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튀르키예 대지진, 드러나는 정권의 무능과 부패
23.02.15 06:46최종 업데이트 23.02.15 06:46
이와 관련한 국민 인식도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2020년 4월 코로나19 창궐과 함께 실시된 총선을 앞두고 이뤄진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3.5%가 그에 대한 정부 대처에 관심있다고 답했다. 지역경제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있다는 답변은 86.4%로 나타났다(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면접조사).
재난이 당장 우리 삶에 미칠 영향보다 그에 대해 정부가 어떻게 대처할지에 더 관심이 모인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 인식이 4월 15일 총선 결과에 반영돼 나타났다. 이처럼 재난 시국에 정치권의 대응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무엇보다 크고 그만큼 정치권의 역할은 중요하다.
▲ 6일(현지시간) 강진 피해를 본 튀르키예에 규모 7.5에 달하는 여진이 또다시 발생했다고 유럽지중해지진센터(EMSC)가 밝혔다. EMSC에 따르면 지진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1시 24분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슈 북북동쪽 59㎞ 지점에서 발생했다. 진원의 깊이는 10㎞라고 EMSC는 분석했다. ⓒ 연합뉴스
지진으로 국가 이념이 바뀐 나라
지난 6일 발생한 대지진 이후 튀르키예에 조성된 국민 여론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재난 직후 한 현지 언론이 밝힌 것처럼 "국가가 재난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예방할 수는 있다." 자연재해에 해당하는 지진의 발생 책임을 정부에 물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조치는 준비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튀르키예가 자리잡고 있는 아나톨리아 지역의 지진 위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랍-아프리카 판과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곳에서 두 판(板, plate)의 충돌이 늘 발생하는 곳으로 대지진의 위험이 어느 곳보다 많은 곳이다.
1999년에도 아나톨리아 판 서북쪽의 이즈미트에서 큰 지진이 발생해 1만 7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의 지진으로 인명 피해뿐 아니라 튀르키예 국가 경제도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국민총생산(GDP) 3.4% 역성장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당시 튀르키예에서는 부실 공사가 문제가 됐고 정부는 건축에 내진 설계를 의무화하는 등 부랴부랴 뒤늦은 조치를 취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후 조사 결과 불법 건축, 기준미달 설계, 자재 횡령 등 수많은 건축 비리가 드러나 큰 규모의 소송과 처벌이 이뤄졌다.
하지만 국민이 바라는 것은 사후의 사법적 판단만이 아니었다. 사전에 큰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매뉴얼 구성과 감시 권력은 행정부에 부여돼 있으며 더 엄격하고 철저한 정부의 역할이 요구됐다. 뒤늦게 '지진세'라는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지만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러한 민심은 3년 후 있었던 총선에서 나타났다. 연정을 통해 내각을 이끌던 민주좌파당은 사회 혼란과 경제 수습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정권을 내려놓았을 뿐 아니라 136석의 제1당에서 단 한 석도 못 건지는 소수당으로 몰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때 정권을 장악한 것이 현재의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었다. 2002년 총선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정의개발당이 집권당으로 서게 됐고 그때부터 튀르키예의 국시(國是)는 급격히 이슬람에 기반한 보수주의로 전환된다.
아직까지도 튀르키예의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가 일궈 놓은 세속주의적 사민주의는 서서히 기울고 보수 이슬람주의가 튀르키예의 20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재난 예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정치권의 무능이 국가 이념의 향방까지 바꾸게 된 셈이다.
▲ 잔해에 깔려 숨진 딸 손 놓지 못하는 아버지 (현지시각) 2월 6일 새벽 튀르키예 남동부 카흐라만마라슈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메수트 한제르씨가 잔해에 깔려 숨진 15세 딸 이르마크 한제르의 손을 붙잡고 있다. 지진 발생 당시 침대에 누워 있던 이르마크는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콘크리트, 창문, 벽돌 등 잔해에 깔려 숨진 것으로 보인다. ⓒ AFP=연합뉴스
지진세의 묘연한 행방
하지만 과연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은 그 후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안전한 국가를 이끌었을까? 이번 지진 이후 피해 지역의 상당 건물이 최근 20년 사이 지어진 것들이라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됐다. 내진 설계와 거리가 먼 건축물들이 가족, 친지, 이웃을 매몰시켰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지진세 징수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1999년 만들어진 지진세는 당초 2003년 12월 31일까지 4년간 징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권에 성공한 에르도안 당시 총리는 이 세금의 기한을 없애 영구적 세금으로 전환했다.
튀르키예가 지진 위험 국가였기에 국민들은 지진세의 무기한 징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징수된 세금이 총 6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지진세 징수 후에도 여전히 내진 설계와 거리가 먼 건물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게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경제 수준이 높았던 튀르키예는 한국과 달리 산업구조의 체질 변화에 성공하지 못해 제조업 분야는 여전히 가공조립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물가에 연동하는 명목 GDP는 안정적인 반면 실질 GDP는 국제경제 동향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에도 이렇게 불안정한 튀르키예 경제의 버팀목을 한 것은 건설과 부동산이었다. 환율은 악화돼도 국내 실물 경제가 그럭저럭 유지된 것은 충분한 인구조건 하에 내수 경제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 경제의 근간인 건설업이 이처럼 부실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이 지진세의 묘연한 행방과 함께 국민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이쯤 되면 튀르키예 국민들은 물을 수밖에 없다. '그 많던 지진세는 누가 다 먹었을까' 누가 다 먹어버려서 이 정권은 20년 무병 장수하는 동안 국민은 무너진 잔해 속에 깔리게 됐을까.
더욱이 현지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현 집권 여당의 책임도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
2018년 이후 터키 의회에 제출된 지진 대비 관련 법안은 총 75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 법으로 공표된 것은 단 4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튀르키예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념에서 출발한 진보 야당 인민공화당(CHP)은 4년 동안 총 36건의 지진 대비 관련 법안을 제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른 진보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이 제출한 관련 법안은 17건이었다.
반면 케말주의 우파 이념의 야당, 좋은당(İYİ)이 제출한 관련 법안은 8건, 극우 성향의 국민운동당(MHP)은 3건을 제출했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여당 정의개발당이 제출한 지진 대비 관련 법안은 4년 동안 단 한 건에 불과했다.
▲ (이스탄불 AF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이스탄불의 한 병원에서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구조돼 입원해 있는 아기의 손을 잡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 옆에는 부인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은 튀르키예 대통령실이 찍어 제공했다. 2023.02.14 ⓒ 연합뉴스
대통령의 엉뚱한 말
최근 낮은 지지율에 고심하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5월 14일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러 30년 집권을 꿈꿨지만 6일 발생한 대지진과 함께 그 꿈이 수포가 될 수 있게 됐다.
현실 파악을 못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 발생 후 이런 말을 남겼다. "이런 재난에 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또 이런 말도 자신의 트위터에 남겼다. "참혹한 나날을 뒤로하고 국가와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정부의 부실한 관리로 인해 더 커진 재앙 앞에서 정부와 대통령이 해야 할 말은 따로 있는 듯 싶다. "대통령과 정부가 더 철저하게 재난에 대비했어야 했다", "정부는 참혹한 나날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겠다. 국민은 화합과 단결을 부탁한다."
이런 말이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대선과 총선을 걱정한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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