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불편한 아파트 이름, 이대로 좋은가?
입력 : 2022-08-19 06:00:00 ㅣ 수정 : 2022-08-19 06:00:00
얼마 전 지인에게 우편물을 보내려 주소를 물어봤다. 지역과 번지는 그대로인데 아파트 이름이 바뀌었다. 온갖 외국어를 써서 14자에 이르는 긴 명칭이었다. 뜻도 알 수가 없었다. 나만 그런가? 유럽에서 온 시민이 블로그에 한국의 아파트 이름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한마디로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가?"라고 묻고 싶다고 했다.
(사진=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 규제혁신센터장)
국적불명의 혼란스런 용어가 아파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한자, 영어 등의 외국어와 행정·법률·의학용어가 사용영역을 벗어나 무분별하게 유통되니 골머리 아픈 것은 일반 국민들이다. '심상성좌창은 쉽게 치료되지 않아요', '척사대회라도 한번 해야지', '수의시담이 잘 안돼서', '폴-케어에서 확인하세요', '프린지페스티벌이 열린다는데요', '테크브릿지활용사업을 신청하세요', 'net zero기술혁신개발' 등 전문용어와 행정용어가 일반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
오죽하면 국민의 92%, 공무원의 88%가 국민에게 통용되는 행정용어가 어렵다고 하겠는가. 한 학자는 의학용어의 자국어 비율이 중국 90%, 일본 10%인 반면 우리나라는 0%라며 세종대왕이 오셨다가 울고 가실 판이라며 현 상황을 지적했다. 국민을 위해 만든 한글이 외국어의 심부름꾼이 돼 그저 한글로 표기만 될 뿐이다. 외국어에 대응하는 한글이 신속히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한글을 제대로 이용해야 하는 의무를 지키지 않은 우리의 책임도 있다.
외국어를 사용하지 말자거나 한글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도를 넘는 용어 사용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어기본법을 제정해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토록 하고 있다. 이 법은 "국어사용을 촉진하고 국어의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해 국민의 창조적 사고력의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하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있다. 또한 "국가와 국민은 국어가 민족 제일의 문화유산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임을 깊이 인식해 국어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씀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어를 잘 보전해 후손에게 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미국인으로 1886년 조선에 들어와 외국어를 가르치며 선교와 독립운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1863~1949)는 "한글은 완벽한 문자다. 소수의 문자로 가장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다"며 그 우수성을 미국 언론을 통해 알리기도 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자국 문자로 채택하는가 하면, 많은 외국청년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음에도 정작 우리 사회엔 내놓기도 부끄러운 용어가 범람하고 있다.
물론 외국에서도 전문용어나 이민족언어가 혼용되면서 소통의 어려움과 사회적 혼란이 없지 않았다. 영어의 고향인 영국에서도 '쉬운 영어 사용하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가 쉽게 용어를 쓰자는 것이지 우리처럼 한자, 영어, 일본어가 뒤엉키고 이들이 섞여 신조어가 남발되도록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올바른 용어의 사용은 한글날 전후의 소동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평소에 언론, 정부, 학교, 기업이 나서서 '아름다운 한글 사용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수년 전부터 '어려운 행정용어를 쉽게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일시적으로 하는 척해서는 안 된다. 향후 5년 또는 10년 후에는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한글 용어로 된 교재 사용과 시험이 적용되든지, 기관장의 대외 발표문이나 정책보고서를 작성할 때 용어사용이 적절한지 점검하든지 하는 식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국가·사회적으로 '한글로 유식한 사람', '말과 글을 쉽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식인이자 교양인으로 인식됐으면 좋겠다. 각자의 영역에서 배운 언어는 그들만의 소통수단이 돼야지 일반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사회의 무언의 약속이다. 불량하게 폭언을 일삼는 사람은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고 무분별한 언어공해를 일으키는 사람은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돼야 한다. 어렵고 헷갈리는 용어를 사용하는 지도자는 국민을 무시하고 불편하게 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쉽고 아름다운 언어가 필요한 때다.
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 규제혁신센터장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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