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석 상임고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권력 관계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라는 조직 속에서 누군가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 당한다는 큰 정치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학교 직장 교회 친구 가족 간에도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부부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니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겠지만, 옛날 ‘가부장’ 시절에 집안에서 폭군처럼 군림하던 남편들이 나이들어 엄처시하에 공처가로 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부부 사이에도 일정한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는 제 추론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아빠와 자식 간에도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고 믿습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거나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들도 부자지간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미묘한 긴장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든 들끓을 태세가 되어 있는 을
흔히 권력 관계를 갑-을 관계라고 표현합니다. 두 사람 간 관계에서 좀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쪽이 갑, 그렇지 않은 쪽이 을이 됩니다. 권력은 무한대로 확장하려는 속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민주사회에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갑의 권력 행사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설 경우 을의 불복종 혹은 저항을 부릅니다. 그 저항의 과정과 결론이 인기 TV드라마의 단골 주제로 등장하곤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억울한 을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갑에 대한 그 용감하고도 통쾌한 저항과 극복의 서사에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드라마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내가 비록 을로 살아도 갑질은 안 당하겠다”는 소망이 있는 겁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그게 잘 되진 않겠지만요.
그러므로 갑은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자신의 권력에 허용된 권한 행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를 넘지 않도록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설 때 그는 바로 ‘갑질마왕’이 되어 눈앞의 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잠재적 을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갑-을 관계라는 것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똑같은 갑질 상황인데도 누가 갑이고 을이냐에 따라, 그리고 그 상황이 언제 어디에서 벌어졌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건을 사는 고객이 갑이고, 팔아야 하는 쪽이 을이라고 간주하지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귀한 골동품을 들고 나온 사람과 그것을 사고 싶어하는 갑부들이 많을 경우에는 갑-을 입장이 뒤바뀔 겁니다. 옛날에는 내가 너무 궁박했기 때문에 갑질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게 바로 갑질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뒤늦게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마’ ‘이 자식아’ 하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친근함의 표시로, 누군가에게는 욕설로 들리겠지요.
상황과 환경, 사람과 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갑질
누구든 조직의 리더라면 그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고 싶어 합니다. 이때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가급적 훌륭한 직원들로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보적 리더십 이론에 따르면, 구성원들의 능력이 균일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 통일도 잘 이루어지지 않은 조직에는 전제형 리더십이,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고 자기 할 일을 잘 알아서 하는 조직은 민주형 심지어는 자유방임형 리더십이 적합하다고 합니다. 어느 경우든 리더가 무능하고 게으르고 지시를 잘 안 따르고 숨어서 딴 짓하는 직원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조직 구성원 상위 20%가 조직이 해야 할 일 80%를 한다는 ‘파레토의 법칙’도 있지만, 유능한 리더라면, 전제형이 됐든 자유방임형이 됐든, 더 좋은 인재들을 찾아 조직을 유능하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권위주의적 조직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전제형 리더의 언행이나 지시가 민주적 조직에서는 심각한 갑질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면 갑질 아니었던 것이 갑질로 둔갑해 시비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리더한테 인정 받고 싶었을 때에는 나한테 심부름이라도 좀 시켜줬으면 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바로 갑질이었구나 하는 억울함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강선우 의원을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에서 낙마시킨 ‘갑질 논란’이 을(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도덕심 혹은 정의감의 발로가 아니라, 어떤 이들의 지극히 사적 나아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채택된 수단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3년 내내 윤석열 일당의 처절한 갑질에 당할 만큼 당하고, 지난한 빛의 혁명을 거쳐 간신히 민주정부를 세운 민주진보개혁 시민들은 이 ‘갑질 논란’ 아닌 ‘갑질 소동’에 극도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혹시나 자신의 도덕심 혹은 정의감이, 개인의 원한을 갚으려 사실을 왜곡하고 침소봉대하는 특정인(세력)에게 이용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재명 정부의 인사에 상처를 주고 길들이려는 악랄한 의도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책을 두고 부딪혔던 장관과 국회의원의 갈등이었는데도, 나이 어린 새까만 후배(학교와 여성 정치계)가 바락바락 대들었던 괘씸한 기억으로 남았다가 ‘갑질’로 되살아난 것은 아닌지도 말입니다.
민주진영이 성찰을 넘어 반드시 극복해야 할 ‘3인성호’
‘3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자성어입니다. 나는 강선우 의원의 ‘갑질 논란’이야말로 아주 적절한 ‘3인성호’의 예라고 주장하는 바이며, 그 3인이란 (국힘당) 국회의원, (진보매체 포함) 언론, 보좌관(집단) 혹은 전직 여성 장관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강 의원에 대해 일으킨 ‘3인성갑질’은 과도했을 뿐 아니라 악의적이었다고 봅니다.
강선우 의원은 장관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하면서 “앞으로 성찰하며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접한 정보(팩트)로는 강 의원이 이토록 비난 받아 마땅한 갑질, 더더구나 장관 후보직을 사퇴해야 할 만한 갑질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확신하지만, 혹시라도 강 의원의 마음 한켠에 그런 자의식이 있다면 얼마든지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개인에 대한 성찰을 넘어, 왜 이런 갑질 논란이 삐져나오고, 부화뇌동하고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확대되었는지, 그 과정도 철저히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여 앞으로 더 큰 정치인으로 발전하길 빕니다. 국민주권정부 역시 그러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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