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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만에 '대한민국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방한한 배안 씨가 21일 카페 '연필1/3'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방한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토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재일동포의 경우 국적을 불문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향 방문을 정상화할 것”이라고 약속한지 4개월여가 흐른 지금,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을까?
1945년 해방 이전 일본에 거주하다 일본에 남게 된 재일동포들은 일본 국적이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경우 기존 조선적(朝鮮籍)을 유지하고 있고, 대체로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밀접한 조선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다.
조선적 재일동포로서 1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배안(60) 씨는 일본으로 돌아갈 비행편 마저 하루 연기하고 21일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만큼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포들이 많이 오고 싶어 한다. 그런데 지금 눈치보고 있다. 와도 괜찮냐? 아무리 문 대통령 시대로 바뀌었다 한들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실제로 조선학교 출신의 배안 씨의 딸이 한국영사관에서 ‘김’ 영사와 면담하며 들은 이야기는 ‘문재인 정부 시대가 맞나’ 귀를 의심할 정도다.
“도쿄에 사는 딸이 11월 초에 여행증명서 신청을 했었는데 11월 20일 (도쿄)영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좀 편하게 이야기 하자”. 이름도 밝히지 않고 “김”이라고 했다고 딸한테 전화가 왔다. 너무 수상하지 않나? 딸이 아무리 30대여도 딸이라서 내가 같이 가겠다고 따라갔다.”
배 씨가 동행한 딸의 한국영사 면담에서 ‘김’ 영사는 “조선적이라고 누구나 다 입국시키라는 말이 아니다”면서 “총련 활동 하거나 친북인 경우, 우리는 그 동포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살림이 바빠서 국적에 신경 쓸 수 없었던 분들, 아예 한국에 갈 필요가 없어서 별로 바꿔야 된다는 의식이 없었던 분들을 이야기한 거다”라고 했다.
더구나 “당신처럼 간부는 쉽게 입국 못 한다”며 배 씨의 인권협과 평통협 활동을 문제삼고, “배 선생님 아버지는 조총련의 간부였다. 아버지가 간부라면 배안 씨도 따님도 간부가 된다. 우린 그렇게 본다”고 말했다.
특히 “앞으로 머지않아 총련이 붕괴돼 나가리라 우리는 보고 있다.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날 수 있다”며 “총련과 조선학교를 떼어놓을 수 없는가? 배 선생은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본다”고 노골적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김’ 영사는 조선적을 유지하겠다는 배 씨의 딸에게 “비현실적이다”며 사실상 한국 국적으로 전환을 압박했다. 배 씨는 “보통 해외로 나가면 거주국 국적을 갖는데, 우리가 일본 국적을 안 가지는 것은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의 국적을 갖기 싫기 때문”이라며 “한국이라는 것은 사우스(south)에 지나지 않지 않나. 사우스 국적을 가지기 싫다. 더군다나 한국의 복지제도를 우리가 적용받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무슨 혜택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남 또는 북의 어느 쪽 국적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통일국적을 갖고 싶다”며 “그게 우리한테 가장 어울린다. 지금 내가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바꿔놔도 뭐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그냥 한국에만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그것 뿐이지 다른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배 씨의 딸은 ‘신원진술서’와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유서’를 제출하고 ‘특별한’ 영사 면담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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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을 위한 모임’은 지난 7월 국민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광화문 1번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적 재일동포의 조건없는 자유왕래를 위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신원진술서는 ‘조총련 경력’ 란이 있고, 기간, 직책, 교육및 상벌관계를 상세히 써야 한다. ‘북한방문 경력’과 ‘북한선박 승선관계’ 란에는 기간과 초청자, 목적을 각각 써넣게 돼 있다. 이 외에도 배우자와 부모, 3촌 이내의 북한 및 해외거주 가족, 친교인물 등을 상세히 기록해야 하고 초청자와 발급신청 이유, 대한민국내 여행일정도 적어내야 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 모임’은 29일 “포용과 존중의 정신으로 동포들을 맞이해야한다”는 제목의 논평을 내 “현 정부가 조선적 재일동포의 입국을 위해 여행증명서 발급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발생했던 신원조회를 이유로 정보제공강요 등 변칙적인 정보수집을 금지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이렇게 어렵게 발급받은 ‘대한민국 여행증명서’도 유효기간 3개월에 단 한 차례 6개월까지 체류할 수 있을 뿐이다. 배 씨는 “여행증명서는 일회용이 아니라 적어도 1년 짜리 복수로 나와야 되고, 좀더 영사관 측에서 재일동포들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또한 “이제까지 못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동포들을 파헤치거나 조직이 이러쿵 저러쿵하면서 흔들기 하거나 그거를 좀 안 해 줬으면 좋겠다”며 “그게 싫어서 한국에 아예 안 들어오는 사람이 많지 않나”라고 짚었다.
나아가 “한국적 소지자와 똑같이 여권을 발급하면 된다”고 제시하고 “북쪽은 한국적이라도 여권을 발급해준다”고 전했다.
배 씨는 “조선학교에 대해서도 건드리지 말라고 써달라”고 각별히 부탁하며 “동포들의 재산이고 민족의 재산이지 않나. 그것을 쉽게 영사관에서, 한국 정부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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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학교 입학응원대’가 지난 4월 가나가와조선초급학교 입학식장에서 신입생들을 환영하고 있다. [사진제공 - 배안] |
배 씨는 가나가와 현의 경우 조선학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원이 잘 진행되고 있다며 “NGO들, 그러니까 보통사람들을 연결시켜 ‘비빔밥 네트’, ‘더불어 투어’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다. ‘조선학교 입학응원대’ 그런 것도 보통사람들이 시작했다”고 자랑했다.
가나가와 현 일본시민들로 조직된 ‘조선학교 입학응원대’는 2003년부터 조선학교 입학식 날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통학로에서 지켜보며 격려하는 것으로 시작돼 올해 14년째 입학식을 함께 하고 있다. [관련기사 보기]
“옛날 총련과 민단이 생겼을 때는 동포들 한사람 한사람이 힘이 없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도 거의 없었다. 지금은 다 혼자 살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이런 피라미드형 조직 안에 묶어두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식으로 거미줄처럼, 평탄한 관계로 이어주면 동포사회가 더 힘을 가지게 되고, 더 펼쳐질 수 있다.”
변화된 일본사회와 재일동포 사회의 추세에 발맞춰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배 씨는 “평소 NGO 활동을 많이 하면서 일본사람들에게 재일동포, 조선학교 상황에 대해서 알릴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꽉막힌 북-일 관계에 대해서는 “그냥 만경봉호 왔다갔다 하기만 하면 많이 변할 거다”며 “우리 동포 1세들이 거의 80,90이 되셨다. 그분들이 아들딸 보고 싶고 손자손녀 보고 싶은데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고 중국 공항을 거쳐가야만 한다. 중국 공항도 불친절하고 보통이 아니다. 그곳을 지나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것은 참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12월 17~19일 광주에서 열린 ‘제7차 한중일 YMCA 평화포럼’에 일본 요코하마YMCA 대표단의 일원으로 11년 만에 방한한 배 씨는 “사실은 촛불 때 오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못 왔다. 시청 앞을 지나가면서도 좀 눈물이 날 듯했다”며 “남자들이 멋있어졌고, 그리고 10년 동안 못 와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좀 밝아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자꾸 와야만 우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줄 수가 있고, 또 다음 과제가 보이고, 또 숙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러지 않나. 안 오면 과제도 안생기고, 문제 해결이 안 되고 그렇지 않나”라며 “내년에는 적어도 두 번 올까 한다”고 말했다.
배안 씨는 21일 오후 1시 30분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에 자리한 몽당연필이 운영하는 카페 ‘연필1/3’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쾌활한 웃음과 아픈 눈물을 내비치기도 했으며, 이 자리에는 배 씨의 여동생과 김명준 몽당연필 사무총장이 함께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영사관에서 서류 작성하고 11년 만에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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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연필1/3’에서 가진 배안 씨와의 인터뷰에는 배 씨의 여동생과 김명준 몽당연필 사무총장이 배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
□ 통일뉴스 : 언제 한국에 왔나?
■ 배안 : 16일 들어 와서 오늘(21일) 저녁에 비행기 타고 간다.
□ 몇 년 만에 방한한 건가?
■ 11년 만에 왔다.
□ 그동안은 안 왔나, 못 왔나?
■ 아예 신청도 안 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못 들어 갈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고, 그럴 필요도 별로 없었다. 개인적으로 해외에 나가서 살아야 일도 있었고, 가족일도 많았다.
□ 이번에 입국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 그냥 요코하마 영사관 가서 신청서만 제출했다. 신원확인서는 가족관계를 다 쓰라고 해서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다 썼다. 그리고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은 이유서를 작성했다. 북으로 갔던 기록도 다 쓰라 하더라. 총련에서 일을 했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직책으로 했는지도 쓰라고 했다. 다 쓰지는 않고 공백으로 남긴 데도 있었다.
□ 이번에 들어온 주요한 일은?
■ 요코하마 YMCA 운영위원으로서 외국인들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이번에 광주에서 YMCA 국제포럼을 하는데 주제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다. 한‧중‧일 YMCA들이 모여서 평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앞으로 각국에서 평화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자는 포럼이었다. 포럼은 17일부터 19일까지 열렸다.
□ 광주 국제포럼 참가는 성과가 있었나?
■ 아주 많았다. 이번에 젊은이들, 새세대들을 내세워주고 새세대들이 기존세대와 같이 평화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가 많은 화제거리가 됐다.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도 평화가 좀 실감이 안 난다. ‘평화가 위태롭다’ 할 적엔 북핵이라든지 미사일이라든지 그런 식으로만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일본에서 평화를 위해서 자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불공정이나 격차, 그런 것을 없애 나가는 게 오히려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기존세대들은 남북이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한국측의 제안에 대해서 ‘일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일본에서 해야 할 일이 뭔가?’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됐다. 굉장히 성과가 많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에게 남북통일은 별로 화제거리가 되지도 않고 고민해 보지도 못하지 않나. 그런 기회가 없으니까. 이번에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잘 간 것 같다.
그리고 5.18국립묘지를 방문하고 기념관도 가보고 영상도 봤다. 일본 사람들은 정말 몰랐다고, 이런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것 자체를. 일본사람들 보기엔 영상이 좀 그렇지 않나 궁금했었다. 묘를 옮기는 장면 다 나오고, 그때 희생된 분들 사진 나오는 것 보니까. 일본인들로 하여금 “어떻게 자기 나라 군대가 자기 국민을 지켜야 되는데 학살하느냐”고.
영사관 ‘김’의 딸 호출에 따라나선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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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안 씨는 자신의 딸이 한국 입국을 위해 한국영사와 면담한 내용을 알리기 위해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인터뷰를 자청한 이유는?
■ 포럼 마치고 바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딸 때문에 일이 생겨서, 이건 좀 이야기해야 싶어 가지고 하루 연장시켰다.
□ 딸의 입국 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 하도 어이가 없어가지고.(웃음) 도쿄에 사는 딸이 11월 초에 여행증명서 신청을 했었는데 11월 20일 (도쿄)영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좀 편하게 이야기 하자”. 이름도 밝히지 않고 “김”이라고 했다고 딸한테 전화가 왔다. 너무 수상하지 않나? 딸이 아무리 30대여도 딸이라서 내가 같이 가겠다고 따라갔다.
그랬더니 우선 들어갈 때 옥신각신 했다. 소지품을 맡기라고 했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직원하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영사님께서 이렇게 하면 일이 진전이 안 된다 하신다”고 해서 “아, 우리 영사 만나는 거야?” 그랬다. 결국 짐을 맡기고 올라갔다.
영사가 “아, 어머님 같이 오셨어요?”, “배안 선생님, 안 그래도 뵙고 싶었어요” 이러는 거다. 그리고 나의 경력,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라.
“문 대통령께서 조선적 동포들도 자유롭게 입국시켜야 한다고 말씀했지 않느냐”고 했더니 “조선적이라고 누구나 다 입국시키라는 말이 아니다”면서 “총련 활동 하거나 친북인 경우, 우리는 그 동포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살림이 바빠서 국적에 신경 쓸 수 없었던 분들, 아예 한국에 갈 필요가 없어서 별로 바꿔야 된다는 의식이 없었던 분들을 이야기한 거다”고 하더라.
그리고는 “당신처럼 간부는 쉽게 입국 못 한다”고 하더라. 그때 나도 허가가 안 나온 상태였다. 나에게 평통협 최신 회의록을 가지고 있다면서 내가 인권협회와 평통협 이사를 하고 있지 않냐고 하더라. 더구나 “배 선생님 아버지는 조총련의 간부였다. 아버지가 간부라면 배안 씨도 따님도 간부가 된다. 우린 그렇게 본다”고 말하더라.
□ 총련 간부의 자녀와 손녀까지 간부로 간주한다는 영사의 발언은 놀랍다. 영사관 측에서 총련 간부로 파악하고 있다는 건가?
■ 그래서 내가 인권협 경우는 국적을 따지지 않고 일본 사람을 포함해서 도와달라는 사람 도와주는 것이다. 평통협은 그냥 통일을 위한 단체이지 않느냐. 나는 정치사상이나 신앙 같은 걸 따져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정치적인 이슈가 있는 통일단체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의 국적을 갖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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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 영사관에서 발급받는 '대한민국 여행증명서'와 일본으로 입국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 발급받는 '재입국 허가서'.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딸도 간부라는데, 영사 면담에서 국적을 바꿔야 된다고 이야기했나?
■ 영사는 조선적으로 있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딸이 아예 한국적을 선택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보통 해외로 나가면 거주국 국적을 갖는데, 우리가 일본 국적을 안 가지는 것은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의 국적을 갖기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것은 사우스(south)에 지나지 않지 않나. 사우스 국적을 가지기 싫다. 더군다나 한국의 복지제도를 우리가 적용받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무슨 혜택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남북의 국적을 갖는 소원을 안고 살고 싶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더니, “비현실적이다”. 우리 딸은 조선적인 채로 해외로 자주 나간다. 스위스로 가고 네델란드도 가고, 미국도 가고. 브라질도 가고 그렇다. 거의 대부분 나라 가는데 유독 한국만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딸이 “한국 안 가도 된다. 굳이 한국 갈 필요도 없고 안 해주면 안 해주는 거지, 권리를 가지고 싶을 뿐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나라도 조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갈 필요는 없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 가기 싫다”고 했다.
나도 남 또는 북의 어느 쪽 국적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통일국적을 갖고 싶다. 그게 우리한테 가장 어울린다. 지금 내가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바꿔놔도 뭐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그냥 한국에만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그것 뿐이지 다른 것은 별로 없다.
□ 결국 영사관에서 발급받은 것이 ‘대한민국 여행증명서’인가?
■ 3개월 짜리다. 3개월 동안 한 번이고, 체류기간은 6개월이다. 3개월 안에 한 번 들어오면 6개월까지 머물 수 있다. 나도 이번에 새로 받았다.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재입국허가서는 6년짜리다.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재입국허가서가 있어야 한다.
□ 딸도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나?
■ 결국은 받았다. 그제 19일 들어왔다.
□ 결과적으로 모녀 모두 3개월짜리 ‘대한민국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에 들어왔는데, 영사와의 면담 과정이 문제였지 이전에 비해 발급 자체가 거부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진전 아닌가?
■ 그렇다. 문재인 정부가 돼서 굉장히 변하기는 변했다. 그런데 변하는 것에 대해서 겁이 나는 것 같다. 정보를 얻어내자고 그런 것 같다. 필요하지도 않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꺼내려고 하고.
“총련과 조선학교를 떼어놓으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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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하마 조선초급학교 수업 모습. 한국 영사는 총련과 조선학교를 떼어놓자고 제안했다. [사진제공 - 배안] |
□ 딸의 영사 면담 과정에서도 그런 게 있었나?
■ 총련과 조선학교를 떼어놓으려 하더라. “앞으로 머지않아 총련이 붕괴돼 나가리라 우리는 보고 있다.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날 수 있다.” “총련과 조선학교를 떼어놓을 수 없는가? 배 선생은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본다.” 이런 식이다.
총련이 어떻게 무너지나? 보통 동포들은 그냥 커뮤니티로만 생각한다. 동포들이 서로 만나고 싶고, 우리 음식을 같이 먹고 싶고, 노래도 부르고 싶고, 춤도 추고, 아이들 공연하는 것도 보고 싶고, 다만 그것 뿐이다.
정치적 의식이 아주 깨어난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냥 동포들은 서로가 만나고 싶고 우리말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가령 우리말과 일본말의 비빔밥이 되더라도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은 서로 동포밖에 없지 않나. 그런 마당을 이야기하는 거다.
총련이라고 특별한 것 없고, 민단 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에 우연히 어떻게 소속이 됐냐 하는 것만 가지고 동포사회를 이해하면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그것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 그래서 “일주일만 조선학교 와보라. 오면 확 변할 거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씩씩 웃기만 하더라.
□ 조선학교를 총련과 떼어놓을 수 있나? 배 선생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가?
■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하하. 그것은 총련이 결정하는 것도 민단이 결정하는 것도 하물며 한국 정부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학교는 동포들의 학교니까 동포들이 결정하는 거지, 우리는 동포들의 의사에 따를 뿐이다. 동포들의 결심에 의해서만 우리학교가 지켜진 거다.
너무 어이없다. 그리고 민족교육을 한다면서 설맞이 공연 같은 경우에 우리 딸도 갔는데 “아버지 원수님, 장군님 하면서 애들이 울고 춤도 추고 그렇게 하는 거 보니까 너무 불쌍하다”고 하더라.
그냥 입을 다물었지만, “너네들은 동포 유학생들이 오면 다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해내고 사형까지 선고하고 그랬잖아. 스스로 조국을 알고 싶다고 들어오는 유학생들을 그렇게 해놓고 그것은 무슨 이유냐?”고.
조국에서 학교 짓는데 보탬이 되라고 학교에 돈도 보내주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재일동포의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그렇게 지원해준 것 사람으로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한국이 그런 것 한 번이나 해줬나?
지금은 교과서 내용을 재일동포들이, 우리학교 선생들이 만들지 않나. 그것을 만들기 위한 필요한 자료와 그 자리를 마련해준 거다. 북에서 쓰는 똑같은 교과서는 일체 안 쓰지 않나.
외국인학교법안이라는 것을 일본 국회에 상정시켜서 우리학교 없애려고 얼마나 날뛰었나. 게다가 한국정부가 압력까지 가하면서 조선학교 없애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님” 할 수 있겠나.
우리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북쪽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걸 모른다. 내가 북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렇게 커피 한잔 사주더라도 감사하는 게 사람인데 그 많은 돈을... 눈물이 나려 한다.
아무튼 보니까 샘이 나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어렵고 악의 축이라고 불리는 나라를 조국이라고 부르는 우리가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지 조국이라고 하지도 않고 그게 좀 샘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동포들이 원래 국적 별로 따지지 않는다. 그냥 ‘너 국적이 뭐니, 그러면 우리 편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안 하지 않나. 특히 아이들 세대는 그렇다. 한 세대가 다르니까. 일본 국적이더라도 그냥 동포는 동포인 거다.
그런 것을 다 하나하나씩 분단시켜 가지고 동포들이 힘을 모으지 못하게 하고 모이지도 못하게 하고, 그게 목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름을 다 댄다. 한국적으로 바꾼 총련 관계 사람들 이름을.
“좀더 영사관 측에서 재일동포들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 3개월짜리 단수 여행증명서를 1년짜리 복수 여행증명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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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안 씨는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조선적 동포에 대한 한국영사관의 자세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정부는 바뀌었지만 실제로 영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나 조선적 동포를 대하는 자세는 별로 변화가 없다는 판단인 것 같다. 그렇지만 여행증명서가 나왔지 않나?
■ 조금 나아진 것 같다. 그렇지만 11년 전에도 더 심하게 당했지만 결국 나왔다. 그런 점에서는 답보인 거다.
□ 정권 교체에 따른 기대감, 더구나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기도 해서 동포사회 분위기나 방문 신청 상황도 바뀌고 있나?
■ 동포들이 많이 오고 싶어 한다. 그런데 지금 눈치보고 있다. 와도 괜찮냐? 아무리 문 대통령 시대로 바뀌었다 한들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소문들이 잠깐잠깐씩 나가지 않나. “신문당했다. 한국적으로 바꾸라고 강요당했다”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가니까 한국을 안 나오려 한다.
□ 실제로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나?
■ 늘어나고 있다.
□ 그들도 딸과 같은 영사 면담과정을 거치나? 아니면 딸이 특수한 경우인가?
■ 특수한 것 같다. 요새 이렇게까지 당한 사람은 별로 없다더라. 내가 이야기를 하니까 놀라더라. 요새는 면담하더라도 쉽게 하고 전화로만 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영사 면담은 일체 없었다.
□ 딸 보다는 사회활동이 훨씬 많은 것으로 아는데 뒤바뀐 것 아닌가?
■ 지역에 따라서는 민단과 총련이 담을 쌓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마당이 많이 있고 그런 이벤트에 영사관에서 사람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사는 가나가와현에도 그런 마당이 있어 영사관에서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조금은 아니까 여행증명서가 쉽게 나왔지 않을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외국인 지원도 하고 한국사람들 많이 도와주고 있다는 걸 아니까.
또 내가 떠들면 시끄럽게 되지 않나. 하하하. 우리 딸 같은 경우는 뭔가 꺼낼 수 있지 않나 꿍꿍이가 좀 있었던 것 같다. (영사 면담에) 내가 같이 안 갔다면 정말 “나 안 가도 돼”하고 끝났을지 모른다.
□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하고 싶은 말은?
■ 여행증명서는 일회용이 아니라 적어도 1년 짜리 복수로 나와야 되고, 좀더 영사관 측에서 재일동포들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 이제까지 못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동포들을 파헤치거나 조직이 이러쿵 저러쿵하면서 흔들기 하거나 그거를 좀 안 해 줬으면 좋겠다. 그게 싫어서 한국에 아예 안 들어오는 사람이 많지 않나.
나아가서는 한국적 소지자와 똑같이 여권을 발급하면 된다. 북쪽은 한국적이라도 여권을 발급해준다.
특히 조선학교에 대해서도 건드리지 말라고 써달라. 동포들의 재산이고 민족의 재산이지 않나. 그것을 쉽게 영사관에서, 한국 정부가 건드리면 안 되는 거다.
□ 돌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행을 권유할 의향이 있나?
■ 할 것이다. 자꾸 와야만 우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줄 수가 있고, 또 다음 과제가 보이고, 또 숙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러지 않나. 안 오면 과제도 안생기고, 문제 해결이 안 되고 그렇지 않나. 내년에는 적어도 두 번 올까 한다.
“만경봉호 왔다갔다 하기만 하면 많이 변할 거다”
새로운 바람, 가나가와현의 ‘비빔밥 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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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빔밥 네트는 2014년 7월 첫 학습회로 박영이 감독을 초청해 영화를 감상하고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진제공 - 배안] |
□ 아베 정부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재무장을 강화하는 추세다. 일본 동포사회나 일본 사회의 기류는 어떤가?
■ 우리 주변에는 아베를 좋아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떻게 저 사람이 정권을 지키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일본이 투표율이 낮다. 20프로대 밖에 안 된다.
좀 진보적인, 보수라고 해도 좀 나은 그런 당에 대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깨지고 깨지고 그런 상황이니까. 확실히 일본사람들이 좀더 나은 정치정당을 바라는 것 같다. 마음은 있지만 일본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잘 못하는 국민이다.
좌파거나 운동권에 있는 분들, 노동운동 하는 분들이 중심이 돼 가지고 조선학교를 지원했었는데 가나가와 현에서는 NGO들, 그러니까 보통사람들을 연결시켜 ‘비빔밥 네트’, ‘더불어 투어’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다. ‘조선학교 입학응원대’ 그런 것도 보통사람들이 시작했다. 정당이나 그게 아니라.
□ 북한과 일본의 관계도 막혀 있다.
■ 북‧일관계는 딴 거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만경봉호 왔다갔다 하기만 하면 많이 변할 거다. 우리 동포 1세들이 거의 80,90이 되셨다. 그분들이 아들딸 보고 싶고 손자손녀 보고 싶은데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고 중국 공항을 거쳐가야만 한다. 중국 공항도 불친절하고 보통이 아니다. 그곳을 지나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것은 참 힘들다.
만경봉호만 왔다갔다 하면, 1세분들 그냥 싣고 들어가 가족방문하고 들어올 수 있다. 또 일본 사람들도 북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일단 어떤 나라인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이웃나라인데 이렇게까지 단절이 돼 있어서 되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많다.
특히 젊은 세대들, 조선학교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일본학교 아이들이 자꾸 왔다갔다 하면서 친근감이 생길 거고, 그리고 신뢰감이 생길 거고, 나아가서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맺을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 재일동포 사회하면 민단과 총련이 먼저 떠오르는데 ‘비빔밥 네트’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런 단체들이 일본에 많이 있나?
■ 옛날 총련과 민단이 생겼을 때는 동포들 한사람 한사람이 힘이 없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도 거의 없었다. 지금은 다 혼자 살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이런 피라미드형 조직 안에 묶어두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식으로 거미줄처럼, 평탄한 관계로 이어주면 동포사회가 더 힘을 가지게 되고, 더 펼쳐질 수 있다.
일본사람들한테 재일동포 사회가 폐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는데, 그런 형식이 바뀌어지면서 일본 사람들과도 더 연대할 수 있고 이해를 깊일 수 있고 생각한다.
비빔밥 네트 같은 경우는 가나가와현이 좀 특수한 지대라서 돼 나가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동포들, 일본사람들한테 이 이야기를 하면 다 놀란다. 왜냐하면 요코하마 중심의 가나가와현에 NGO들이 많고, 괜찮은 NGO들이 아주 연결이 잘 돼 있다.
조선학교 문제도 “조선학교 아이들이 힘들다. 어렵다” 하면, “조선학교가 어렵다 한다. 조선학교 위기에 처해 있다 한다. 우리 뭐 해야 되지 않나” 해서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대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다 퍼져나가는 거다. 평소 NGO 활동을 많이 하면서 일본사람들에게 재일동포, 조선학교 상황에 대해서 알릴 수 있다.
조성금 문제 같은 것도 위기는 기회다. 이렇게 위기에 처하니까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일본사람들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학교에 와서 돈을 주고 간다고 한다. 보통 포럼이나 심포지엄을 하면 30명 정도 모이는데 NGO 네트워크로 조선학교 문제에 관해서 포럼을 하자고 했더니 150명이 모였다. 행사장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촛불 때 오고 싶었다.. 내가 광주에 올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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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19일 제 7차 한중일 YMCA 평화포럼이 광주에서 열렸다. 배안 씨는 일본 YMCA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사진제공 - 배안] |
□ 오랜만에 입국했는데, 소감이나 좀 바뀐 게 있는지?
■ 오랜만에 오니까 너무 좋고, 그동안 통역할 일이 없어서 우리말이 많이 서툴렀는데, 어제 오늘로 감을 좀 잡은 것 같다.
여기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남자들이 멋있어졌고, 그리고 10년 동안 못 와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좀 밝아진 것 같다.
□ 촛불과 정권교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 그런 것 같다. 사실은 촛불 때 오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못 왔다. 시청 앞을 지나가면서도 좀 눈물이 날 듯했다. 역시 우리 민중들이 보통 민중들이 아니고 또 우리 재일 동포들도 보통 동포들이 아니다. 서로가 손을 잡고 좀더 좋은 남북, 코리아, 그리고 동북아시아를 만들기 위해서 재일동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와야 한다.
□ 일본에서 촛불시위를 지켜보았나?
■ 많이 보고 싶었다. JTBC 보고, 오마이뉴스 보고... 아줌마들 떠드는(발언하는) 것이 되게 재미있었다. 얼마나 자리를 같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 배 선생도 왔으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했을 것 같다.
■ 하하하. 나는 평범하다. 뭐하고 싶냐면, 집에 가서 남편한테 밥해주고 싶다. 그냥.
□ 이번 방한에서 불편함은 없었나?
■ 광주에서 어제 올라올 때 비행기를 못 탈 뻔 했다. 탑승 마지막 절차를 밟는데 이거(여행증명서)를 보이니까 안 된다고. 이거는 모른다고. 이거 가지고 못 탄다고 해서 옥신각신했다.
이거 어디서 났냐고 묻길래 영사관에서 내준 거잖냐고, 한국 정부가 내준 건데... 10년도 넘으니까 재일동포들의 여행증명서를 모르는 거다. 익숙하지 않은 거다. 정말 못 탈 뻔했는데 비행기가 연착돼서 30분을 옥신각신하다 간신히 탔다.
난리를 좀 쳤다. 그랬더니 “가세요”. 한국은 난리쳐야 되고 떠들어야 된다. 일본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떠들수록 안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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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YMCA 평화포럼 참가자들은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사진제공 - 배안] |
□ 이번 방문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 5.18 국립묘지를 참배한 것이다. 80년에 조대(재일 조선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5.18이 났다. 5.18이 되자마자 광주에 대해 알리기 위해 우리는 맨날맨날 전단지를 뿌리고 단식투쟁하고 했다. 도쿄 한복판에서 단식투쟁도 하고 데모도 하고...
그때 그걸 했을 때는 ‘내가 이 일을 해가지고 광주에 도움이 되나’ 그렇게 많이 생각했다. 옛날에 광주에 갔을 때도, 이번에도 그 일을 해서 내가 광주에 서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광주에 올 자격이 있었잖느냐 생각이 든다.
광주에 계신 분들한테 그걸 이야기하니까 눈물을 흘리신다. “우리가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외롭지 않았다. 먼 일본에서 우리를 응원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재일동포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모자랐지만 같이 싸운 동포들이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해줬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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