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아깝죠. 저하고 조금이라도 살다 가셨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도 있구요. 속상해요 한마디로. 안타깝게 가신 분이죠.
□ 할아버지를 죽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현재 대통령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 저는 그 분들에게 큰 감정없어요. 할아버지도 입장이 있고, 그 분들도 나름대로 입장이 있다고 봐요. 그저 바람은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이죠. 간첩 타이틀을 떼고 역사에 남게해주길 바래요.
□ 간첩이 아닌 명예회복은 어떤 의미인가.
■ 밀사가 될 수도 있죠. 그냥 찾아온 것 아닌가요? 재심을 해서 죄가 없다라고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하신 일이 없잖아요. 간첩활동하신 것도 없고. 그런 면에서 무죄판결을 다시 내려주시든가 밀사가 되어주시든가. 역사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중국취재1] 북중관계 이상설은 사실무근

[중국취재1] 북중관계 이상설은 사실무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10/30 [21: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새로 건설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양촌의 고속철도역 안의 부채춤, 시진핑 주석이 최근 연변을 방문하여 조선족의 특색을 잘 살리는 자치주를 건설하고 있다며 자치주의 모범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고속철역사에서도 이런 공연 봉사를 해주어 여행객들의 뜨거운 박수와 스마트폰 후렛쉬 세례를 받았다.     © 자주시보

▲ 북중 교류 거점 연변고속철도역, 연변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 자주시보


북중관계 이상설은 사실무근

올 내내 남측 제도권언론에서는 북중관계 이상 기류에 대한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때마침 연례적인 기념식에 양측 정상들의 축하문이 오가지 않는 경우가 있었고 또 소개되는 순서가 밀리기도 해서 진보적인 정세분석가들 속에서도 북중관계 이상기류가 언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난 10월 6일부터 24일까지 종합한 본지 현지취재반의 결론에 따르면 “북중관계 이상 무”였다.
일단 북중경제교류협력 사업이 변함없이 계속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 최후택 교수 등 연변대 국제관계교수들의 설명이었다.
중국의 전문가들은 새로 건설하고 있는 압록강 다리를 더 빨리 개통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중국 쪽에서는 공사를 다 끝냈는데 북측에서 담당한 부분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렇다는 등 그 구체적인 이유까지 들어가며 설명해주었다.
물론 북 탈영병 사건도 올해 생겼고, 장성택 파문의 여파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개인적 사건이 국가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말도 나왔다.

중국 기업가들의 대북투자관심도 매우 높았다. 많은 중국 기업가들이 북에 대한 투자거리를 모색하기 위해 끊임없이 북을 방문하고 있으며 실제 북과 합작사업을 벌여 성공하는 경우도 많았다.
두만강 인근에 봉제공장 등을 세워놓고 북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만든 의류나 완구류 제품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는 사업들은 다들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고용하는 북의 노동자 임금은 개성 공단의 3배쯤은 되었다. 그 제한선도 북 정부에서 정해놓고 있다고 한다. 달리 말해서 북은 중국기업들과 교류하면 개성공단에서보다 3배나 더 외화를 벌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기업들에게는 그래도 중국 현지인 임금보다 저렴해서 경쟁력이 높다고 한다.

기업가들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3성 지방정부도 북과 교류를 통해 경제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길림성의 경우 컴퓨터소프트웨어 사업을 향후 주력 사업으로 키워갈 계획을 세우고 기업가들이 북의 우수한 컴퓨터인재들을 영입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해주고 있었다.
조선족 출신 모 컴퓨터게임제작회사 사장은 북에서 새로 10명의 젊은 기술자를 영입 중국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데 실력이 대단해서 새로 50명을 더 신청한 상태라고 했다.
이런 기술자들은 숙식을 제공하고 월급 6000위안을 최소한 보장해야 한다고 북에서 제한선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하면 숙식제공하고 약 90만원의 월급을 주고 최고의 컴퓨터 전문가를 고용한 셈이니 꽤 경쟁력이 높은 거래인 셈이다.

북과 중국의 정치적 관계가 악화되었다면 이런 경제교류가 추진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확대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향후 전망

이번 북의 당창건 70돌 기념행사에 중국 류윈산 상무위원이 축하 사절단으로 참가할 때 시진핑 주석의 각 분야 두뇌 50여명도 함께 갔었다고 한다. 그들은 2박 3일간 북의 분야 대표들과 북중교류협력을 확대해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했으면 많은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류윈산 상무위원이 서열 5위 운운하는데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있어서 서열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중국 정치전문가들의 견해였다. 신진핑 주석의 친서를 가지고 갔으면 사실상 서열 2위의 의미 즉, 시진핑 주석을 대신하여 간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가 그 많은 두뇌들을 데리고 북에 들어가 많은 합의를 이루었다고 하니 앞으로 북중관계는 더 발전해갈 수도 있다고 본다. 아마 이정도 규모의 사절단이 갔다면 북중정상회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도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지금까지 북미 중재자의 역할을 해온 중국이라 미국과도 보조를 함께 할 측면이 있을 것이기에 당장 북중교류협력 사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중국도 북과 내놓고 본격적인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시기가 오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북과의 관계가 신통치 않았었다. 6자회담에서는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입장 표명이 없었고 유엔대북제재결의안에 손이나 번쩍 들어주는 미국의 거수기 역할만 했었다.
그래서 국제정세분석가들 속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왜 6자회담에 참여하는지 모르겠다. 아예 빼고 하자는 비아냥이 터져나오기도 했었다. 

그랬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전면적인 봉쇄를 당하게 되자 내놓고 북과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핵문제 등에 있어서 거의 북과 똑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최근엔 오히려 북보다 먼저 나서서 미국이 대북 핵 정책을 비난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대대적인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해왔다. 북의 기반시설인 항만, 철도, 도로 개건 사업뿐만 아니라 북의 쌀농사를 아무르강 유역의 땅에서 지을 수 있게 하기도 하고 밀가루 등 식량 지원도 대대적으로 진행해오고 있으며 북의 자원개발까지 러시아 기업들이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러시아처럼 내놓고 북과 폭발적인 교류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꾸준히 확대해오고 있는데 중국도 때가 되면 폭발적으로 나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중국의 동북3이나 러시아가 교류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다. 싫든 좋든 북과 교류를 통해서만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화성14호와 북중러관계

당창건 70돌 기념열병식 맨 마지막에 나온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4호는 분명히 중국의 둥펑41D나 러시아의 야르스24M과 같은 최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보다도 더 무서운 위력을 가진 미사일이었다.

그것은 똑같은 8축16륜차량에 실린 미사일임에도 길이가 거의 중국의 둥펑41D의 2/3수준으로 짧은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같은 사거리를 날아가는데 길이가 짧다면 더 무서운 미사일이다. 그만큼 숨어 이동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생존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발사해버리면 사실상 요격이 어렵기 때문에 쏘려고 준비를 할 때 지상에서 파괴해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에서도 이 원점타격, 발사징후 즉각 타격을 최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북의 화성14호 대륙간토미사일은 중국, 러시아의 최신형보다 더 위력적인 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탄두부 하부와 이마 부위에 여러 개의 보조로켓이 탄두 뚜껑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뚜껑이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방향제어, 자세제어를 통해 미국의 요격망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형태는 아직까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도 공개한 바 없다.

이는 중대한 변화이다. 북에서 열병식에 공개한 무기들은 위력적이긴 했지만 항상 러시아나 중국의 최첨단무기보다는 한 급 낮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동급의 8관 방사포에서 나아가 러시아나 중국보다 더 위력적인 화성14호를 만천하에 다 보라고 공개한 것이다.

물론 이 화성14호가 실제 날아가면서 어떤 기동을 하는지는 북에서도 영상으로 공개한 바 없기에 미국에서는 일언지하에 폄하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이 화성14호에 대해 미 정부의 공식 반응은 “할 말 없다.”는 것이었다. 외양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북은 지금까지 검증이 되지 않은 무기를 열병식에 소개한 적이 없다. 소위 말하는 무수단 미사일도 잠수함발사용으로 개조하여 백두산-1호란 이름을 붙여 올해 잠수함에서 쏘았는데 단방에 성공하였다.
차량이동용 중단거리 미사일, 일명 스커드 미사일은 올해 예멘에서도 사용되어 사우디 공군기지 등을 타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SBS보도도 나왔다.
차량이동용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장면은 아직 북에서 공개하지 않았지만 은하3호를 통해 그 기술력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하기에 열병식에 등장한 화성14호도 이미 많은 발사시험을 거쳐 완성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북은 실전용 무기에 비해 한참 급이 떨어지는 무기를 열병식에서 공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본다.

중국도 러시아도 북과 군사기술협력이 절실한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와의 교류에는 이런 북러군사기술교류가 작용하고 있음을 북은 은근히 언론보도를 통해 암시해왔었다.
2000년 푸틴 대통령의 평양방문 배경을 다룬 ‘푸틴의 탄복’이란 기사, 현재 러시아 최첨단무기기술의 70%는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며 이 국산화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푸틴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양발 기사 등이 그것이다.

그런 러시아도 올해 미국과 갈등이 심해졌을 때 미국 우주로켓엔진의 핵심부품이 모두 러시아산이라며 미국을 비난한 적이 있었는데 왜 미국이 사거리가 짧은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이나 덩치 큰 지상발사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면서도 차량이동용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만들지 못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갔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과 갈등이 커지거나 인도와 북의 관계가 강화되는 움직임이 인다면 중국과 북의 관계도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비약을 이룰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북이 미국과 오랜 기간 대결전을 펴 오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과학기술 하나만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성공했다면 한반도정세와 세계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할 것이다.

우리 정부와 정보당국에서도 하루 빨리 화성14호에 대한 진상을 밝혀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북은 전국이 지금 대형 건설장으로 뒤덮여 있다. 나진 홍수 피해 복구 공사, 백두산청년발전소, 과학자거리, 과학기술전당만 해도 얼마나 큰 공사인가. 수없이 많은 대형건설공사를 동시에 저렇게 빨리 추진하는 것을 볼 때만 어디서 저 많은 건설자재들과 그 내부 설비들까지 최고급으로 가져다가 꾸려놓을 수 있는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다. 과학기술전당의 열람용 컴퓨터만 해도 얼마나 많겠는가. 엄청난 돈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다가 김정은 제1위원장은  당창건 70돌을 기념하여 전 국민에게 100% 상여금까지 지급했었다.

미국이 아무리 봉쇄를 해도 뭔가 평양으로 거대한 돈 폭포가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북이 무엇을 팔아서 그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다보면 화성14호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70-80년대 북이 기념비적 건축물을 많이 짓고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데는 사회주의 교역시장이 살아 있어 동유럽 등에 트랙터 등을 수많이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번영 뒤에 무슨 수출이 있을까. 개성공단의 달러로 그게 과연 가능할까?

결국은 남과 북의 교류협력 사업에 마치 주도권은 남측이 쥐고 있기에 급하면 북이 결국 숙이고 나올 것이라는 우리정부기관과 제도권학자들의 주장은 전면 재검토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남북경협을 통해 남측 경제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길도 영영 다른 나라에 먼저 선점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정화는 교육부의 자기부정"... 31일 청계광장에서 공동행동 한다

4만 2천 대학생, 국정화 반대선언 '역대 최다'

15.10.30 16:54l최종 업데이트 15.10.30 16:55l




기사 관련 사진
▲ 대학생들이 만든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 탑'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셜센터 앞에서 대학생 단체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에서 '국정화 교과서 철회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 이희훈

기사 관련 사진
▲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셜센터 앞에서 대학생 단체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대학생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대학생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전국 36개 총학생회가 참여했고 학생회 연합 4개, 단과대학/과/동아리/소모임 550개, 대학생 단체 7개 등이 참여했다. 대학생 대표자 선언의 규모로는 역대 최다로 추정된다.

대학생들은 공동선언문에서 "정부가 검정하여 교육과정에 투입되어온 교과서와 집필진을 '이념 편향적'이라며 왜곡하고 매도하는 행위는 교육부의 지난 행정과 그 가치를 부인하는 처사"라며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부정한다면, 이를 통과시킨 교육부는 검인정제 도입 이래 지난 6년 동안 제대로 행정을 해온 것이냐"고 반문했다.

대학생들은 이어 "역사는 해석이나 정리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가 달라진다"며 "정부가 말하는 '국민통합을 위한 교과서'는 해당 정권의 의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기사 관련 사진
▲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셜센터 앞에서 대학생 단체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기사 관련 사진
▲ "민주주의 퇴보!! 국정교과서 중단하라"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셜센터 앞에서 대학생 단체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기사 관련 사진
▲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셜센터 앞에서 대학생 단체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대학생들은 "후대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세대로서 기성 정치권이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을 훼손하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현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철회시키고 정부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전국 대학생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하루 전인 지난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학교 방문에 항의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이화여대의 손솔 총학생회장도 이 자리에 참석, "과거 박정희와 싸웠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이 박정희의 딸과 싸우게 될 줄 알았겠느냐"며 더 가열찬 국정화 반대 투쟁을 다짐했다.
기사 관련 사진
▲ '황우여 국정교과서 철회결정?!'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셜센터 앞에서 대학생 단체 대표자 595명을 포함한 4만2234명의 대학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기자회견에서 사용된 황우여 교육부장관 가면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 이희훈

그는 또 "어제의 투쟁은 이화여대라는 한 대학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의 초, 중, 고, 대학교에서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박근혜 정부가 이제까지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탄압으로 일관했으나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은 31일 오후 2시 권역별로 대학로 마로니에광장, 이대 대현문화공원, 전쟁기념관에 모여 집필거부 교수들의 발언, 대자보 쓰기, 대표발언 등의 사전행사를 가진 뒤, 행진을 벌여 오후 6시 광화문 청계광장에 도착해 국정교과서저지네트워크 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한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이재명 시장 “엄청난 권력, 세월호 진실 접근 차단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과 간담회 가져.. “진실 은폐하는 자들이 사건의 범인”
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신고하기
승인 2015.10.30  15:24:43
수정 2015.10.30  15:30:34
트위터페이스북네이버구글msn
  
▲ <사진제공=성남시청>
이재명 성남시장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 “진실을 은폐하는 자들이 바로 이 사건의 범인”이라면서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시장은 30일 ‘아이들의 방’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성남시청 2층 시민갤러리 ‘공감’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간담회를 갖고 “아직도 진실은 묻혀있다. 누군가는 진실을 은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이재명 시장은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엄청난 권력이 진실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며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국민들의 힘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가족들, 이웃들, 올바른 세상을 원하는 국민 모두가 힘을 합쳐서 총력을 다해 싸워야 비로소 그 진실에 접근할 것”이라며 “그 진실에 입각해 엄중한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합당한 방지대책을 세우는 것, 이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 <사진제공=성남시청>
이날 간담회에는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영만(6반), 예진(3반), 재욱(8반), 성호(5반) 학생의 어머니들과 성남시민 30여 명이 함께 했다.
재욱엄마 황영미씨는 “지금까지 아이가 타고 갔던 그 배에 들어가 볼 수 없었다”면서 “성남시청에서 오늘 그 배 안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해줬는데, 그게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황씨는 “세월호의 침몰은 대한민국의 침몰이자 대한민국 양심의 침몰”이라며 “특별법 시행을 제정한 지 1년이 되었는데 특조위는 활동을 시작도 못하고 있다. 세월호가 인양되는 과정이 대한민국의 양심을 인양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성남시청 2층 갤러리 ‘공감’에서는 지난 27일부터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인 ‘아이들의 방’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는 11월1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