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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5일 월요일

[여성, 정치를 하다](23)“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그는 일평생 ‘거리’에 있었다

 장영은

입력 : 2021.03.16 06:00 수정 : 2021.03.16 08:06


도러시 데이 

미국농장노동자연합(UFW)의 시위 현장에서 보안관에 맞서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도러시 데이(1973년).  스탠퍼드대도서관 밥 피치 아카이브

미국농장노동자연합(UFW)의 시위 현장에서 보안관에 맞서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도러시 데이(1973년). 스탠퍼드대도서관 밥 피치 아카이브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많은 걸 배웠고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평화주의, 사형제 반대 입장,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관심, 국가의 강압적 권력에 반대하는 입장 같은 다양한 문제에서 우리와 의견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실용적이지 못하고, 사람 좋은 이상주의자이지만 크고 중요한 곳 그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가 실용적이지 못한 건 맞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큼이나 실용적이지 못하죠. 우리를 달라지게 하려고 애써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1933년 5월1일, 뉴욕 유니언 광장은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경제대공황이 4년째 지속되자,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광장에는 미국의 경제 구조를 비판하는 연설가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러시 데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톨릭 노동자(Catholic Worker)’ 창간호를 부지런히 나눠주었지만, 대부분 제호를 보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행히 1면 사설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신문의 탄생을 반가워했다. “비를 피하려고 보호소에 있는 사람들, 없는 일거리를 찾아보려고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지금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발행된 ‘가톨릭 노동자’는 가톨릭 교회도 사회 정책과 복지 제도를 영혼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밝혔다.

이 신문의 발행인은 36세의 도러시 데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연체하면서까지 마련한 57달러로 혼자 신문을 찍어냈다. 데이는 담대하고도 무모했다. 같은 해, 데이는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노숙인과 실직자들에게 조건 없이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환대의 집’까지 열었다.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3년 만에 33개의 ‘환대의 집’이 미국 전역에 설립되었다.

도러시 데이는 189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10대를 보낸 데이는 고등학생 시절에 업튼 싱클레어와 잭 런던의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데이는 장학금을 받고 일리노이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 공부보다는 러시아 문학 작품과 아나키즘 사상을 섭렵하는 데 몰두했다. “1916년, 도러시는 학교는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뉴욕으로 향했다. 1917년, 사회주의 성향의 신문인 ‘콜’과 ‘매시스(The Masses, 대중)’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스무 살의 데이는 아동 노동을 비판하는 기사 및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하는 취재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을 방문한 러시아의 혁명 이론가인 트로츠키를 만나 인터뷰도 했다.

1916년 일리노이대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으로 향한 도러시 데이.

1916년 일리노이대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으로 향한 도러시 데이.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의 모순 고발해온 기자
반전·여성 참정권 시위로 투옥
1932년 11월30일, 유니언 광장서
워싱턴을 향해 단식 행진 시작
혼자 가톨릭 노동자 신문 만들고
노숙인들 돕는 ‘환대의 집’ 세워
 

도러시 데이는 반전 시위와 여성 참정권 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가두 행진을 벌이다 투옥되었다. 워싱턴의 감옥에서 성경을 읽었다. 수감자들에게도 많은 것을 배웠다.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아본 적 없는 거리의 여인 매리-앤”은 데이에게 인생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매리-앤은 데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긍지 있게 행동해야 해.”

출옥 후인 1918년 봄에 도러시 데이는 “킹스 주립병원에서 간호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취재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1년 동안 간호사로 일했다. 데이의 취재력을 아까워하는 언론사들이 많았다. 데이는 1919년 ‘리버레이터(The Liberator, 해방자)’의 기자로 돌아왔다. 데이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한편 공산주의자들과의 지적 교류를 점차 넓혀 나가고, 가끔씩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묵상의 시간도 가졌다. 치열하게 살수록 외로움도 깊어졌다. 데이는 사랑도 이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러시 데이는 1926년 생물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포스터 배터햄을 만나 미래를 함께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7년 데이가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하며 믿음을 실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무신론자인 배터햄은 결별을 통보했다. 데이는 혼자서 딸을 키우기로 한다. “몸과 영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화해시키는 종합적인 것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갈구”했지만, 우선 어린 딸을 키우며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MGM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며 돈을 벌고자 했지만, 1929년 경제대공황이 터지면서 6개월 만에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부터 데이는 ‘어드밴스’ ‘커먼윌(Commonweal, 공동선)’ ‘아메리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취재 현장으로 복귀했다. 기자로 성실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던 데이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32년 11월30일, 600여명의 실직자들이 뉴욕 유니언 광장에서 “워싱턴을 향해 단식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직장과 실직보험, 노후연금, 의료보장과 주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요 신문들은 그 사건을 붉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위험한 과격분자 부랑배들의 행진으로 취급했다”. 델라웨어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시위대에게 잠시 머물 곳을 마련해 준 교회 창문으로 경찰관들이 최루탄을 던졌고, “시위대의 지도부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경찰차에 실려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남은 자들은 단식 행진을 이어 나갔고, 워싱턴에 가까워질수록 함께 걷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추운 날씨였지만, “시위대는 사흘 동안 노숙을 했다”. 12월8일,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풀 수밖에 없었다. 3000마일을 걸어 워싱턴에서 구호를 외친 시위대는 평화롭게 해산했다. 도러시 데이는 취재를 마친 후, 혼자 성당에 들어가 “특별한 기도를 올렸다. 내 동료인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재주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생기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돈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바오로 출판사가 “8면 신문 2500부를 57달러에 찍어 주기로 동의했다”. 신문 발행만으로도 벅찼지만, 도러시 데이는 얼마 전 읽은 로즈 호손 라스롭의 전기가 자주 생각났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개종하면서 뉴욕의 빈민가에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암으로 죽어가는 이웃 사람들에게” 개방했다. “그의 시작은 미국 전역에서 도미니크회가 운영하는 여섯 개의 병원이 되었다.” 데이는 큰 용기를 얻었다. 노숙인과 실직자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기로 결심하고, 1933년 ‘가톨릭 노동자’ 신문과 ‘환대의 집’ 운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도러시 데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오해를 받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데이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격하고 위험한 사회주의자라고 의심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데이를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리타분한 종교인으로 몰아붙였다. 성직자들 가운데 일부는 데이의 이혼 및 동거, 낙태 경험 등을 문제 삼아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격을 운운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참정권 운동과 반전반핵 시위,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서는 데이에게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연방수사국(FBI)은 데이를 불온 인사로 분류했다.

때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1956년 KKK단은 데이에게 총격을 가했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미국에서 가난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며 데이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68년의 모습.

1968년의 모습.

76세에도 노동자 시위에 참가
말과 글과 믿음을 실천한 종교인
프란치스코 교황, 미 의회연설서
“소외된 이와 함께한 위대한 사람”
 

도러시 데이는 “대중적이지 않은 명분을 지키기 위해” 신문을 발행하면서 시위 현장에서 행진하면서 그리고 노숙인과 실직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매 순간 싸웠다. 삶의 본질은 “우리가 서명하는 성명서들이나 우리가 참여하는 정당들이나 우리가 주창하는 대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이 데이의 믿음이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들이 가진 권력 자체에 데이는 아무런 반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데이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책임지기 위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부디 정치인들이 그들의 책무를 깨닫기를 촉구했다.

도러시 데이는 “아침나절은 온통 채소를 썰면서 보내고, 점심나절은 온통 누군가를 의사에게 데려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그 사람과 함께 시립병원 외래 병동에 앉아서” 보내는 일상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데이는 ‘지역’과 ‘현장’을 지키는 운동가로 남고 싶었다. 미래를 책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오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멀리 있는 권력, 이른바 리더라는 사람들이 지닌 권력”은 데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데이는 ‘덕’을 추구하다 어느 날 ‘독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말과 글과 믿음을 실천에 옮기고자 최선을 다했다.

1965년 도러시 데이는 바티칸 공의회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선언을 내놓기를 촉구하며 로마에서 열아홉 명의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열흘간 단식 투쟁을 했다. 1973년에는 일흔여섯의 나이로 농장노동자연합 시위에 참가했다. 데이는 또다시 구속되어 열흘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변함없이 데이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꼿꼿이 서서 상냥하게 맞아 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데이는 지상에서의 시간이 “이제 곧 끝날 것”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내 삶은 기억될 만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1980년 11월, 도러시 데이는 여든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5년 9월24일, 미국 국회의사당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도러시 데이, 마틴 루서 킹, 에이브러햄 링컨, 토머스 머튼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한 뒤,데이를 소외된 계층과 함께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위대한 미국인으로 기억했다. 그렇게 역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데이는 현장을 떠나지 않은 실천가였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은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가까이에서 손을 내미는 따뜻한 정치인이었다. 데이의 고집은 옳았다. 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3)“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그는 일평생 ‘거리’에 있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160600015&code=910100#csidx5eb2b0f368f3e3da21b2ca614e48a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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