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울산을 ‘노동운동의 메카(성지)', ‘진보 1번지’로 부른다. 오늘날 그러한 울산이 있기까지 많은 이들이 민둥산에 나무를 심고 거름을 주었다. 꽃과 열매가 맺히기까지 비바람도 적지 않았다. 이 과정을 함께 걸었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예외 없이 키가 큰 ‘노쌤’(노옥희 교육감)이 언덕처럼 서 있다. 울산 운동이 뿌리를 내린 곳, 바로 노옥희라는 ‘큰 산’임을 실감하게 된다.
노쌤, 울산 노동운동의 뿌리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울산은 노동운동의 메카가 되었다. 민주노조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덕분이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아는)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어도 노조를 만들 수 있을 텐데”라던 전태일 열사의 바람이 17년 만에 울산에서 이뤄진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그 대학생 친구가 바로 노쌤이었다.
노쌤은 1979년 울산 동구 소재 현대공고 수학 교사로 부임한다. ‘교육민주화선언’ 참여로 1986년 해직된 노쌤은 공장에 취직한 제자들을 위해 ‘울사협’에서 노동상담에 열중한다. 이듬해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앞다투어 민주노조를 결성한다.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 현대중전기,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태광, 동양나일론(효성) 등 석유화학공단에 이르기까지 ‘울사협’을 통해 크고 작은 노조를 결성한다. 대부분의 노조설립 상담은 노쌤의 몫이 된다.
당시 울사협을 만들어 해직된 노쌤을 노동상담소 간사로 맡긴 이상희 이사장은 “말 그대로 위인설관(어떤 사람을 채용하기 위하여 일부러 벼슬자리를 마련함). 사실 재정 형편이 어려운 조건에서 노쌤 채용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터지자 노쌤은 울산지역 노조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라고 회고한다.
‘신의 한 수’란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하지만 노쌤은 외부에서 노조결성을 도왔다는 이유로 ‘3자 개입 금지법’에 걸려 고초를 겪는다.
노쌤, 전교조의 산파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울산에서도 정익화, 최미순, 한강범 등 21명의 교사가 전교조 탈퇴서를 쓰지 않아 해직된다. 갈 곳 없던 이들 해직 교사는 ‘울사협’ 사무실에 곁방 신세를 진다. 3년 전 해직돼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이미 노동운동가로 성장한 노쌤을 만난다.
당시 24살의 나이로 해직된 최미순 교장은 그 시절 노쌤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엄청난 분이라고 들었는데 회의를 주재할 때 늘 다른 사람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했다. 언성 한 번 높이는 법이 없고, 절대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어린 저에게까지 꼬박꼬박 말을 높였다.
한번은 출근 버스에 올라 말로 전교조 결성을 알리기로 했다. 토큰 2개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저에게 살짝 다가온 노쌤이 어떤어떤 버스를 타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노동자들이 탈 테니 한번 용기를 내 보라고 일러주었다. 그 덕분에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노쌤은 당시 울산 노동운동 판을 손바닥 보듯 알고 계셨다.
노쌤은 또 손이 엄청 빠르다. 학습모임을 위해 노쌤 집에 간 일이 있는데, 순식간에 집을 정돈하더니 금방 밥을 지어왔다. 그때 먹은 쌈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단한 노동운동가인 줄만 알았는데 요리도 너무 잘하고, 살림도 정말 잘하신다.
노쌤은 늘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 챙기기 바빴다. 해직 후 후원금으로 몇 년은 버텼지만, 그것도 바닥나 활동비 10만 원도 채 못 가져갔다. 결혼 후 아이까지 있는 노쌤은 남편이 해고까지 당했다. 하지만 노쌤은 한 번도 어려운 티를 낸 적 없다. 이런 노쌤이 있었기에 우리 21명의 해직 교사는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서로를 위하며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울산의 모든 운동은 해직 교사들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울산에서 활동했던 필자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노태우 퇴진 투쟁, 3당합당 민자당 해체 투쟁 등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울산에도 민주화 운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때 뿌려진 민들레 씨앗이 지금 울산에 울창한 진보의 숲이 되었다. 그 중심에 노쌤이 있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노쌤, 선생님의 선생님
1994년 이들 해직 교사는 모두 복직했다. 하지만 노쌤은 이번에도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86년 노쌤과 같이 해직됐다가 혼자 복직한 정익화 선생님은 그때 못한 묻어둔 이야기를 꺼냈다.
“노쌤 복직 안 시켜주면 나도 복직하지 않겠다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라고 되뇌는 정익화 선생님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정익화 선생님의 복직 소식을 들은 노쌤은 “나는 괜찮다”고, “선생님이 복직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정년 퇴임한 정익화 선생님은 “노쌤은 감히 범접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사람”이라며 “선생님들의 선생님”이라고 했다.
문명숙 전교조 울산 지부장도 노쌤은 자신의 선생님이란다. 1997년 첫 부임했을 때 전교조 울산지부장으로 나타난 노쌤을 떠올렸다.
“체육관 같은 곳에 신입 교사들이 모여 있는데, 키 큰 여선생님이 나타났다. 뒤에 네댓 명의 남선생님들과 함께. 보는 순간 반했다. 너무 멋져서. 누군지는 옆에서 소곤거리던 장학사들에게서 들었다. ‘누고? 전교조 지부장 아이가. 여자가 지부장이라고?’ 노쌤은 그때부터 나의 영원한 선생님이 되었다.”
노쌤, 급훈 같은 분
취재 과정에 공통질문이 있었다. “나에게 노쌤은 000이다”
‘000’이라고 답한 이유를 듣다보면, 노쌤은 국민학교 교실 칠판 위 액자 속 ‘급훈’ 같은 사람이었다.
“솔선수범, 책임감, 진실한 사람, 늘 한결같은 분, 성실 그 자체, 완벽한 일 처리, 멈추지 않고 꾸준히, 헌신, 믿음…”
노쌤에 대한 인상은 33년을 부부로 함께 산 천창수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창수 선생님은 노쌤이 이렇게 갑자기 떠나지 않았다면, 한마디라도 남길 수 있었다면 어떤 말을 하겠냐는 질문에 “당신 같이 좋은 사람 만나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했고, 노쌤의 딸 천진주 씨는 “엄마 너무 잘 살았고, 우리 엄마 해줘서 고마워”라고 마지막 말을 전하겠다고 했다.
천창수 선생님이 노쌤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 천창수 선생님도 궁금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어진 인터뷰에 동행했다.
“언제 어디서든 노쌤 주변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까요? 사람을 끄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특집 노옥희’ 2편 ‘노쌤과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들’ 편에서 밝혀진다.
나에게 노쌤은 ‘늘 따라 배울 본(보기)’ (다전초 교장 최미순)
나에게 노쌤은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사람’ (퇴직 교사 정익화)
나에게 노쌤은 ‘친정 엄마’ (더불어숲 이귀연 대표)
나에게 노쌤은 ‘영원한 언니’ (울산환경운동연합 대표 이현숙)
나에게 노쌤은 ‘언제나 저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 (울산사회연구원 이사장 이상희)
나에게 노쌤은 ‘나의 늘 푸른 나무’ (상북중 학부모 김재은)
나에게 노쌤은 ‘너무너무 좋아 죽겠는 사람’ (전교조 울산지부장 문명숙)
나에게 노쌤은 ‘전신 거울’ (전교조 울산지부 사무처장 방정현)
나에게 노쌤은 ‘그냥 저의 일부, 제 정체성과 삶의 한 부분’ (교육감 비서실장 조용식)
나에게 노쌤은 ‘내 안의 나를 발견하게 해 준 사람’ (교육감 소통비서관 황혜주)
나에게 노쌤은 ‘영원한 나의 선생님’ (교육감 전 수행비서 나연정)
나에게 노쌤은 ‘존경하고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 (딸 천진주)
나에게 노쌤은 ‘같은 길을 걸으며 늘 믿고 의지한 사람’ (배우자 천창수)
강호석 기자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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