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칼럼] 올해의 단어, 올해의 인물
- 송기원 언론인
- 입력 2022.12.09 08:45
- 수정 2022.12.09 08:47
올해의 단어로 ‘고블린 모드’가 선정됐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단어다. 고블린은 잉글랜드 신화에 나오는 추한 난쟁이 모습을 한 심술궂은 정령이다. 어린이와 말을 좋아하고 어린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알려져 우는 아이들을 재울 때 ‘고블린이 잡아 먹으러 왔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단다. 판타지 속에서도 고블린은 악역으로 등장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공주의 귀가를 방해하는 괴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도깨비’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런 ‘고블린’에 ‘모드’를 붙여 새로운 군상을 칭하는 신조어가 나왔다.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며 뻔뻔하고 제멋대로 구는 태도,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일컫는다. 옥스퍼드 사전은 코로나 방역 규제가 완화된 뒤에도 일상으로 복귀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주로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새벽 2시에 일어나 긴 티셔츠 만 입고 주방으로 가 이상한 간식을 만드는 모습’이라고 사례를 들었다.
‘고블린 모드’라는 말이 생긴 것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단어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올해 초부터다. 개성이 강한 영화배우 줄리아 폭스가 전 남자친구인 가수 칸예 웨스트와 헤어진 것은 그녀의 ‘고블린 모드’를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라고 밝힌 한 트위터 사용자의 언급에서 비롯됐다. 줄리아 폭스는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를테면 ‘가짜 뉴스’에서 나온 용어가 올해 신조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를 온라인 투표로 결정했다. ‘고블린 모드’는 ‘#아이 스탠드 위드’. ‘메타버스’와 경합한 끝에 90%가 넘는 지지를 받아 선정됐다. ‘#아이 스탠드 위드’는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됐다. 메타버스는 가상공간 속의 세상을 의미한다. 올해의 단어 후보군을 보면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올해의 단어를 옥스퍼드 사전만 선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출판사 메리엄 웹스터는 검색 건수를 토대로 ‘가스 라이팅’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정신적 폭력과 지배를 뜻하는 부정적인 단어다. 영국 콜린스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퍼머시스(Permacrisis)를 선정했다. ‘영구적’이라는 형용사와 ‘위기’라는 명사를 합성해 ‘영구적 위기’를 뜻하는 신조어이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정치적 불안정을 견디며 살아가는 감정을 표현”했다고 주최 측은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올해의 단어 뿐 아니라 올해의 인물도 선정됐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정신’을 꼽았다. ‘타임’ 표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얼굴과 이름 모를 병사. 종군 기자. 의료인 등의 모습을 실었다. 편집장은 “용기도 두려움만큼 널리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키이우를 떠나지 않고 남아서 지지를 결집하기로 한 젤렌스키의 결정은 운명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선택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서방 국가들의 탈출 제의를 거부하고 수도에 남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거의 매일 공개 연설로 국민과 군의 사기를 북돋았고 서방의 지원을 호소했다. 유엔 총회, 서방 국가의 국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등 행사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그는 화상 연설에 나서 우크라이나의 아픔을 전했다. 우리 국회 연설을 통해 무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의 대대적인 지원,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선 우크라이나인의 행동은 그런 노력과 내부 결속의 산물이었다.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더욱 핵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본토가 공격받았다며 ”핵무기를 방어 수단이자 잠재적 반격 수단으로 간주 한다”고 말했다. 핵전쟁의 우려가 전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올해의 단어, 올해의 인물 선정 과정을 지켜보며 시대의 코드를 읽는다. 전쟁, 팬데믹, 인플레이션, 정신적·정치적 위기의 장기화 등으로 압축해 볼 수 있겠다. 한 해가 가고 있다. 새해 달력을 펼쳐 보며 희망을 적어 넣는다. 내년에는 좀 더 밝은 세상이 오기를 기대한다.
송기원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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