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 전시
- 이계환 기자
- 입력 2021.03.22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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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코로나19 팬데믹 현상 때문일까? 요즘 매우 의미 있는 내용들, 놓칠 수 없는 전시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의 진보미술가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의 작품 전시회도 그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가 연세대학교 박물관 2021년 3월 새 학기 첫 기획전으로 지난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전시 중에 있다. 전시에는 유화, 판화, 콜라주, 스케치, 영상 등 총 170여 점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도미야마는 1921년생이니 올해 만 100세다. 아직 정정하다. 한 세기를 산 작가이기에 이번 전시를 두고 ‘100년 삶의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기억들’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도미야마의 아뜰리에에는 아직도 캔버스가 놓여 있다고 한다. 단순히 노당익장(老當益壯)이라고 부르기에도 뭔가 부족한 듯하다.
하기와라 히로코 오사카부립대학 명예교수가 도미야마에 대해 “논의와 혁신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라 정의했듯이,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찾고 화제의 중심에 서 왔다. 그의 삶의 첫 시기부터가 그렇다. 그는 1933년 12세에 만주로 이주해 청소년 시기를 보내며 조선,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동화되지 않는 예리한 감수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화가로서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그리도록 이끌었다는 것.
그의 작품세계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책임, 강제노동(탄광) 및 위안부,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등 다양하다. 특히 그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린 양심적인 일본 화가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는 이번 전시를 앞두고 “제 인생에 있어서 한국과의 만남은 구원이었다”며 “저는 한국을 주제로 여러 해 동안 한국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시대의 야만을 고발하고 억압받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알려왔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100년을 살아오며 예술작품으로 인권과 평화의 존엄함을 증언해온 작가’라는 헌사가 붙는 것도 전혀 놀랍지 않다.
이번 전시는 ‘전쟁의 기억’, ‘땅 아래 사람들의 기억’, ‘시인을 위한 기억’, ‘광주의 기억’ 그리고 ‘후쿠시마의 기억’ 등 모두 5개의 주제로 되어 있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곳은 ‘전쟁의 기억’, ‘시인을 위한 기억’, ‘광주의 기억’ 세 곳이다.
‘전쟁의 기억’에서는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삶과 일본군‘위안부’의 한을 해원하고자 했으며, 윤동주가 갇혔던 후쿠오카 형무소도 그렸으며, 특히 작품 <만주와 하얼빈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도 얼핏 보인다.
‘시인을 위한 기억’에 나오는 시인은 김지하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 치하에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며 민주인사들을 투옥시키는 등 반민주·반인권적인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김지하 투옥, 서승-서준식 형제를 비롯한 재일한국인유학생 간첩죄 체포, 김대중 납치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 시기에 도미야마는 서울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는 작품활동을 해왔으며, 특히 조선인 강제노역, 종군위안부 문제, 김지하·서승 석방촉구 문제 등을 다뤘다.
박정희 치하에 일어난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과 김대중 석방을 위한 기도회와 연관된 작품들 그리고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인 리영희 선생과 주고받은 서신 등은 그가 한국 민주화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컸고 또 공을 들였는지 짐작케 한다.
특히 ‘광주의 기억’은 압권이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전두환 군부는 무력으로 항쟁을 진압하면서 수백 명의 학생과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도미야마는 즉시 판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3주 만에 완성된 광주항쟁을 전하는 “쓰러진 자를 위한 기도” 연작은 20여점에 달하는 판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약 12분의 슬라이드 작품도 제작했다. 특히 <광주의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와 성모의 모습을 담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 전시는 단순히 외국인 또는 일본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이 아닌, 진솔하고 양심적인 작가가 그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인 셈이다. 국적이나 시대를 넘어 누구든 예술작품을 통해 공감할 수 있다는 금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코로나19로 인해 한산해진 전시를 부러 찾는 것도 특별한 혜택일 듯싶다.
한편, 도미야마는 지난해 11월 <광주의 피에타>를 비롯해 5.18연작 “쓰러진 자를 위한 기도” 시리즈의 판화 10점과 2011년 만든 콜라주 작품 10점, 1970-73년 서울에서 그린 드로잉 51점 등 작품 71점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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