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예산안이 4일 밤 극적으로 타결됐다. 경제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전직 대통령 이명박이 ‘비즈니스 프렌들리’ 한답시고 깎았던 법인세 최고세율을 다시 원상회복(22%→25%)한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가 법인세와 관련된 내용에는 동의하지 못한다는 차원으로 합의문에 유보를 명시한 것은 전혀 아쉽지 않다(원래 그런 자들이다!). 정작 아쉬운 대목은 야당과 협상을 거치면서 최고 법인세율을 적용받는 대상이 과세표준 2000억 원에서 3000억 원으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익 규모가 2000억 원을 넘지만 3000억 원에 못 미치는 기업들은 25%의 법인세율이 아니라 종전처럼 22%의 세율을 적용받는다. 이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매우 훌륭하다. 법인세율 인상(사실은 원상회복이지만)으로 늘어나는 세수만 2조 3000억 원이다. 모두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될 소중한 재원이다.
세수 부담이 늘어나는 기업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과세표준이 3000억 원으로 높아지면서 최고세율을 적용받는 기업도 고작 77개로 한정됐다. 하지만 이번 법인세율 인상이 더 돋보이는 대목은 따로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주요 보수 국가들이 법인세를 내리는 와중에 우리나라만 법인세율을 올리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대목을 두고 보수언론들은 “세계적으로 법인세를 내리는 추세인데 우리만 역행하고 있다”면서 분통을 터뜨리거나 “최고 법인세율 인상으로 기업들이 전부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협박을 늘어놓는다.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
OECD는 왜 조세회피와의 전쟁을 선포했나?
최근 미국 상원이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0%로 인하하는 ‘트럼프 감세안’을 통과시킨 것은 맞다. 일본 정부도 2020년까지 임금인상 및 투자에 협조적인 기업들의 법인세율을 20%까지 낮추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지난 8월 현행 33.3%인 법인세율을 임기가 끝나는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25%까지 낮추겠다고 밝혔다.
이까지 들으면 ‘선진국들은 다 법인세율을 인하하는데 우리만 역행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당연히 든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각 나라가 법인세를 인하하는 이유는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다국적 기업들이 세금 낮은 국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며 강력한 경고를 날렸다. OECD는 “가뜩이나 재정이 부족한 유럽 국가들이 다국적 기업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감세 조치를 펼치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른바 BEPS(Base Erosion & Profit Shifting·세원 잠식과 소득 이전)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글로벌 기업의 배만 불리는 ‘유해한 조세 인하 경쟁(harmful tax competition)’을 즉각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미국이 불을 지피고 프랑스와 일본이 따라하는 감세 정책이야말로 각 나라의 재정을 거덜 내는 치킨 게임이라는 뜻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당장 어느 나라가 법인세율을 낮춘다고 결코 그 나라로 이전하지 않는다. 더 나은 조건(더 낮은 법인세율)을 제시하는 나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유유히 조세피난처를 돌아다닐 것이다.
이미 애플이나 구글, 스타벅스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끊임없이 세율이 낮은 국가를 돌아다니며 세금 쇼핑을 즐겼다. 지금 법인세 인하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는 ‘신의 한수’가 아니라 OECD의 조언처럼 국가 재정만 거덜 내는 ‘유해한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재벌은 결코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
“최고 법인세율 인상으로 기업들이 해외로 다 이전할 것”이라는 협박은 실소마저 자아내게 한다. 일단 그 말이 맞다 치고, 재벌들이 높은 법인세율에 질려서 해외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나라로 갈 건가? 보수 세력의 천조국으로 불리는 미국?
웃기는 이야기다. 트럼프 감세안으로 미국의 최고 법인세율이 20%로 낮아져도 양국의 실효세율은 여전히 비슷한 수준이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미국의 실효세율은 34.9%였다. 반면 한국의 실효세율은 18%에 불과했다. 트럼프 감세로 미국의 최고 법인세율이 크게 하락해도 실효세율은 역전되지 않는다.
그럼 천조국 대신 보수 세력이 좋아하는 일본으로 가볼까? 일본 정부는 2020년까지 임금인상 및 투자에 협조적인 기업들의 법인세율을 20%까지 낮추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그런데 이 방안에 붙은 조건을 잘 봐야 한다. ‘임금인상 및 투자에 협조적인 기업’에게 이런 혜택을 준다는 거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에 가서 임금 인상에 협조적 태도를 보일 자신은 있고?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일본은 전통적으로 평생직장 개념이 강한 나라다. 도요타의 회장은 “실적이 나빠졌으니 노동자들을 해고합시다”라는 임원들의 권고에 “가족을 해고하느니 내가 먼저 죽겠다. 내 배를 갈라라”라고 일갈했다. 그 나라에 가서 한국 재벌들이 ‘임금 인상과 투자 활성화에 협조적인 기업’으로 승인받겠다고? “부디 아서세요”라고 권하고 싶다.
미국이나 일본 외에 다른 나라로 가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도 어불성설이다. 이미 지금도 한국보다 법인세율이 낮은 조세 회피처는 여러 곳 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재벌들은 본사를 그 나라로 이전하지 못했을까?
법인세 몇 푼 아끼겠다고 그 나라로 본사를 이전하면, 장담하는데 한국 재벌들은 대부분 구속된다. 도대체 땡전 한 푼 안 내고 일감 몰아주기로 재산을 10조, 5조로 불리는 일이 가능한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 어디 있단 말인가?
대통령과 짜고 국민연금을 동원해 3세 승계를 구상하는 게 가능한 나라(이재용 씨, 당신 이야기입니다)는 또 어디에 있고? 횡령과 배임으로 전과가 2범이나 되는데, 경제 살린다고 총수를 풀어주는 나라(최태원 씨, 당신 이야기에요)도, 횡령을 했는데 병에 걸렸다고 버텨서 형기의 8분의 1도 안 채우는 나라(이재현 씨, 듣고 있나요?)도 세상에는 없다.
운전기사에게 폭행을 휘두르는 대림산업 이해욱과 현대B&G스틸 정일선, 이륙하는 비행기를 세우는 대한항공의 조현아, 술만 마시면 주먹질을 일삼는 한화그룹 3남 김동선…, 이런 사람들은 해외에서 경영자가 아니라 상습 잡범으로 취급받는다.
장담하는데 한국 재벌들은 결코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 존재 자체가 범죄자가 대부분인 이들은 법인세 몇 푼 아끼겠다고 해외로 튈 배짱조차 없다. 한국은 OECD의 경고를 무시하고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법인세 인하 경쟁을 펼치는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와 입장이 다르다.
그래서 지금이 법인세 인상의 적기였다. 미국, 일본, 프랑스가 재정을 거덜 내면서 별 효과도 없을 법인세 인하 경쟁으로 골골거릴 때, 우리는 적정한 과세를 통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면서 지속가능한 복지국가의 기틀을 닦아야 한다. 최고 법인세율이 인상된 것은 2017년 겨울, 그 어느 나라보다도 대한민국이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훌륭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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