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준위의 이례적인 연말 '전통문'
통일준비위원회 정부측 부위원장인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29일 북측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에게 1월중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나자고 전격 제의했다. 제2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표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측 정부가 통일준비위원회 명의로 고위급 회담을 선제적으로 제안한 모양새다. 통일준비위원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다 이날 기자회견에 정종욱 민간 부위원장 등 위원들이 배석해 무게를 실었다.
류길재 장관은 남측이 이미 전통문을 발송했고, 북측이 수령했으며, 전통문의 발신 명의는 통일준비위원회 정부 측 부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이 통일전선부 김양건 부장 앞으로 보냈다고 확인했다. 류길재 장관 명의의 전통문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공개브리핑 전에 발송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남북대화는 주로 북측이 공세적으로 제기해온데 비해 이번 제안은 남측이 주도적으로 전격 제의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북측은 올해 7월 7일 이례적으로 ‘공화국 정부 성명’ 형식을 취해 인천아시안게임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겠다고 제의했고, 10월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일에 최병서.최룡해.김양건이 전격 남측을 방문,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과 회동했다.
이같은 북측의 공세적 대화제의에도 불구하고 대북 전단 살포 문제 등으로 남북 간 대화분위기는 조성되지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될 상황에서 이번 통준위의 전격 대화 제의가 나왔다는 점에서 일단 남측의 ‘대화 의지’가 돋보인다. 류길재 장관은 “내년 광복 70주년, 분단 70년이 되는 해가 적어도 이 분단시대를 우리가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남북이 공동으로 노력을 기울여야만 되는 그런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강조했다.
고위당국자.류길재 장관, 사전 분위기 띄워 남북, ‘대화 수요’는 양측 모두 존재
이번 통준위의 제안은 기자들도 낌새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전격적으로 나왔지만 정부의 미세한 기류변화는 꾸준히 감지돼 왔다. 고위당국자가 이달 5일 제주도에서 5.24조치 해제를 비롯한 남북관계 현안들을 북측과 포괄적으로 협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운을 뗀데 이어 류길재 장관이 이달 11일 미국에서 대북 압박차원의 한.미공조를 보완해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단 제2차 고위급회담이 표류 중인 상황에서 통일준비위원회 명의로 새로운 고위급 회담을 제안함에 따라 공은 북측으로 넘어가게 됐다. 문제는 북측이 통일준비위원회에 대해 그간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온 것. 정종욱 통준위 부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준위의 활동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지 않나하는 생각도 한다”며 “북한의 통준위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부정이나 긍정이나 이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단계는 아니”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은 남측이 제안한 틀을 조금 바꾸어 북측이 대화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 모두 남북대화와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 즉 ‘대화 수요’가 있다는 진단 때문이다. 남측은 현 정부 들어 제대로 남북관계를 풀어가지 못한데다 내부적으로 정치.경제적 악재들을 뚫고 나갈만한 호재가 별로 없는 상황이고, 북측은 국제적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추진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
6대 추진방안, 박근혜 정부 입맛대로 광복 70주년 남북 축구대회, 평화문화예술제는 가능성 높아
통준위는 이날 대북 대화 제의와는 별도로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에 통일준비위원회는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추진방안을 아래와 같이 구체화해 나가고자 한다”며 6가지 추진방안을 제시했다.
△언어.민족유산 보존사업, 스포츠 교류등 민간교류 확대(광복 70주년 기념 남북축구대회, 평화문화예술제, 세계평화회 개최)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 근원적 해결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 착수 △보건.영양개선사업 및 생활.인프라 개선 등 개발협력 추진, 산림 녹화, 생태, 환경 보전, 수자원 공동 이용 등 융합적 사업 확대 △통일시대 대비 법률과 제반제도 준비 △나진-하산 사업 같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경제협력사업의 추진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북측의 관심사인 ‘5.24 조치’ 해제나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경협 재개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남측, 그것도 박근혜 정부의 관심사안만 잔뜩 늘어놓은 셈이다. 서해평화협력지대나 남북철도.도로 연결사업 같은 주요 사업들은 온데 간데 없고 DMZ 평화공원, 나진-하산 물류사업 같은 기존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사업들만 나열된 것이다. 류 장관은 “어떤 특정한 의제를 가지고 나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고, 그러나 남북 간에 서로 간에 관심이 있는 그런 사항들은 다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비켜갔다.
북측이 남측의 대화제의를 수용할 경우 대화 의제를 더 폭넓게 하자고 제안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다만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남북 축구대회, △평화문화예술제, △세계평화회의 등을 개최하자는 제안은 세계평화회의를 제외하고는 북측도 호응해 나설 가능성이 높은 사안들이다. 어쨌든 남북대화의 장이 서면 5.24조치 해제 문제를 비롯해 폭넓은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북 단장, 김양건 통전부장 나올까? 회담 틀 내에서 조율 위한 별도회담 병행해야
당장 떠오르는 난제들도 있다. 북측이 대화 파트너로 누구를 선정하느냐부터가 문제다. 류길재 통준위 부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 명의로 이날 오전 발송한 전통문의 수신자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장이다. 김양건 통전부장은 명실상부한 대남사업 총책으로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에도 유일하게 김정일 국방위원장 옆자리에 배석했다. 김양건 부장이 나올 경우 남측은 내심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북측이 김양건 부장이 아닌 제3의 인물을 단장으로 내보낼 경우 ‘격’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김양건 부장을 제외하면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급이 나서게 될 것이고, 고위급 회담 단장인 원동연 제1부부장 등이 유력하지만 그동안 일선에 잘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김령성 전 장관급회담 단장 등도 꼽아볼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낙점을 받은 단장이 회담에 임할 것이라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막상 남북이 마주앉아서 회담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의 문제다. 박근혜 정부 들어 물밑접촉이나 비밀회담을 지양해온 탓에 갑자기 마주앉은 공식회담이 지리멸렬한 명분싸움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회담 도중 남측 수석대표가 교체되는 황당한 ‘사건’까지 발생한 적이 있다. 따라서 회담의 틀 내에서나마 사전회담이나 차석급회담 등을 병행하는 창조적 회담 운영 방식이 절실한 상황이다. 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는 지도부를 의식한 명분싸움의 장이 아니라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의 장이라는 평범한 사실이 현실화될 수 있어야 한다.
통일부 관계자는 “통일부 장관의 대화의지는 확고하다”고 강조했지만 지금까지 현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대통령의 대화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올해 ‘통일대박’만 외치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에는 뭔가 남북관계에서 결실을 거두기 위해 대화에 힘을 실어주느냐가 관건이 되는 셈이다. 다른 한 당국자는 “대통령의 남북대화 의지는 강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지만 자기중심적 대화의지가 상대와 공존하는 대화의지로 바뀌지 않는 한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북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1일자 신년사의 방향과 이후 북측의 대응을 지켜봐야겠지만, 기왕 선제적 대화제의를 내놓은 남측도 좀더 현실적인 대화의지를 지속적으로 내놓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손뼉은 마주쳐야 하고, 흐르는 시간 속에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남북 모두에게 더욱 절실한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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