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호석 기자
- 승인 2020.10.0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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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 정세와 조선로동당 창당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출발해 공청(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거쳐 항일유격대로 이어진 조선로동당은 1945년 10월 10일을 창당일로 정하고 있다.
1945년 10월 5일 당 창건을 위한 예비모임을 가진 후 10일 평양에서 열린 창당대회를 통해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날이 '조선로동당 창당일'이다.
조선공산당에서 조선로동당으로
1946년 조선신민당과 합당한 북조선공산당은 8월 28일 당원 35만(신민당 9만) 명의 대표 801명이 참석해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를 갖고 소수당 배려 원칙에 따라 조선신민당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김일성 주석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북로당 결성 이후 북의 권유에 따라 38선 이남에서도 남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신민당의 합당을 추진했다. 당시 3당 합당을 추진하는 과정에 박헌영의 종파 행위가 드러났다.
김일성 주석은 박헌영의 분파행위를 비판하면서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이남 신민당을 책임진 부위원장 백남운과 직접 만나 사업한다. 인민당 여운형과는 비밀회동이 5차례 이루어졌다.
하지만 1946년 11월 박헌영은 3당 안의 자기 파들만으로 남조선로동당 창립대회를 개최하는 등 끊임없이 분열을 조장하자, 여운형은 남로당을 탈당해 근로인민당을 창당한다. 이후 여운형은 미 군정하에서 암살당한다.
남북연석회의와 조선로동당
1948년 들어 미군정은 분단을 획책하는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음모하자, 김일성 주석은 3월 25일 ‘이남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이남 정당, 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하는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한다.
1948년 4월 19일 개막된 남북연석회의는 극우반동을 제외한 남북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을 대표해 참가한 김구 선생과 민족자주연맹 김규식 의장은 4월 30일 북측 김일성 주석, 김두봉 의장과 함께 일명 ‘4김 회동’을 가졌다.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호소문 ‘전 조선동포에게 격함’이 채택되고, 이어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에서는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결정서와 격문 그리고 공동성명에서 조선은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미군과 소련군의 동시 철거를 3,000만 동포의 이름으로 결정했다. 또한 양군이 철거한 후에는 전 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남 단선에 의한 단독정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엄숙히 성명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를 강행했고, 8월 15일 이남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야 말았다.
남북총선거 실시와 조선로동당
조선로동당은 ‘남북연석회의' 결정에 따라 미군정이 강압적으로 실시한 단독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를 결행한다.
1948년 8월 25일 38선 이북 유권자의 99.97%가 참가해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남에서는 선거가 벌어지자 미군정은 비상경계태세를 선포하고 미군 기동부대를 제주도까지 배치했으며, 과거 친일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를 총동원해 검거 선풍을 일으켜 총선거 저지에 나섰다. 이에 이남 유권자들은 비밀리에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남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2,407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렇게 선출된 대표들은 황해남도 해주에 모여 ‘이남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인구 5만 명당 1명 비례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남북총선거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는 남북에서 선거된 572명(남:360, 북:212)의 대의원들이 참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정강을 발표했다.
당대회와 조선로동당
북조선로동당은 1948년 3월 27일 제2차대회를 열었다. 이때 당원수가 70만 명에 달했다.
김일성 주석은 2차 당대회에서 당 세포의 강화, 당 사상사업의 개선, 당의 조직‧사상적 통일의 보장 등 당의 질적 공고화를 위한 과제를 전면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당 간부들이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당정책을 관철하게 함으로써 당과 대중의 혈연적 연계를 강화했다.
조선로동당은 1956년 4월 23일 제3차 당대회, 1961년 9월 11일 제4차 당대회, 1970년 11월 2일 제5차 당대회,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대회, 2016년 5월 6일 제7차 대회에 이어 오는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를 예고했다.
남‧북 조선로동당의 통합
1949년에 들어 남로당에 대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 강화되고 박헌영 일파의 모험주의와 투항주의가 엉켜 남로당은 파멸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1949년 6월 30일 평양에서 남북로동당 중앙위원회 연합전원회의를 열어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을 합당 조선로동당으로 통합하고, 김일성 주석을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조선로동당의 역사는 75년째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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