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묻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이대희 기자 | 기사입력 2023.02.27. 05:44:12
불과 한두 해 전 한국 사회 곳곳에서 극일(克日)이 거론됐다. 일인당 구매력평가(PPP)로는 이미 한국이 일본을 웃돈다는 자화자찬이 인터넷을 덮었다. 이 같은 분위기가 올해 들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무역수지 적자 행진이 1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이달 1~20일의 반도체 수출액이 거의 반토막(44%) 났다. 한국의 장기 성장 밑거름이었던 중국 시장이 닫히고 있다. 물가가 폭등하고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혼선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극일이 아니라, 한국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30년의 터널로 들어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사회에 먹구름처럼 끼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괜찮은가. 한국 경제가 딛고 선 땅은 잃어버린 30년으로 향하는가, 아니면 탈출구가 있는가. <프레시안>은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를 만나 한국 경제가 위기를 돌파할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나 교수는 한국의 수출주도형 모델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 내수 소비를 키우기 위한 대대적인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개혁이 없다면 위기가 커질 수도 있다고 나 교수는 지적했다. 나 교수는 아울러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이와 거꾸로 가 우려된다고 보았다. 인터뷰는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한국 수출 주도형 모델 이제 한계
프레시안 :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특히 한국 경제를 지탱한 수출 실적이 심각하다. 지난해 무역적자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올해 들어 이달까지 실적은 지난해보다 더 심각하다. 자연히 일본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일어난다.
나원준 : 일본식 장기 불황을 떠올리게끔 하는 유사한 흐름이 보이는 것 같다. 우선 과도한 가계부채를 들 수 있다. 부동산 버블이 꺼진 후 일본의 장기 불황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요인이 과잉부채다. 과잉부채는 경기 위축 시에 가계 소비 여력을 떨어뜨려 수요가 과잉 위축되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다.
장기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생산가능인구 감소도 지금 한국이 일본과 닮은 모습이다.
(22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집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낮고, 전 세계에서도 특수한 상황에 처한 홍콩(0.75명)을 제외하면 가장 낮다. 이는 일본의 경우와 비슷하다. 일본의 출산율은 부동산 버블이 절정에 달한 1989년 1.57명까지 떨어졌다. 일본 사회가 이른바 '1.57 쇼크'로 기억하는 현상이다. 이후 일본의 출산율은 2005년 1.26명까지 떨어졌다.)
인구 감소는 대단히 우려스러운 측면이다. 한국의 인구감소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일본의 기억을 떠올리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지금 한국 상황이 일본식 장기불황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현재 한국이 과거 일본보다 나쁜 모습도 있지만 좋은 모습도 있다.
프레시안 : 과거 일본보다 나쁜 점과 좋은 점을 나눠 설명해 달라.
나원준 : 수출 경쟁력은 지금 한국이 과거 일본만 못하다. 모두들 알다시피 1980년대 일본 가전제품과 자동차, 기계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프로덕트 믹스(product mix)가 워낙 좋아서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은 건재했다. 반면 지금 한국의 위상은 그만 못하다.
세계 경제 흐름이 한국에 불리하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지금은 1980년대 이후 계속된 세계화가 퇴조하는 등 세계 경제 지각판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현재 전 세계가 구조적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 국면에 있는 건 사실이다. 밑바탕에 이런 경제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코로나19가 터지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 세계화 흐름을 가장 잘 탄 나라다.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개척해 고도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국면이 끝나가고 있다. 이는 되돌리기 어려운 흐름이다. 현 상황에서 기존의 수출 주도 방식만을 답습한다면 '답이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프레시안 : 당시 일본보다 나은 점은?
나원준 :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다. 디지털 전환, 에너지 전환이 경제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이 전환에 성공한다면 좋은 흐름을 탈 수 있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더 좋은 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이는데. 현 한국 경제 상황이 암울한가?
나원준 : 많은 분이 '경제 위기'라고 하면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처럼 기업이 줄도산하고 실직자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림을 그리는데, 지금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는 그런 단기 이벤트가 아니다. 중장기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가계부채나 물가폭등 등 당장 중요한 이슈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간 한국의 성공 모델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큰 문제다.
프레시안 : 1년째 이어지는 무역수지 적자 행진이 수출주도형 한국 경제 모델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해석 가능해 보인다.
나원준 : 그렇다. 여러 기관이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을 1% 정도로 잡고 있는데 그 근거로 보는 무역수지 전망이 내 생각엔 여전히 낙관적이다. 이미 1월과 2월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장기간 이어지는 무역수지 적자 원인을 일시적 부침에서 찾을 순 없다. 급변하는 세계 무역 구조에서 한국이 미아가 되어 버렸다. 굉장한 구조적 위기다.
내수 주도 모델로 전환할 때
프레시안 : 최근 들어 과거 냉전 구도의 재등장이 거론되고,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공급망의 해체가 거론되는데 이 흐름이 특히 수출주도형 모델인 한국에 좋지 않다, 는 정도로 정리된다.
나원준 :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퇴조하는 시국인데, 불행히도 한국의 성장 동력은 수출에 있다. 한국 경제는 수십 년 간 수출 주도형에 딱 맞춰 작동하는 모델이다.
앞으로도 한국 경제는 성장해야 한다. 문제는 성장을 어떻게 하느냐다. 대부분의 생각은 과거 방식의 답습에 머무르는 것 같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의 위치를 새롭게 잘 잡고,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계속해서 상품을 팔자는 식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당장 문재인 정부도 동남아 시장 개척에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새로운 인구 대국이자 소비 대국으로 떠오르는 인도 시장을 집중 개척해서 인도의 성장에 한국이 올라타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본다.
지금 따져야 할 건,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가야 하느냐다. 이런 수출 주도 성장 구조는 항상 우리에게 일정한 내핍(耐乏)을 강요한다. 수직적 하청 구조, 저임금의 고착화를 통해 성공한 모델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가는 게 맞느냐고 우리가 질문해야 한다. 과도한 가계부채, 사교육 문제, 양극화 문제, 인구감소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걸 우리가 여태 경험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은 나라다. 수출주도형 모델이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렇다. 장기간에 걸쳐 GDP 대비 소비 비중이 쭉 떨어지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7년 발표한 '내수 활성화 결정요인 분석' 보고서를 보면, 1996~2015년 한국의 평균 GDP 대비 내수 비중은 61.9%였다. 이는 OECD 회원국 35개국과 브라질,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6개국을 포함한 총 41개국 중 27위에 불과하다. 일본의 GDP 대비 내수 비중은 84.8%다.)
그만큼 내수 기반이 취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 이유는 임금 불평등이다. 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정체된 실질 임금이 우리 내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내걸었으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유효 수요 제약의 늪에 빠져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노동생산성과 임금증가율 간 괴리가 크게 벌어졌다. 실질임금은 정체됐는데 노동생산성이 매우 빠르게 증가한 시기다. 이는 다시 말해 한국 노동자가 그만큼 힘들게 산다는 이야기다.
이는 결국 악순환 논리를 만든다. '봐라, 내수가 취약하니 우리는 수출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 임금을 더 제약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면 노동자의 소비 여력이 떨어지니 내수가 더 떨어지고, 그만큼 더 수출 의존 모델에 국가가 매달리게 된다. 이는 결국 한국의 자립적인 경제 기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프레시안 :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곧바로 따라오는 질문이 '한국의 내수시장은 작다'는 것이다. 당장 일본은 1억 인구 국가고 한국 인구는 그 절반 수준이다.
나원준 : 한국 인구가 결코 적지 않다. 우리 경제 규모도 큰 편이다. 그에 걸맞게 내수가 커지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우리가 여태 겁이 나서 제대로 시도하지 않았지, 이런 대안이 없다고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곧바로 '문재인 정부 때 소득주도성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나원준 : 나는 '임금주도성장'이라고 칭하는데, 이름이야 붙이는 사람 마음이다. 문재인 정부는 좋은 말은 다 갖다 썼는데 제대로 추진한 게 없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 당시를 되새겨 보면 '편의점 사장이 알바생보다 돈 못 버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식의 논란이 일어났다.
나원준 : 단순히 임금을 올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업이 임금을 올릴 수 있도록 산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대-중소기업 임금격차 문제의 핵심 원인인 수직적 하청구조는 건드릴 생각 없이 소주성만 들고 나왔다. 실제로 소주성이든 임금주도성장이든 가능하려면 현재 생산 사슬의 상당한 가치가 대기업에 쏠린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중소기업은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이 때문에 공정경쟁이 일어날 수 없는 장을 재편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현재 한국 체제는 대기업 중심 수출주도형 모델에 최적화했다. 결국 이 구조 자체를 재편해야만 한다.
프레시안 : 기존 수출 중심 모델이 한계에 달했다. 이를 극복하려면 소비 활성화에서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이는 임금주도성장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산업 구조를 근본부터 고쳐야 한다, 는 얘기로 정리된다.
나원준 : 그렇다. 중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힌 현 상황에서 기존 방식만 답습한다면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치게 되고, 그러면 정말 과거 일본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 경제 정책, 이념에 종속
프레시안 : 최근 대중국 무역적자가 특히 심각하다. 이를 보는 시각에는 두 갈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윤석열 정부의 대중 외교 실패로 인한 중국의 보복이 원인이라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이다.
나원준 : 두 가지 다 어느 정도 맞는 것 아니겠나. 중국 스스로가 그간 공급망 자립화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게 이제 결실을 맺고 있다. 과거 한국 기업이 차지하던 중고위 기술 시장을 이제 중국 기업이 실질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과거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을 대체했듯, (적어도 중국에서는) 중국 기업이 서서히 한국 기업을 대체하는 양상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최근 포스트 코로나-미중 갈등 국면에서 오히려 대 중국 수출이 늘어난 나라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어느 정도 자초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윤석열 정부가 경제 문제를 이념 문제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 우파들 주장과 달리 오히려 현 정부 경제 정책이 이념에 종속됐다.
프레시안 : 윤석열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 위기 대응책이 감세와 재정 긴축 정책이다. 간단히 말해 돈을 덜 걷고 덜 써서 재정건전성을 유지하자는 게 현 정부 방침인 듯하다.
나원준 : 지금의 이 거대한 변화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그 충격이 누구에게 특히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감세를 들고 나온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영국에서는 감세를 꺼냈다가 총리가 교체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지금은 정부가 재정정책을 써야 할 때다. 윤석열 정부는 세계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감세와 긴축을 결합한 윤석열 정부 대책은 최악의 재정정책이다. 국가가 제 역할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 결국 약자부터 다쳐 나가게 된다.
이런 대책이 결국 재정 수지로 나타나게 된다. 소비가 더 위축되면서 세수가 더 줄어들고, 이는 더 큰 폭의 재정긴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만큼 국가 위기 시그널도 더 뚜렷해진다.
프레시안 : 외국인 자본의 국내 투자를 용이하게 해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겠다는 대책도 내놨다.
나원준 : 투기자본이 들어올 뿐이다. 백해무익하다. 우리 기업의 실적이 좋아서 무역수지 흑자가 일어난다면 외화는 오지 마라고 해도 들어온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외환거래 자유화는 한국 경제의 거시 건전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오히려 지금은 외화를 더 통제해야 할 때다. 외화의 이동으로 인해 환율이 불안해지는 문제에 대응하려면 외환거래세를 매기는 등 통제 대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급진적인 이야기라고들 하겠지만, 이미 여러 국제기구도 비슷한 제안을 내놓은 바 있다.
프레시안 : 윤석열 정부가 참고할 만한 모델이 있을까?
나원준 : 당장 미국 바이든 정부를 봐라. (우리 같은 동맹 뒤통수를 치기는 하지만) 욕먹더라도 어쨌든 미국 내 제조업을 키우겠다는 정책 방향성을 확실히 제시하고, 이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부 역할을 다하기 위해 증세해야 한다고 명확히 선언해 이를 지켜나가고 있다.
한국 정부도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재정을 써서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정부가 개별 자영업자의 소득을 전부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코로나19를 전후해 자영업자가 어느 정도 영업손실을 봤는지를 정부가 다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재정을 투입해 개별 자영업자가 코로나19 기간에 떠안은 채무를 대신 사가면 자영업자 부채 문제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재정정책을 위해 과감하게 증세해야 한다. 내가 증세 운동 차원에서 횡재세 도입을 요구한 이유다(☞관련기사 : 횡재세, 반드시 연내 입법되어야 한다). 정부가 빚을 지면 안 된다고 이를 수수방관한다면,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이 빠져죽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다 더 큰 외부 위기가 오면 정말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질 수 있다.
통화 정책으로 물가 잡기는 난센스…정부 재정이 제역할 해야
프레시안 : 최근 한국 경제에 가장 긴박한 이슈가 물가 폭등이다.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
나원준 : 사람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게 경제가 상승할 때 물가가 오른다는 믿음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가 상승률과 경제 성장률의 상관관계는 마이너스다. 물가가 오르면 경제가 나빠진다. 대부분 물가 상승 요인이 수요가 아니라 공급측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오일쇼크를 떠올리면 된다.
현재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물론, 달러화체제에 편입된 한국은행까지 추진하는 대책이 기준금리 인상이다. 이건 난센스다. 공급에서 발생한 문제를 기준금리 인상으로 어떻게 잡나.
당장 대학생이 화폐경제론, 거시경제학에서 배우는 게 '통화정책은 총수요 관리 정책'이라는 것이다. 통화정책은 총공급 관리 정책이 아니다. 문제는 공급에 있는데 기준금리를 올린다면 그건 경제를 죽이겠다는 거다. 역시 학생들이 배우는 필립스 곡선만 봐도 알 수 있는 얘기다. 금리가 올라가면 실업이 늘어난다. 기준금리 인상은 결국 의도적으로 경제를 죽여서 힘이 빠지면 총수요가 줄어드니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거다. 이는 현실경제에서 단 한 번도 실증된 적 없다. 많이들 과거 1980년대 Fed 의장을 지낸 폴 볼커를 예로 들지만, 당시 물가 폭등은 80년대 국제 원유시장의 과잉공급이 발생해서 잡혔다.
프레시안 :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바람직한 물가 대책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나원준 : 절반은 맞는 얘기다. 미국 Fed가 기준금리를 마구 끌어올리니 한은이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상황임은 분명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모순적인 메시지를 시장에 내놓는다는 건 문제다. 한은은 한국 경제 현 상황을 두고 외환위기 가능성이 없다고 호언했다. 외환위기 가능성이 없는데 금리를 왜 올리나.
프레시안 :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나원준 :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 이는 무슨 공산주의자적인 발상이 아니다. 전통적인 인플레이션 대응책이 가격통제다.
다시금 바이든 정부를 예로 들 수 있다. 바이든이 최근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2022)을 두고 한국에서 주로 논란이 된 건 한국 자동차 기업 때리기였지만, 실은 이 법안의 중요한 다른 한 축이 정부가 제약회사와 약값을 협상하겠다고 명문화한 것이다.
과거에는 독과점인 제약회사가 자기들 멋대로 가격을 책정했다. 이제 정부가 약값을 통제하겠다고 한 것이 IRA 2022다. 가격통제는 60~70년대 케인스주의자들이 가장 즐겨 썼던 정책이다.
한국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미 한국은 원래부터 가격 통제를 한 나라다. 당장 공공요금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적극적으로 공공요금을 관리해야 한다.
프레시안 :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정 정책을 펴고, 외환거래세와 같은 세금을 매겨서 외화 이동을 통제하고, 한은은 기준금리를 안정화하자, 는 말로 여태 정리했다. 이런 입장이 자칫 한은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수도 있어 보인다.
나원준 : 이미 한은은 너무 한국 사회로부터 독립한 상태다. 중앙은행이 국가 거시경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 기관인데, 외따로 떨어져있다면 그 자체가 문제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구성원 면면을 보라. 전부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 뿐이다. 이게 과연 민주주의적인 구성인가? 한국 서민의 이해는 한은 정책에 전혀 대변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한국에서 한은의 독립성이 마치 성역인양 거론된다. 지금은 한은의 민주적인 통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프레시안 : 부동산 시장 경착륙 우려가 크다. 정부는 그 대책으로 강남과 용산을 제외한 전국의 토지 규제를 사실상 다 풀었다.
나원준 : 부동산 시장이 매우 빠른 속도로 침체하는 건 분명하다. 자칫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으로 위험이 전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가 규제 몽땅 풀어놓고 할 일 했다고 할 때가 아니다. 최근 레고랜드 사태와 흥국생명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응은 무능함이었다. 정부가 더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정부가 풀어놓은 규제가 경제가 현 위기국면을 벗어난 후 다시금 부동산 폭등으로 이어질 뇌관이 될 수 있다. 그때는 무슨 수로 시장을 통제할 건가. 지금 정부가 취해야 할 자세는 가격이 떨어지도록 하되, 시장 위험이 커지는 건 관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떨어지는 가격을 인위적으로 빚을 더 키워서 떠받치려 해서는 안 된다. 경착륙은 경계하되, 지금 중요한 건 ‘착륙’ 자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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