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국무회의에서 발현된 대통령의 '감정'에 관해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2.12.02. 21:27:28 최종수정 2022.12.02. 23:10:10
"법을 제대로 안 지키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줘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 대통령실발(發)로 언론을 장식했다. 이건 대통령의 언어가 아니다. 공직자의 언어는 더더욱 아니다. 대통령의 '고통' 언급에 대한 진지한 지적이 없다는 걸 느끼면서 이 글을 쓴다.
체사레 베카리아(1738~1794)는 근대 형사법의 근간을 놓은 인물이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고취한 낭만주의의 부상을 앞둔 1764년 그가 발표한 <범죄와 형벌>은 응보주의를 벗어나 "형벌의 목적은 예방"이란 새로운 처벌의 원칙을 제시한다. 재판이 곧 유죄를 의미하던 시절, 형벌을 통해 고통을 주는 게 목적 그 자체였던 암흑 시절을 뚫고 한 줄기 새벽 빛이 나타난 것이다.
과거 형벌은 곧 고통이었다. 저 멀리 함무라비 법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의적 재판은 죄를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고, 성난 군중들은 죄의 무게만큼 잔인한 폭력을 원했다. 고통이 클수록 형벌의 효능감도 컸다고 여겨졌다. 그때까지 형벌은 나쁜 놈을 사회에서 (때로는 생명을 빼앗아 완벽히) 이격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형벌은 '범죄 예방'의 목적으로 바뀐다. 이건 법률가 출신인 윤 대통령이나 한 장관이 더 잘 알 것이다.
윤 대통령이 "법을 제대로 안 지키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말을 한 배경에는 한 장관의 도곡동 자택을 찾아간 유튜브 매체 '더탐사'가 있다. '더탐사'가 한 장관의 자택을 찾아 취재를 한 것은 27일, 한 장관은 다음날인 28일 취재진 5명을 보복 범죄, 공동주거침입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면서 "더탐사 같은 곳이 정치 깡패들이 했던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물론 잘못한 쪽은 '더탐사'다. 취재진은 한 장관의 집에 찾아 간 이유를 영상에서 설명했는데 "강제 수사권은 없지만, 경찰 수사관들이 기습적으로 압수수색한 기자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를 한 장관도 공감해보라는 차원에서 취재해볼까 한다"고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압수수색에 대해 '당신도 당해보라'는 것은 전근대적 동해보복(同害報復)을 사적으로 실행한 데 불과하다. 이들의 행위가 특정인의 사적 공간 침해도 불사했다는 것에서 정당화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법이 정하는대로 하면 될 일이다. 이미 한 장관의 고발이 이뤄졌지 않은가. 그런데 윤 대통령은 한 장관의 고발 다음날인 29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법을 제대로 안 지키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한마디를 더 얹는다.0
국무회의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용한 법의 집행을 논하는 자리다. 대통령의 말은 국무위원에게 명령이 된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이 현직 법무부장관에게 "고통"을 주라고 명령한 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탐사'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한 장관의 고발 조치가 이뤄졌다. 법무부장관이 앉아 있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굳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주라고 따로 명령할 이유가 없다.
기본적으로 과거든 현대든 형벌의 효과는 '고통'으로 나타나긴 한다. 때리고 죽이는 형벌은 없어졌지만, 거주 이전의 의지를 박탈하거나, 금전적 자유를 제약하거나, 노역을 위해 신체의 활동을 강제하는 것은 모두 고통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통'은 추상적인 언어고 법의 언어가 아니다. 만약 어떤 검사가 '피의자의 범행에 대해 고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면 아마 세상이 뒤집혔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 고통은 어떤 고통이어야 하는가. 어느 정도 크기의 고통을 줘야 한다는 말인가. 고통의 크기는 누가 정하는가. 빵을 훔친 도둑에게 10대의 매를 때려 주는 고통은 적당한 것인가? 1만원을 추징하는 게 적절한 고통인가, 1억 원을 추징하는 게 적절한 고통인가. 감옥 한살 살이가 적정 고통인가, 1년 살이가 적정 고통인가. 대체 어떻게 고통을 주어야 하는 것인가. 고통은 자의적이고 감성적인 말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언급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결국 대통령의 '사적 감정'같은 게 국무회의를 배회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사적 언어(때론 막말)를 공적인 공간에서 구사하다가 포착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건은 다르다. 대통령실, 혹은 여권고위관계자의 말을 빌려 국무회의 때 비공개 발언이 언론에 뿌려졌다. 사실상 공개 발언과 다름없는데, 이건 통치 행위 같은 게 아니다. 대통령이 분노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행위일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화가 나 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보여진다. MBC 전용기 탑승 배제 사태에서도 사감이 어른거린다. "MBC는 자산이 많은 부자 회사이니 자사 취재진이 편안하게 민항기를 통해 순방 다녀오도록 잘 지원할 것으로 믿는다"는 여권 인사의 조롱이 이어졌다. 취재를 막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는 꾸지람이다. 4박 5일 대통령 일정을 민항기로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대통령실이든 여권 인사든 모르는 게 아닐터다. 출입 금지나 취재 배제도 아닌, '전용기 탑승 배제'라는 꼼수를 사용한 것은 MBC 취재진을 법적 제한을 가한 것이 아니고 그저 '고통'을 주려는 것처럼 비친다.
대통령실이 장경태 민주당 의원을 김건희 여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한 것도 일상적이지 않은 대응이다.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를 주장하는 화물연대 파업을 두고는 '안전운임제'를 폐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부가 대안을 제시하고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판을 깨버리겠다는 말로 들린다. 안전운임제가 문제라면 아예 없애버리는 것인데, 화물 노동자들에게 더한 고통을 얹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의 언어가 점점 사인의 언어가 되어감을 느낀다. 법 집행을 논하는 자리에서 '고통'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근원을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은 왜, 무엇때문에,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대통령의 언어를 전근대 수준으로 돌려서야 되겠는가?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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