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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2일 금요일

결국 문제는 불평등

 

[나원준의 경제비평] 결국 문제는 불평등

침강하는 한국경제, 이륙의 조건을 묻다 ⑦


영국의 새로운 중간 계층 사람들이 일군 산업혁명은 생산력의 놀라운 진전을 가져왔다. 그것은 새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초래된 사회 변화는 진보라고 부르기에는 무척이나 제한된 것이었다. 중세적 신분 질서는 허물어졌다. 돈 버는 길은 넓어졌다. 그러나 수직적 질서 자체가 전복된 것은 아니었다. 중세가 떠난 빈자리는 변모된 소유 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위계로 채워졌다.


자본가들에게 사회 진보의 비전은 협소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가난한 하층민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함께 하는 진보가 아니었다. 부자가 아니면 경제성장의 은혜를 입을 수 없었다. 당대 신분 이동을 가능케 했던 사다리는 밑바닥 사람들한테는 닫혀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들에게는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1834년 시행된 가혹한 ‘신빈민구제법’에 대한 항의와 당시 런던 뒷골목 하층민의 삶을 날카롭고 생생하게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영화화한 장면. ⓒ자료사진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들의 처지

산업혁명은 근대적인 노동자계급을 고통 속에 잉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경쟁자보다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높았던 덕에 기술 변화가 빨랐지만 향상된 노동생산성이 다시 임금 상승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임금은 생계를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보통 노동자 가구의 생활수준은 중세 농노의 그것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평균 노동시간은 18세기 중반만 해도 주당 55시간이 안 됐다. 하지만 19세기 초로 접어들면 주당 60시간으로 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주당 65시간마저 넘어섰다. 그런데 노동시간은 길어졌어도 노동자 가구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숙련 노동자들은 19세기 초까지는 임금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자동화가 더 진전되자 숙련의 가치도 근력의 가치도 희미해져갔다. 영국의 공장은 점점 더 많은 아동으로 채워졌다. 아이들은 네 살부터 탄광에서 일을 도왔고 여섯 살이 되면 모직 공장에 취업했다. 모직 공장은 노동자 절반이 아동이었다. 그들은 처참한 노동조건에서 숙련이 필요 없는 단순하면서 가혹한 공정을 수행했다. 군대 조직을 본뜬 공장 노동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동자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부과했다. 감시가 강화된 억압적인 공장 체계에서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 대한 자기주도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산업재해도 빈발했다. 노동조합도 단체교섭도 없던 산업혁명 초기의 공장 풍경은 을씨년스러운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중 보건 상의 재앙이 사정을 악화시켰다. 노동자들의 기대수명은 단축되었다. 하수도 같은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콜레라나 결핵 등 전염병이 창궐했다. 환경오염은 통제 불능이었다. 런던의 스모그는 특히 치명적이었다.

구빈법과 ‘시럽급여’

그러나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빈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1601년 제정되었던 구빈법은 미약한 지원 수준과 광범위한 사각지대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도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구빈법마저 더욱 개악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복지혜택을 더 줄이고 문턱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하기야 2023년 한국 부자들도 ‘시럽급여’라는 신조어까지 창조해 수급자들을 실컷 비아냥댔으니, 돈 많고 높으신 양반들이 세금 좀 덜 내겠다고 가난한 사람들 사지로 내모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게 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이 미약해서 벌어진 일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당시의 사회 변화는 산업혁명을 낳은 기술 변화의 필연적인 귀결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모습의 현실이 그 시절에 가능했을까. 경제학자 대런 아세모글루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산업혁명의 주도층이 혁신과 기술 변화의 방향을 노동에 적대적인 쪽으로 선택했다는 혐의를 제기한다. 그와는 다른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당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한없이 비참하게 몰아가지 않는 다른 방향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려고 했을까. 설령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과연 그것이 민중의 저항과 압력 없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노동이 배제된 혁신과 일자리 영향

노동을 배제하는 혁신은 노동자들에게서 안정적인 소득과 일자리의 기회를 앗아가고 임금이 노동생산성만큼 오르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아세모글루는 일자리를 줄이는 혁신은 노동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혁신은 노동에 대해 친화적이라고 애써 구분한다. 다만 현실에서 그 둘을 구별해낼 방법은 사실 없다. 자동화로 일자리가 줄면서 동시에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는 탓이다.

보수적인 주류경제학자들은 자동화가 단기적으로는 일자리를 줄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생산성 향상 덕에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동화를 방해하는 ‘로봇세’ 도입 노력에도 한사코 반대한다. 그들의 믿음은 개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실증 연구에 의해 강고해졌다. 자동화 수준이 높은 기업일수록 제품 경쟁력이 개선되어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자동화 수준이 낮은 기업보다 일자리를 더 많이 제공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그 논리가 개별 기업을 벗어나 경제 전체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자동화가 구매력을 갖춘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특정 기업이 시장 점유를 늘리는 만큼 다른 기업은 시장 점유가 줄어드는 때문이다. 더욱이 사라지는 일자리보다 새로 만들어진다는 일자리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낫다고 어떻게 낙관하겠는가. 일찍이 칼 마르크스나 존 메이너드 케인스 같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기술적 실업’(기술 변화에 따른 실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이 그저 쓸데없는 걱정이었겠는가.

서울 마포구 서부고용복지센터에서 구직자들이 실업급여 수령 상담을 받고 있다. 2021.7.11. ⓒ뉴스1

결국 문제는 불평등

핵심은 기술 변화의 효과로 경제 전반에 걸쳐 새로운 구매력 있는 수요가 얼마나 창출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일자리의 질까지는 몰라도 일자리의 양적 회복 수준은 결정짓는 때문이다. 그런데 수요란 것은 경제 내에 소득과 부가 분배된 상태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분배가 어떨 때 수요가 충분히 늘어나 고용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득과 부가 소수에 집중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될수록 경제의 수요 창출 여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까닭은 가난한 사람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가진 돈 거의 전부를 소비하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아서다. 분배가 평등해져 가난한 사람들의 구매력이 개선될수록 소비 총량이 늘고, 그래서 경제 전체의 수요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래한 서방 세계의 ‘황금기’ 자본주의 기간(1945년부터 1975년까지의 이른바 ‘영광의 30년’)에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반면에 경제가 심각하게 양극화되어 있다면 수요 창출 여력은 충분할 수 없다. 양극화된 경제에서는 기술 변화가 일자리의 양에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이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셈이다.

결론적으로 혁신이 노동자계급에게 적대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득과 부의 평등한 분배가 전제되어야 한다. 분배가 불평등하면 혁신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어렵지만 혁신 과정에서 끊임없이 노동이 배제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되기 쉽다. 반대로 분배가 평등하면 혁신이 더 많이 자극되고 혁신의 성과로부터 노동이 배제되는 위험도 덜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불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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