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차가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따뜻한 선물로 시작하자
인간은 왜 선물을 주고받는가? 이에 대한 경제학의 궁금증도 오래 이어져왔다. 이 질문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대답은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간단하다. 선물을 주는 이유는 선물 사는 데 드는 돈(비용)에 비해 그로 인해 받을 만족도(효용)가 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을 줬을 때의 비용에 비해 그로 인해 연인으로부터 받을 감사와 애정이라는 효용이 더 클 때 선물을 한다. 만약 기대효용이 시원치 않으면 선물에 드는 비용도 줄일 수밖에 없다.
대가성이 있는 선물도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진심이 담겨있지 않는 접대성 선물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접대성 선물은 그를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더 큰 무언가를 뜯어내려는 밑밥이라는 이야기다. 이 주장을 펼친 사람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인데, 이 사람도 나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사실은 현금이 최고?
그런데 이런 주류 경제학의 관점으로 보면 선물에는 매우 모순된 지점이 존재한다. 내가 남에게 선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들인 비용에 비해 뭔가 얻을 게 더 크다는 기대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비용으로 상대의 기분을 최고로 좋게 만드는 것이 선물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다.
하지만 물품으로 전달되는 형태의 선물은 대부분 쓴 돈에 비해 상대를 최고의 만족까지 잘 이끌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내가 10만 원짜리 선물을 준비했다면, 상대가 받는 행복감은 10만 원 이상이어야 기대 효과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미국 와튼스쿨 경제학과 교수 조엘 왈드포겔이 예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했을 때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대부분의 학생들은 받은 선물의 가치를 시장가치보다 10~33% 정도 낮게 측정했다.
예를 들어 내가 100달러짜리 선물을 했다면 상대방이 그 선물에서 느끼는 만족도가 67~90달러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뭔 멍청한 짓인가? 100달러를 쓰고도 67달러밖에 생색을 못 낸다니!
우리도 그런 경험 있지 않나? 정작 선물을 받았는데 쓸 일이 하나도 없는 물건이라거나, 디자인이나 색상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이런 경험 말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상품권인데, 이 역시 돈값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1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샀는데, 정작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백화점을 잘 들르지 않는다면? 이러면 당연히 선물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주류 경제학적 해법을 찾자면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냥 돈으로 선물을 대신 하는 것이다. 어떤 선물을 사더라도 100달러로 100달러 이상 효과를 내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자, 경제학의 정답은 정해졌다. 우리 힘들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느라 애쓰지 말고 그냥 현찰 박치기로 끝내자. 나는 연인에게 10만 원짜리 선물을 하려고 했고, 연인은 나에게 5만 원짜리 선물을 하려고 했다면? 이때는 피차 미리 연락해 더하기빼기 한 다음 내가 연인에게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 주는 것으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끝내면 되겠다.
인간은 그렇게 차갑지 않다
이까지 읽으신 소감이 어떤가? 실로 삭막한 헛소리들 아닌가? 나는 주고받는 선물 속에 적지 않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주고받는 이익의 등가물만이 선물의 온전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헛소리다. 주류 경제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세상은 그렇게 차갑기만 한 것도 아니다.
경제학에는 놀랍게도 선물 경제학(gift economy)이라는 분야가 있다. 실제 특히 진화인류학의 관점에서 경제학을 바라보는 이들이 이 이론을 많이 지지한다.
선물 경제학은 인류 경제의 역사가 ‘반드시 내가 준만큼 받아낸다’는 이기적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오히려 그에 비해 아무 대가 없이 상대를 돕고 지원하는 선물(gift)이 경제의 뿌리였다는 주장이다.
생각해보라. 고대 원시사회에서 돼지 뒷다리를 가져가면 꽁치 세 마리를 내어주는 이 거래가 과연 시장의 원리를 통해 이뤄졌겠나? 돼지 뒷다리의 가치가 꽁치 세 마리인지, 네 마리인지는 누가 어떻게 알았겠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게 수요와 공급에 의해 다 결정된다고 억지를 피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반가운 부족이 오면 돼지 뒷다리를 선물로 대접하고, 나중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꽁치 세 마리를 다시 선물하며 인류가 발전해왔다는 주장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인다.
나는 시장이 정한 등가교환이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는 사랑의 마음이 인류를 훨씬 더 아름답게 진화시키리라 확신하는 사람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현금 박치기를 하는 광경보다 정성이 담긴 작은 포장의 선물을 직접 주고받는 게 더 바람직하다.
선물이 주도하는 경제는 시장경제보다 훨씬 아름답다. 등가교환은 주고받는 순간 거래가 끝나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은 이 세상의 빈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내가 어려운 사람에게 내민 연대의 손길은 나에게 돌아오는 대신 더 어려운 사람에게 새로운 연대의 파도로 이어져 간다.
‘선물 경제학의 옹호자’라 불리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자신의 저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 남긴 아름다운 말로 이 칼럼을 맺는다. 부디 이 성탄과 연말연시에 우리의 관대함과 따뜻한 연대의식이 차가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선물은 빈곳을 향해 움직인다. 원을 그리며 도는 선물은 가장 오래 빈손이었던 사람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다가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오래된 경로를 벗어나 그를 향해 움직인다. 우리는 관대함으로 인해 빈손이 되지만, 우리의 빈손은 다시 부드럽게 전체를 끌어당긴다. 움직이는 선물이 빈손을 채우러 돌아올 때까지, 이 사회는 진공상태를 싫어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미국 와튼스쿨 경제학과 교수 조엘 왈드포겔이 예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했을 때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대부분의 학생들은 받은 선물의 가치를 시장가치보다 10~33% 정도 낮게 측정했다.
예를 들어 내가 100달러짜리 선물을 했다면 상대방이 그 선물에서 느끼는 만족도가 67~90달러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뭔 멍청한 짓인가? 100달러를 쓰고도 67달러밖에 생색을 못 낸다니!
우리도 그런 경험 있지 않나? 정작 선물을 받았는데 쓸 일이 하나도 없는 물건이라거나, 디자인이나 색상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이런 경험 말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상품권인데, 이 역시 돈값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1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샀는데, 정작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백화점을 잘 들르지 않는다면? 이러면 당연히 선물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주류 경제학적 해법을 찾자면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냥 돈으로 선물을 대신 하는 것이다. 어떤 선물을 사더라도 100달러로 100달러 이상 효과를 내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자, 경제학의 정답은 정해졌다. 우리 힘들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느라 애쓰지 말고 그냥 현찰 박치기로 끝내자. 나는 연인에게 10만 원짜리 선물을 하려고 했고, 연인은 나에게 5만 원짜리 선물을 하려고 했다면? 이때는 피차 미리 연락해 더하기빼기 한 다음 내가 연인에게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 주는 것으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끝내면 되겠다.
인간은 그렇게 차갑지 않다
이까지 읽으신 소감이 어떤가? 실로 삭막한 헛소리들 아닌가? 나는 주고받는 선물 속에 적지 않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주고받는 이익의 등가물만이 선물의 온전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헛소리다. 주류 경제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세상은 그렇게 차갑기만 한 것도 아니다.
경제학에는 놀랍게도 선물 경제학(gift economy)이라는 분야가 있다. 실제 특히 진화인류학의 관점에서 경제학을 바라보는 이들이 이 이론을 많이 지지한다.
선물 경제학은 인류 경제의 역사가 ‘반드시 내가 준만큼 받아낸다’는 이기적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오히려 그에 비해 아무 대가 없이 상대를 돕고 지원하는 선물(gift)이 경제의 뿌리였다는 주장이다.
생각해보라. 고대 원시사회에서 돼지 뒷다리를 가져가면 꽁치 세 마리를 내어주는 이 거래가 과연 시장의 원리를 통해 이뤄졌겠나? 돼지 뒷다리의 가치가 꽁치 세 마리인지, 네 마리인지는 누가 어떻게 알았겠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게 수요와 공급에 의해 다 결정된다고 억지를 피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반가운 부족이 오면 돼지 뒷다리를 선물로 대접하고, 나중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꽁치 세 마리를 다시 선물하며 인류가 발전해왔다는 주장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인다.
나는 시장이 정한 등가교환이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는 사랑의 마음이 인류를 훨씬 더 아름답게 진화시키리라 확신하는 사람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현금 박치기를 하는 광경보다 정성이 담긴 작은 포장의 선물을 직접 주고받는 게 더 바람직하다.
선물이 주도하는 경제는 시장경제보다 훨씬 아름답다. 등가교환은 주고받는 순간 거래가 끝나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은 이 세상의 빈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내가 어려운 사람에게 내민 연대의 손길은 나에게 돌아오는 대신 더 어려운 사람에게 새로운 연대의 파도로 이어져 간다.
‘선물 경제학의 옹호자’라 불리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자신의 저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 남긴 아름다운 말로 이 칼럼을 맺는다. 부디 이 성탄과 연말연시에 우리의 관대함과 따뜻한 연대의식이 차가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선물은 빈곳을 향해 움직인다. 원을 그리며 도는 선물은 가장 오래 빈손이었던 사람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다가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오래된 경로를 벗어나 그를 향해 움직인다. 우리는 관대함으로 인해 빈손이 되지만, 우리의 빈손은 다시 부드럽게 전체를 끌어당긴다. 움직이는 선물이 빈손을 채우러 돌아올 때까지, 이 사회는 진공상태를 싫어한다.”
“ 이완배 기자 ” 응원하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