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돌이켜본 2023 국제이슈... 글로벌 위기가 로컬의 위기
23.12.29 15:52ㅣ최종 업데이트 23.12.29 15:52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의 인도주의적 지원 확대를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 채택이 20일(현지시간) 연기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가 텅 비어 있다. 안보리는 이날 중동 상황을 의제로 회의를 열었으나 결의안 초안 문구를 둘러싼 이사국 간 이견으로 표결을 연기했다. ⓒ 연합뉴스
미국이 세계 경찰 노릇을 하던 시절에는 문명 간 충돌 수준의 전쟁, 그것도 두 곳에서나 벌어지는 전쟁은 있지도 않았고, 있어도 제어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미국은 그에 대비하는 안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차대전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지속되어 온 것도 미국의 막강한 억제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미국이 리더의 역할에서 중재자 역할로 자리 이동을 한 이후의 세계 지정학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예견과 가설들이 있었고 우리는 지난 한 해 그중 한 예를 경험했다. 전쟁에 노출된 당사자들에게 잔인하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 세계는 평화 억제력이 사라진 세계가 빠질 수 있는 아노미의 현실을 경험했다.
다극화 시대, 다자외교 시대를 부르짖었지만 그런 세계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기후위기가 한층 더 위협으로 다가왔지만 그동안의 대비책은 실현 불가능했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2023년은 그렇게 또 한 번 우리에게 경고를 준 한 해였다. 그것도 수십 년 이래 가장 센 버전으로.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는 것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들과 진행 중인 위기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지표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올해 말 불행히도 우리는 뿌듯함을 가지고 성과들을 돌이켜 볼 자격은 얻지 못한 것 같다. 자성과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제이슈에서도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글로벌 위기가 로컬의 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월 1일]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취임
▲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수도 브라질리아의 플라날토궁에서 열린 장관급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보우소나루 시대를 뒤로한 브라질이 다시 룰라의 시대를 맞았다. 과거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재임 중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은 브라질의 고질적인 빈곤, 불평등, 국가부채 등 문제를 현저하게 개선, 해결하면서도 브라질을 세계 경제 8위까지 올려놓았다.
퇴임 당시 지지율 87%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기득권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그의 계승자는 물론 룰라 대통령 본인까지 부패세력으로 내몬 기득권 세력은 기어이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시대를 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리더십은 추락했고 국가 신용도는 하락했다.
올해 룰라의 재등장으로 브라질은 그레이트 어게인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극단을 오가는 정치지형 변화에 국가와 국민은 분열됐고 그에 대한 치유는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 한 여론조사는 룰라 vs. 보우소나루 대결 구도가 전혀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두 후보에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92%(룰라 지지), 93%(보우소나루 지지)가 투표 후 지지 의사를 바꿀 의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보다 진영 대립이 정치의 얼굴이 된 우리 시대에 브라질의 분열상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증오의 정치, 한풀이의 정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11월 30일~ 12월 13일]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 11월 30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 행사장에 참가국들의 국기가 세워져 있다. ⓒ 연합뉴스
올해 초부터 아프리카의 동남부 국가들은 전례 없는 열대성 폭우와 홍수로 큰 인명, 재산 피해를 입었다. 5월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만 400명 이상이 폭우로 사망했다. 유럽은 기후변화로 인한 기온 상승 폭이 가장 큰 대륙이 됐다. 1800년 이후 지난해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이 1.2도 상승했는데 같은 시기 유럽의 상승 폭은 2.3도에 달했다.
지구의 연평균 기온 기록은 매년 경신되고 있고 올해가 가장 더운 해였지만 내년은 올해보다 더 더워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온 상승의 가속 폭도 점점 커져서 유럽의 경우 1800년 이후 기온 상승 폭의 65%가 최근 30년에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11월 30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는 기후변화에 대해 인류가 보여준 30여 년의 대응이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확인한 자리였다.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은 여전히 높고, 석유산업을 주도하는 기업과 국가들의 정치적 힘과 로비 능력은 압도적이다.
그나마 몇몇 희망의 빛을 본 것은 올해의 성과였다. 독일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전기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재생에너지에서 얻는 결과를 얻었다. 국내 총전력사용량 5173억 kWh 중 재생에너지 비중이 52%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재생에너지 사용의 증가폭이 점점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다. 독일의 성과는 재생에너지의 효율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긍정적으로 바꿨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0월 7일~현재]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 지난 14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화염이 치솟고 있다. 이스라엘은 미국 등 국제사회의 휴전 압박에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제거를 목표로 지상전을 이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중동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이 결국 폭발했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4차례의 중동전쟁에서도 올해 가자지구만큼 정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 원인 제공이 하마스에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패륜적 살상이 또 다른 불특정인을 향한 패륜으로 이어지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뿐이다.
더구나 피가 피를 부르는 순환적 복수의 원천적 원인 제공이 어디인지 찾는다면 이스라엘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마스 세력을 키운 책임이 이스라엘에도 있다는 자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나온다. 20세기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에서 평화와 공존의 길이 몇 차례 있었음에도 번번이 판을 깬 것은 이스라엘 극우집단이었다.
가자지구 전쟁은 평화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유약한 살얼음 위에 놓여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10월 7일 하루 전까지도 중동은 데탕트의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앙숙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역사적 국교 정상화를 논하고 있었다. 이란-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도 정상화를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중동의 문제아 시리아는 아랍연맹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양지를 봐서는 안 된다. '중동의 봄' 이면에는 누구의 관심에서도 동떨어져 있던 팔레스타인이라는 음지가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온갖 불법을 저질러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탄압해도 국제사회는 중동의 봄 실현 가능성에만 주목했다. 그렇게 지구상에서 궤멸할 것이라는 공포에 떤 팔레스타인인들은 절망적 심정으로 하마스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저들은 지금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가자지구 학살을 보면서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응징의 화살은 앞뒤 좌우 없이 난사해도 되는 걸까. 국제사회가 정의와 평화를 원한다면 그 길은 응징과 보복에 있지 않을 것이다. 악의 근원적 원인을 찾지 못한다면 무력의 사용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현실적 평화 유지의 실현가능한 해법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살고 있다. 2023년은 그 시대의 절망적 단면을 보여준 한 해였다.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1년을 분절할 줄 아는 지혜는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내년은 증오보다 이해, 착취보다 보존, 전쟁보다 화해가 한발 앞서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것이 다극화 시대의 어쩌면 유일한 생존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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