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심포지엄
배선영 기자 daria20120527@catholicnews.co.kr
» 조선말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 군대 모습을 재현해놓은 강화도 역사박물관 전시물
19세기 말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에 가톨릭교회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반성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한 세미나에서 나왔다.
11월 28일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은 ‘제국주의와 동아시아 천주교회’를 주제로 제17차 정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맹제영 신부(의정부교구), 장동훈 신부(인천교구), 한만삼 신부(수원교구)가 차례로 중국, 만주국, 조선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의 침략 당시 가톨릭교회가 한 일을 살폈다.
한만삼 신부는 “19세기 조선의 세도정치와 제국주의의 충돌인 병인양요”를 다뤘다. 그는 19세기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고 짚으며 “제국주의가 지닌 침략의 속성을 교회의 확장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교회를 주도했던 교회사가 있다”고 말했다.
1827년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조선 포교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브뤼기에르 신부가 자원하면서 1831년 조선교회는 베이징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조선대목구가 된다.
한 신부는 당시 교황청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해 보편교회의 일원이 되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교회를 위임함으로써 뒤늦게 동아시아에 진출한 프랑스 제국에게 조선에 다가갈 정치적 명분을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게다가 당시 나폴레옹 3세 황제의 프랑스는 “인간은 원칙적으로 불평등하며, 각자의 지위는 그 가족의 전통과 상속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군주, 귀족, 평민 사이에는 계급적 차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라는 보수적 정치이념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교회를 이끈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즉 “프랑스의 영광과 만민선교를 통한 그리스도교의 확장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한 신부는 당시 조선 교회의 신자들이 불평등과 차별에서 해방되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을 헤아린다면, 이런 정치이념을 가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한 신부는 또한 프랑스군이 선교사 보호를 명분으로 침입한 병인양요(1866)로 인해 미국(신미양요, 1871), 일본(운요호 사건, 1875) 등의 제국주의 침공이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한편, “만주국과 교황청 관계의 실체와 그 결과”를 다룬 장동훈 신부는 교회와 제국주의와 관계를 쉽사리 단정 짓기 어렵다고 봤다.
그는 교황청이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1932-45)을 “법적(de jure)인 인정은 아니지만 사실상의(de facto) 인정”을 하고 가스페를 사실상의 교황사절로 뒀는데, 이는 중국의 반발은 물론 국제연맹 등 국제 흐름과 어긋나지만, 여기에는 과거 일본에서 국가와 갈등하던 가톨릭교회의 경험이 우선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신부는 당시 교황청이 만주국에 대해 취한 태도는 “불가피한 실용주의라 할 수 있다”며, 교황청의 동아시아 선교정책의 핵심은 “교회를 지켜 내면서도 정치적 관계에는 휘말리지 않겠다”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20세기 전반기는 교황청이 과거 수세기 동안 서구 열강의 식민팽창주의의 도구였다는 비판을 극복하고 (국가와 분리하여) 선교의 순수성을 되찾고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의지가 강하던 시기였으며, 현지인으로 이뤄진 지역교회 설립, 식민주의 정책으로부터 선교지의 자주성, 지역문화에 대한 선교적 적응 등이 그 핵심이었다고 지적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의 만행을 재현해놓은 강화도 역사박물관 전시물들
이 시기에 만주국의 왕도의례, 일본의 신사참배, 중국 등의 조상제사 등이 모두 “종교가 아닌 시민 의례”로 인정받았는데, 이러한 결정들은 엄밀한 신학적 성찰의 열매가 아니라 공산주의와 제국주의, 군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뒤엉킨 역사적 상황 속의 정치적 선택에 가깝다는 것이다.
장 신부는 이처럼 만주국에 대한 교회의 태도도 정교분리 원칙을 바탕으로 군국주의 국가권력 앞에서 어떻게든 교회를 유지시키려는 노력이었지만, 도덕적 판단을 제거한 정교분리는 그것 자체로 억압적 체제의 옹호로서 오히려 매우 정치적 입장이 되고 말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당시 지역교회의 설립과 토착화라는 교황청의 의지는 아직 “외형적 형태”로만 이해되었고, 보편을 구체로 구현해야 하는 (일본, 조선, 만주와 같은) 선교현장은 문화와 체제를 혼동했으며, 보편교회는 민족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함 신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내 안에 박근혜적 요소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우리 안에, 사제, 수도자, 특히 원장, 주교에게 공과 사에 대한 구별이 흐릿한 면은 없는지 뼈를 깎으며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박근혜를 키운 것은 성심여중고, 서강대”라며 박근혜의 소녀 때 아름다움을 놓치게 한 게 누구인지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카스트로와 브라질 신부의 대담을 보면 “교회가 자본주의와는 잘 지내는데,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왜 배척하는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며, 이런 것을 깊이 성찰할 때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넘어 하느님나라로 가는 길목이 된다고 말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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