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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스물여섯, 그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동생의 '책임자'다

 [조기현의 영 케어러 ③] 알코올 의존증 동생을 돌보는 청년형수씨의 이야기

20.10.27 07:07l최종 업데이트 20.10.27 07:07l
'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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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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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 정신이 아득했다. 김형수(가명)씨가 다시 술을 먹겠다고 방을 나서려는 동생을 몸으로 막아선 직후였다. 방 안에 갇힌 동생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친다, 친다" 소리치며 형수씨를 겁줬다. 형수씨의 등 뒤에 서있던 외할머니는 "너한테 술 판 곳 찾아서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주먹이 뻗어 나왔다.

주먹을 날린 후에도 동생은 더 날뛰었다. 형수씨는 아득한 정신을 서둘러 부여잡았다. 그는 항상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 앞에서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책임자'였다. 동생을 눕혀 온 몸으로 짓눌렀다. 평소에는 자신보다 더 힘이 셌지만, 지금은 만취 상태였다. 그렇게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동생이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 부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형수씨가 돌아봤을 때 동생의 손에는 끝이 번뜩이는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눈앞에 거슬리는 무엇이든 찌르려는 듯 형수씨를 노려봤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동생은 이미 여러 번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형수씨를 목표물로 여겼던 적은 처음이었다. 동생 19살, 그가 21살이 된 때였다. 그날 동생은 부엌칼로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때 마음이 아예 떠났어요. 얘랑은 아무 형제 관계도 아니고, 남남이구나 싶었죠."

알코올 의존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가족 돌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에게 아버지를 돌보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을 말했다. 가족 돌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에는 벅차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 방송에서는 힘든 순간을 하나의 질병으로 환원하기를 원한다. 바로 '치매'다. 국가적 관심사이면서, 실제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돌본 10년이란 기간의 전반부는 치매가 아니라 알코올 의존으로 고생했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아버지의 당뇨, 환각, 신부전 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은 마음만 굳건하게 먹으면 해결될 일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알코올로 인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재난은 스스로 감당할 몫이라고 여기게 된다. 

실제로는 스스로 감당하지 않는다. 많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의 알코올 의존 때문에 고생한다. 내가 만나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도 대부분 알코올 의존으로 돌봄의 전조를 감지했다. 질병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은 알코올 의존을 겪는 부모나 형제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집에 있는 술을 버리거나 외출을 제한하기도 하고, 술을 끊을 수 있는 동기를 만들기 위해 마음의 정성도 쏟아본다. 그럼에도 당사자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가 술을 꾸준히 마시면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질병이 터져 나오면,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돌봄을 하게 된다.

지난 10월 15일, 인천 한 카페에서 95년생 김형수씨를 만났다. 형수씨는 알코올 의존이 한 가족에게 어떤 경험을 전해주는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청소년 기관을 통해 그를 소개받았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는 한동안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다만 세상에는 알코올 의존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았다. 알코올 의존은 세상의 관심 밖이었다. 다행히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사회복지사가 그와 나를 연결해줬다.

동생의 첫 번째 책임자

때때로 새벽이면 동생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무시하고 잠들고 싶었지만, 그런 전화를 한 번 받으면 긴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졸음이 달아난다. 그럴 때면 형수씨는 풀어진 정신을 주섬주섬 챙기며 경찰이 알려준 위치로 향했다.

어느 날은 집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빨간 소주 4병을 쌓아두고 쓰러져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나 되는 다른 동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동생은 늘 혼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순순히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부축하려는 형수씨의 손은 뿌리치기 일쑤였다.

"그럼 보호자 분 왔으니까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과 실랑이를 벌이면 옆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늘 하는 말이다. 형수씨도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동생 곁에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새벽녘에 해가 뜰 때면 동생에 대한 형수씨의 기대는 저물었고,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동생은 똑똑했고 체격도 좋았다. 어른들은 형수씨보다 동생을 더 예뻐했다. 그는 내성적이었고 늘 방어적이어서 친구를 사귀기보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게임을 했다. 반면 동생은 늘 사교적이어서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런 동생이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소위 '비행 청소년' 집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는 늘 지니고 다니는 명찰 같은 것이었다. 후배들 돈을 갈취하거나 패싸움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모두 집 밖에서 벌이는 일들이었다. 경찰서나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 날이 아니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영화 파수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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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외갓집에 살았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중학교 때 한 번 보고 만난 적이 없다. 결혼 생활의 생활비로 썼던 비용이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빚으로 남았다. 이혼하고 지금까지, 어머니는 경기도 등지에 있는 공장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형수씨가 같은 집에 살고 밥을 먹고 생활한 사람은 할머니, 외삼촌 둘, 그리고 동생이었다.

할머니는 동생에게 늘 마음을 썼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동생을 할머니가 제어할 수는 없었고, 만취해서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는 걸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큰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 모두 40대 중반을 넘겼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큰 외삼촌도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스스로를 챙길 수도 없는 상태였고, 막내 외삼촌이 투잡을 뛰며 집안의 모든 생계와 부양을 담당했다. 외삼촌들은 매번 사고만 치고 다니는 동생을 곱게 보지 않았다. 

형수씨가 동생이 벌인 일들에 첫 번째 책임자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다. 19살 때부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 듯이 동생이 벌이는 사고를 수습하러 다녔다. 그러다 그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고가 커지면 가족들에게 그 사항을 보고했다. 그럴 때면 무슨 명절처럼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들, 자신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안 마셔볼게" 단 한 번의 다짐 

20살이 된 형수씨는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활동에 열중했다. 사회복지 관련 학과였다.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협업하는 과정이 좋았다. 하지만 저녁 6시가 넘으면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형수야, 미안한데 집에 일찍 들어가서 동생 좀 봐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동생을 돌보지 못하니, 형수씨라도 잘 돌봐주기를 바랐다. 반면 형수씨는 동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학생회 활동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저녁이 돼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 그는 어머니 전화를 받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고, 자신도 동생의 부모였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녁마다 자리를 뜰 때면 아쉬워하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으레 '집에 가는 애'라고 여겼다. 그렇게 이 집에 가면 동생이 술 먹으러 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게 전부였다.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힘드니? 왜 계속 술을 마시니?"

그런 질문에 동생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너무 많은 게 힘들어서 말을 않는 것인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질문이라고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형수씨는 동생의 마음의 문에 노크하듯이 '술 먹지 말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잔소리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삶을 포기한 동생과 동생의 삶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형수씨는 혼자 조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안 마셔볼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생이 그의 잔소리에 응답했다. 시커멓게 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어디 등대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 동생의 의지를 함께 메워줄 사람들을 찾았다. 서둘러 알고 지내던 청소년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집 근처에 있는 사회복지관의 청소년 상담사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동생의 말 한마디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걸까. 동생은 상담사의 전화에 잠수를 탔고, 다시 만취해서 집에 돌아오길 반복했다. 집에서 만취해 있던 큰 외삼촌과 밖에서 만취해 들어온 동생은 마주치면 크게 싸웠다. 외삼촌은 욕을 하면서 동생을 때렸고, 동생은 부엌에서 칼을 뽑아들며 외삼촌에게 욕을 퍼부었다. 기력도 없는 할머니와 형수씨가 외삼촌과 동생을 뜯어 말렸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구멍이 점점 커져서 집안 전체가 꺼질 판이었다.

기대를 거는 순간 상처를 입는다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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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아예 접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애틋한 마음으로 거는 기대가 아니다. 모든 사태가 동생이 의지만 있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에 가까웠다. 기대는 일종의 투자와 비슷하다. 내가 이만큼 기대를 걸면 얼마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마음의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하고 계기를 만들어주면 알코올 의존을 겪는 사람이 도의적으로라도 성의를 보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형수씨의 기대는 번번히 상처로 끝났다. 그는 19살 때부터 8년간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돌보며 온몸으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날 동생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차라리 일이라도 하면 정신을 차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도 만취해서 정신을 잃었다. 동생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은 동생이 잠든 사이 물건들을 싹 다 훔쳐갔다.

분노한 점주는 동생과 친구들을 한데 묶어 특수절도죄로 고소했다. 형수씨는 동생이 감옥에 들어가서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해줬다.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큰 외삼촌과 갈등이 극에 달하자 동생은 집에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 형수씨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디 고시원 방이라도 얻어 혼자 살아보면서 정신을 차릴 기회였다. 어머니에게 얘기해서 간신히 동생이 살 고시원을 구했다.

거기서 동생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병원 응급실에서 동생이 급성 췌장염으로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술만 먹었겠구나 싶었다.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계속 장기가 아프다고 했던 동생의 말도 떠올랐다.  

"의사가 막 다그쳤어요. 췌장염은 가족들이 잘 안 돌봐주면 죽는 거라고. 가족들은 이미 알코올 의존으로 다 지쳐 있는데."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동생이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한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술 뒤에 삶과 가족

"좌절감도 있지만, 동생에 대한 분노도 너무 커요. 얘도 못 바꾸고 내 마음도 어떻게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과연 내가 사회복지 분야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내가 일하다가 동생이랑 비슷한 비행 청소년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지금 대학교 4학년이다. 원래는 사회복지 전공과 청소년 기관 활동 경험을 살려서 청소년 사회복지 쪽으로 걸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내내 동생을 돌보면서 겪은 경험들이 그의 발목을 낚아챈다.

여전히 동생이란 사람을 감당할 수 없고, 마주하는 것도 힘이 부친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리며 경찰서나 병원에 가는 악몽이 시작될 것만 같다. 어쩌면 첫 번째 책임자의 임기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일지도 모른다.

동생은 급성 췌장염을 겪은 이후에도 계속 술을 몸속에 들이부었다. 몸은 만성 췌장염과 당뇨로 악화됐고, 지금은 병원에 입원했다. 몸이 악화되는 걸 계기삼아 그동안 미뤄두었던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는 이미 동생의 뇌가 "술에 절여졌다"고 말했다. 통제력을 아예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동생은 올해 초 퇴원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가 터져서 아직 퇴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형수씨는 초초하다.

10대가 알코올 의존을 겪는다는 사실은 많이 이들에게 낯설 수 있다. 실제로 10대의 알코올 의존 비율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9년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알코올중독 현황' 자료에 따르면, 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2014년 1588명에서 2018년 2106명으로 약 33%나 늘었다.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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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 증가의 원인으로는 청소년이 겪는 과도한 스트레스, 술에 관대한 음주문화, 술을 산 청소년은 처벌 받지 않고 사업주만 처벌받는 구조 등이 언급된다. 술에 대한 교육, 예방, 처벌 등을 강화돼야 청소년 알코올 의존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술은 여러 가지 표현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술을 둘러싼 문화를 점검하는 것과 더불어 술 뒤에 감춰진 삶을 들여다봐야한다. 모든 중독과 의존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삶의 맥락에서 따라가 보지 않으면 중독과 의존은 술이 아니라 또 다른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독과 의존이 벌이는 사고들을 수습하는 가족이 있다. 형수씨는 말했다.

"병원에 가두는 것 말고 알코올 중독자를 케어할 수 있게 돕는 제도가 구체적으로 없어요."

형수씨와 나는 긴 침묵을 나눴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술 뒤에 감춘 삶을 되짚어줄 사회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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