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3.12.30. 05:09:39
한국 정치사에서 세대교체론의 대명사는 '40대 기수론'이다. 1969년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설 것을 천명했다. 독재자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젊은 군부'에 맞서기 위해선 '젊은 야당'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40대 기수론'을 밀어붙였다. 김대중, 이철승이 합세하면서 대세를 탔다. 김대중이 야당 후보로 선출돼 박정희 독재 정권의 턱 밑까지 치고 올라갔다. '40대 기수론'은 젊은 정치인들이 돌파해 낸 '세대 교체'의 마중물이 됐다.
3김 시대는 50대 노무현이 끝냈다. '새 시대의 맏형'은 못되고 '구시대의 막내'가 됐지만, 노무현은 2002년 혈혈단신으로 젊은 386들을 이끌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까지 탄생시켰지만,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기득권'이 된 86세대는 지금 5선, 6선을 바라보며 '후배'가 아닌 '친구'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길 반복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민의힘에게 '운동권 심판론'의 빌미를 제공하는 중이다.
보수 진영은 어떤가. 2021년 6월 11일 국민의힘 초대 당대표 선거에서 44%를 득표해 헌정 사상 최초로 30대 원내 교섭단체 대표에 오른 이준석도 빼놓을 순 없다. 이준석은 기성 세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승리에 목말랐던 보수세력의 기수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한계는 명확했다. 여성혐오 등 '반정치'에 기대어 '세대 포위론'을 조악하게 주물해 선거 기술을 부렸다. 양 머리를 걸고 개고기를 팔다가 결국 스스로 만든 대통령에 의해 당에서 쫓겨났다. 트럼프가 의회주의를 혐오하는 인종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제도권에 끌어들여 멕시코에 장벽을 세운다고 한들, 우린 그걸 '정치'라고 부르지 않는다. 반정치(Anti Politics)의 유혹에 빠진 보수정당은 이준석식의 세대교체론에 급체했다. 정치화되지 않은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해놓고 혐오를 정치 세력화한 대가는 만만치 않다.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합리적 세력이, 이 젊은 보수 정치인과의 선거 연대를 꺼리게 만든 건 사실 본인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세대 교체는 언감생심인 민주당의 상황은 차치하고, 세대교체론의 불씨를 스스로 꺼트린 보수는 지금 새로운 '세대교체론'에 환호하고 있는 것 같다. X세대, 강남 8학군 출신 50대 엘리트 한동훈의 등장이다. 평생 검사로 살아온 50살 한동훈은 경선도 치르지 않고 여당 대표직에 무혈입성했다. 그 뒷배에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부하 검사를 일약 법무부장관에 발탁하더니, 곧바로 야당 대표직에 내리꽂았다.
위에서 내리 꽂은 세대교체, 앙상한 '반정치' 깃발을 들다
지금 한동훈식 세대 교체의 앙상한 명분을 메워주는 것은 '반정치(Anti Politics)'다. 전 세계의 많은 '반정치' 행위들은 '법치'라는 구호와 자주 결합한다. 부패한 정치권을 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세차'하는 신성한 역할을 부여받은 정의로운 '판사(혹은 검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범죄자 사살을 명령한 필리핀의 두테르테나, 브라질의 좌파 청산 '세차 작전'은 반정치가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 어떤 구호가 사람들의 감성에 잘 작용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들이다. 한동훈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분법에 토대를 둔다. 선과 악의 세계이고, 집행자와 범죄자의 세계다. 그가 집권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며 내놓은 연설에는 '적', '청산해야 할 상대'가 누군지 명확하게 지정돼 있다.
"중대범죄가 법에 따라 처벌받는 걸 막는게 지상 목표인 다수당이, 더욱 폭주하면서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 당을 숙주삼아 수십년간 386이 486, 586, 686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현 국회 다수당은 범죄자들이다. 그리고 그 당을 숙주삼아 86세대(운동권 세대)가 '특권 정치'를 하고 있다. 반정치주의자의 특징은 지나친 '자기 확신'이다.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로 자리매김한다. 이 세계관에서 여의도는 '범죄자 집단'으로 치환된다. 정치란 뭔가 더러운 일이고, 편집증적 권력욕의 부산물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는 영악한 방법이다. "여의도에서 300명만 쓰는 고유의 화법이나 문법이 있다면 그건 '여의도 사투리'"라며 "나는 나머지 5000만 명이 쓰는 문법을 쓰겠다"고 한 발언 역시 좁게는 여의도와 비여의도를 나누고, 넓게는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를 부패 집단으로 낙인 찍는다. "우리"는 그들을 심판해야 할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았다. "우리"는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그 뒤에 숨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운동권 특권세력과 싸울 것"이라고 천명한다.
문제는 이런 전략이 이미 다 실패로 끝났다는 점이다. '정치 혐오'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의 세계관이었다. '운동권 정치 청산'도 윤 대통령이 다 써먹었던 구호다. 윤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무식한 3류 바보들 데려다 정치해서 경제, 외교, 안보 전부 망쳐 놓았다", "가지가지 무능과 불법을 동시에 다하는 엉터리 정권", "민주당 후보를 둘러싼 음습한 조직폭력배, 잔인 범죄 이야기를 먼저 다 밝혀야 한다"고 했고, '민주당 정권'이 집값을 의도적으로 올려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어 자신들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는 황당한 논리를 펴며 "민주당 운동권 정권의 실체를 여러분이 정확히 알아야 한다. 노동자, 약자, 서민 위하는 것 같지만 겉으로 그렇게 사기치고 실제 어려운 분들에 더 고통을 주는 그런 패거리집단"이라고 주장했다.
한동훈의 '운동권 정치 청산론'은 윤석열 대통령의 계승이다. 한동훈 위원장이 여의도를 배격하고 '국민'을 강조하고 있는데, 윤석열 대통령의 구호가 그 유명한 "국민이 키운 윤석열"이었다. 국민과 정치권을 적대 세력으로 설정한다. '운동권 정치 청산'도 윤 대통령의 단골 레파토리다. 어쩌면 한동훈의 국민의힘은 정권교체 전 국민의힘과 윤석열의 인식을 그대로 계승하는 버전 2.0이다. 윤 대통령의 유일한 승리는 '운동권 정치 청산'을 내걸고 대선에서 이겼던 그때다. 이후 '공산 전체주의', '카르텔' 등 수많은 '적'들을 내세웠지만 그의 국정 운영 점수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걸 반등시켜야 하는 과제가 한동훈에게 있다. 하지만 지금 한동훈의 지지층은 윤 대통령과 정확히 겹친다. 한국갤럽의 12월 1주 차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면 한 위원장은 대구·경북 지역(TK)과 60대 이상에서만 이재명 대표를 앞섰다. 18~29세의 경우, 한동훈 6%, 이재명 5%로 비슷했는데, 그 외 모든 지역과 연령층에서 이 대표에게 뒤지거나 동률이었다. (12월 5~7일 전국 성인 유권자 1000명 대상 전화면접. 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20대, 30대, 40대, 50대에서 확장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윤 대통령과 똑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
한 장관이 '윤석열 아바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런 점들 때문이다. 그래서 '변화'를 주문하고 있는데 한동훈은 되레 '윤석열 사상'을 강화하고 나타났다. 국민의힘이 지지를 못 받고 있는 상황, 자신에 대한 지지층이 윤 대통령의 그것과 정확히 겹치는 상황에서 지난 2년 가까이 써 왔던 '윤석열 전략'을 똑같이 사용하는 건 자기 객관화가 안 돼 있다는 걸 의미한다. 왜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이 국민적 지지를 못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똑같은 일을 하면서 결과가 다르길 바라는 걸 '미친 짓'이라고 했다.
한동훈의 미션은 '윤석열 신당' 만들기
'동료 시민들'(My fellow citizens)'이라는 영어 번역투의 생소한 조어를 구사하는 걸 세련됨으로 포장하는 한동훈식 세대 교체의 앙상한 명분을 메워주는 것은 '반정치'다. 한동훈 비대위에 합류한 인사 면면을 보면 8명 중 7명이 '비정치인'이다. 이걸 자랑스레 내건다.
면면을 봐도 '반운동권(민경우)', '반민주당(김경률)'이 거의 전부다. '주사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다고 하는 민경우 비대위원의 인식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에 대해 "(굉장히 우수한) 제국의 청년들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잖나"라는, 뉴라이트류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경도된 수준이다. 이런 사상은 이준석조차도 경계했던 것들이다. 민경우 비대위원은 운동권 세력의 핵심 특징을 "친북 반미"로 본다. 지금 민주당을 '친북 반미'로 보는 사람들은 태극기 세력, 전광훈 세력 뿐이다.
이런 걸 '세대 교체'라 부르는 건 민망하다. '세대 교체'가 아니라 '주류 교체'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나이가 세대 교체를 상징하는 건 아니다. 지금 한동훈은 김영삼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이준석도 아니다. 자력으로 인한 세대 교체가 아니면 생명력이 없다. 대통령의 변화를 이끌어내라 했더니 대통령의 인식을 계승하고 대통령 배우자의 '특권 의식'과 '범죄 혐의'를 방어하고 있는 모습은, 한동훈이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는 '민주당 운동권 세력'의 행태 아닌가?
지금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정당'이 아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지금 '윤석열 국회'를 필요로한다. 이준석을 숙청한지 1년여 만에 국민의힘을 '윤석열의 정당'으로 완성시켜야 하는 미션이 한동훈에게 주어졌고, 대통령의 충실한 '부하' 한동훈은 혁신을 빙자한 '윤석열 신당' 만들기에 착수했다. 그것은 '창당'의 형식이 아니라 '당 고쳐쓰기'의 형식이다. 앞으로 진행될 '물갈이'와 '찐윤'의 약진에 관심이 쏠린다. 국민의힘은 한동훈 체제로 170석(홍문표 의원)까지 바라보는 '꿈'을 꾸고 있다. 세대교체를 흉내낸 인위적 주류 교체, 그리고 '반정치의 정치'라는 "무기"를 장착한 한동훈 체제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을 전면에 내걸고 총선에 뛰어들고자 한다. 1973년생 윤석열의 무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