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팟인터뷰] '형제복지원' 배경 공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본 피해생존자 한종선씨
"오늘 법무부는, 국가 상소를 일괄 취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나 나올 법한 문장이 대학로 한 공연의 대사로 등장했다. 관객들이 박수를 쳐주자 대사를 친 배우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연기를 이어갔다. "집도 가족도 있었던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납치해서 가뒀던 거죠." 형제복지원 사건을 따라가며 배우들이 만든 공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한창이던 지난 5일, 법무부는 마침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에 대한 상소를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연의 줄거리를 이룬 건 형제복지원 사건의 기록뿐 아니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한종선(49)씨의 이야기였다. 한씨는 상소 취하 결정 이틀 뒤인 7일 공연을 보러 누나 한신예(52)씨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앞서 2012년 국회 앞 1인 시위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린 그가 그때부터 제작한 형제복지원 모형이 이번 공연의 주요 소품으로 쓰였다.
한씨에겐 지금부터가 진상규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는 정부의 상소 취하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수용 기간 1년당 8000만 원'이라는 현재 국가배상 기준이 "정확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형제복지원에 감금된 시간만으로 산정된 배상액이 피해생존자 삶 전반에 걸친 고통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배상 1심에서 승소한 한씨는 이러한 이유로 현재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형제복지원에서 감금당한 것, 폭력당한 것, 강제 노역한 것, 배워야 할 시기에 배우지 못하고 사회에 나와 일자리를 구하는 데조차 차별받은 것, 이런 것들에 대한 피해배상을 명확히 해야죠. 국가는 감금에 대한 피해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니까 억울하고 황망하죠."
피해생존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대통령의 사과다. 한씨가 생각하는 사과의 형태는 구체적이었다. 그는 "말로만 하는 약속은 사과가 아니다"라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피해당사자들을 직접 초청해 사과하고, 요구 사항을 들어보고, 그걸 이행하는 추진력을 보여줘야 한다. 과거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도 현 대통령이 안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씨의 요구 사항엔 형제복지원 추모 공간과 트라우마 치유 센터 설치 등 후속 조치도 포함돼 있었다.
"150살까지 살고 싶다" 이유 물으니
지난 7일 저녁 공연을 앞두고 대학로 인근 카페에서 한씨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 연극 제작엔 어떻게 함께하게 됐나요?
"우연찮게 만났죠. 3년 전 공연 팀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아보고 싶다면서 피해자종합지원센터(부산 동구 초량동)를 찾아왔어요. 그분들이 저보고 '그것이 알고 싶다'랑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나온 사람 아니냐면서 먼저 알아본 거죠. 연극을 만들겠다고 해서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3년 끝에 이분들이 결국 만들어 낸 거죠."
- 어떤 마음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형제복지원 사건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피해당사자를 만난다고 하면 불편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연극으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경각심을 갖고, 사실관계를 따져보고, 더 많은 걸 알게 되고, 그러면서 어떤 진상이 드러난다고 봐요. 일반 시민들한테 이 사건을 제대로 알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 공연 기간(7월 31일~8월 8일)에 정부가 형제복지원 국가배상 상소를 취하하기로 했는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이제는 국가 상소로 스트레스를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건·사고로 죽는 사람이 발생하지 않게끔 만들어 준 건 긍정적으로 봐요. 그런데 지금 피해배상 기준이 제대로 된 기준이라고 할 순 없어요."
- 제대로 된 기준이라면요?
"지금처럼 감금을 기준(수용 기간 1년당 8000만 원)으로 국가가 상소를 포기하는 건 제대로 된 피해배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형제복지원에서 감금 당한 것, 폭력 당한 것, 강제 노역한 것, 배워야 할 시기에 배우지 못하고 사회에 나와 일자리를 구하는 데조차 차별 받은 것, 이런 것들에 대한 피해배상을 명확히 해야 해요. 평범함을 다 빼앗긴 삶을 살아왔는데, 국가는 감금에 대한 피해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니까 억울하고 황망하죠."
- 대표님의 국가배상(1심 승소) 상소도 정부가 곧 취하하겠네요.
"감금 기준만으로 취하하겠죠. 1984년 형제복지원에 같이 들어간 우리 누나는 사회에 나와서도 30여 년을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는데 재판부는 이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형제복지원에서 밥 먹으러 갈 때마다 누나가 나한테 뛰어와서 '종선아 집에 가자'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체 생활에서 이탈한 누나를 잡아다가 두들겨 패고 약 먹이고 그러면서 누나가 정신 이상이 된 거예요. 이 부분을 내가 책이든 증언이든 어떻게든 해서 여론을 만들었는데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아요. 형제복지원 모형을 만들어서 증거자료로 제출해도 별 효과가 없어요. 누나에게 생긴 병을 입증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거죠."
- 상소 취하 이후 또 어떤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피해당사자들을 직접 초청해서 사과하고, 우리의 요구 사항을 들어보고, 대통령으로서 해줄 수 있는 약속을 하고, 그걸 이행하는 추진력을 보여줘야죠. 물론 형제복지원은 이 대통령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에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왕족 국가가 아니잖아요. 과거의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도 현 대통령이 안아야 하는 거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게 맞죠.
그리고 피해당사자 중엔 조사조차 받지 못한 사망자들이 있죠. 형제복지원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고요.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죠. 국가는 그런 걸 지원해야 하는 거예요."
- 연극에 사용된 형제복지원 모형을 설명해 주신다면요.
"27소대(1층)·28소대(2층) 건물이에요. 내가 있었던 곳은 24소대랑 27소대인데, 가장 악랄했던 곳이 27소대였기 때문에 그곳의 기억을 전시해 놓은 거죠. 내부 풍경을 보여주려고 27소대를 1층에서 2층으로 올려놨어요. 아침에 기상하고 점호를 받고 식당에 가기 전 상황이에요. 식당에 갈 땐 4열 종대로 열을 맞춰서 운동장에서 구보를 열 바퀴 정도 돌고, 식당 앞에 줄을 맞춰 서서 조장의 지시대로 한 줄씩 한 줄씩 들어갔죠. 왼쪽 가장 앞이 나예요."
형제복지원에 들어간 그때 한종선의 나이가 9살이었다. 12살에 형제복지원을 나오고 30여 년이 더 흘러 그는 50살(만 49살)이 됐다. "앞으로 150살까지 사는 게 목표"라는 한종선에게 "왜 150살이에요?" 이유를 물으니 그가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며 말했다.
"50년 동안 너무 억울하게 살았잖아. 너무 열받게 살아왔자네. 50년은 버린 인생이라고 하면 지금부터 0살로 해서 앞으로 누나랑 100년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죠. 그게 내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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