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김현정·유진영·현슬기·이성지 씨
한예섭 기자 | 기사입력 2022.05.26. 08:24:38
"메갈", "페미"라고 욕먹던 '걔네'들이 선거에 나왔다. 어설픈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다가오는 6.1지방선거에 충청북도 청주시 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소속 후보 3인의 이야기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청주시 내 페미니즘 모임,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가 이들의 원 소속이다.
지역사회 곳곳 각자의 자리에서 페미니즘 활동을 이어오던 청주시의 청년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지난해 '걔네'에서 만났고, 이곳에서 "청년 여성을 떼거지로 선거에 내보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등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백레시 이슈에 대해 "지역의 여성들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였다. "대한민국 정치판에 청년 여성이 없다"는 게 문제의 근본원인으로 지목됐다. 정치의 구조 자체가 그러하니 여성 정치인이 갑자기 대거 등장하는 일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은 "우리가 선례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지난 4월, 총 7명의 청년·여성·페미니스트들이 나서 지방선거 예비 후보 운동에 돌입했다. 공당의 핵심 관계자가 "페미니즘은 반 헌법적 이념"이라 외치는 세상에 "페미니즘이 당당한 청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별다른 언론홍보도 없이 시작한 연대 응원 서명엔 하루만에 165명의 지지자들이 모였다. 온라인 지지자들의 길고 꼼꼼한 응원의 메시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오프라인에선 한 20대 여성이 "청주에 이런 게 있는지 몰랐다"며 감격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시의원 후보의 등장이 "누군가에게 그만큼 절실했다는 증거였다."
처음 나선 7명의 예비 후보 중 김현정, 현슬기 무소속 후보와 유진영 노동당 후보가 본 선거에 출마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본격화된 지금, 이들의 선거운동은 조금 특별하다. 욕을 퍼붓는 이에게 명함을 건네고 "표에 도움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투자한다. 활동 하나하나가 "선관위조차 처음 겪어보는 일"인 탓에 각 활동마다 선거법 공부가 따로 필요할 정도다. "다른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어서"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지난 20일 청주시 흥덕구 소재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사무실을 찾은 <프레시안>은 김현정(청주시 흥덕구 차 선거구), 현슬기(청주시 흥덕구 아 선거구), 유진영(청주시 서원구 마 선거구) 청주시의원 후보와 이성지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대변인을 함께 만났다. 혐오와 외면을 뚫고서라도 기어이 남기고픈 '선례'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자세히 물었다
아래는 이들과의 인터뷰 내용.편집자
프레시안 :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소속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지만, 해당 연대는 정당이 아니다. 유진영 노동당 후보를 제외하면 모두 무소속 후보다. 선거를 치르기엔 불리한 형태 아닌가.
현슬기(이하 현) : 저희도 선거는 다 처음이지 않나. 사실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반대로 생각하면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무작정 출마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공통된 소속 정당 없이 활동하는 편이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의 취지와 더 어울리기도 한다. 모든 정치인에게는 정체성이 있고, 정당은 개별 정치인이 갖는 가장 큰 정체성이지 않나. 우리는 정당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정치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다. 그게 애초의 목표였다.
유진영(이하 유) : 처음부터 (제도)정치를 하려고 후보를 낸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금 이 시기에 우리들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선거라는 전략을 택했고, 그렇게 처음 나온 게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와 시의원 예비 후보 운동이었다.
프레시안 : '지금 이 시기에 우리들이 여기에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유 : 윤석열 정부의 반 페미니즘, 반 노동, 반 기후 등의 기조가 대선 때부터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에 비해 거기에 대항해 페미니즘이나 노동, 기후 등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작은 상황이다. 특히 지역에선 더욱 그렇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 '선거'라는 무대가 우리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현 : 대선 기간에 소위 말하는 백래시가 굉장히 심하지 않았나.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는 그 백래시에 대한 대응에서 시작됐다. 중앙정치 내의 백래시를 보며 많은 이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와중에,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에서 "우리 (저 백래시에 대해) 수다라도 떨어보자"며 '모두까기 수다회'를 열었다. 거기서 "의회 정치에 청년 여성의 진출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그 이야기가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의 출범과 예비 후보 운동, 지금의 시의원 선거 출마로까지 이어졌다.
김현정(이하 김) : 단순히 여성 정치인의 수가 적다는 것을 넘어, 지금의 정치구조상 여성의 목소리가 대변되기 힘들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여성 정치인이 나오는 것부터 매우 힘들뿐더러, 막상 국회에 진입한 여성 정치인이 있어도 소속 정당의 기치에만 매몰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성 후보'들이 지역에 나오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프레시안 : 많은 이들이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우리 사회가 그런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해왔다는 말도 된다. 사실 지방선거에 나온 '비 정당 페미니스트 연대'라는 개념부터가 굉장히 새로운 시도 같다.
김 : 우리 스스로도 모든 것이 새로울 정도다. 활동 하나하나가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가령 (정당) 소속이 다른 후보들이 연대체 단위로 공통 공약을 내면서 각각의 선거운동은 따로 진행하는 이런 활동들이 현행 선거관리법상 가능한지는 아무리 뒤져봐도 지역 내에 선례가 없었다. 실제로 "이게 되느냐" 선관위에 문의하고 논의하고를 계속 반복하며 활동 중이다.
이렇게 선례를 만들어 가는 일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반드시 당선'이 아니다.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우리 지역의, 혹은 타 지역의 다른 분들에게 "이런 게 된다"고 보여주고 싶다.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영감을 주고 싶다. 정말 평범한 사람들도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의 활동은 그러기 위해 '길을 개척해 나가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선례를 만드는 일이라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속 정당 없는 연대 출마라는 형식을 차치하고, 페미니스트 후보의 지방선거 출마만 해도 하나의 선례를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 물론이다. 사무실 건물에 걸린 김현정 후보의 현수막을 보셨을지 모르겠다. "페미니즘이 당당한 청주"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어놓았다. 정치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욕망하는 누군가는, 그냥 이런 현수막을 보면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하는 정치인이 있구나, 앞으로도 있겠구나, 있을 수가 있구나, 라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여성·페미니스트뿐만이 아니라 이주민, 장애인, 청소년 등 다른 수많은 정체성의 (그리고 그 합의) 소수자들도 마찬가지다.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의 운동 기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청주에 살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제대로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대변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프레시안 :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다.
이 : 현수막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간을 좀 돌려서, 이번 대선 당시 청주시 상당구엔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다. 선거운동 기간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진재 후보가 이주민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담은 현수막을 상당구 곳곳에 걸어놓은 일이 있었다.
'이주민들이 보험료도 안 내면서 국민의 건강보험료를 축내고 있다'는 식의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그밖에도 "무슬림이 한국을 점령했다"든가 "노 차별금지법, 노 페미니즘" 같은 혐오정서에 기반한 현수막이 굉장히 많았다.
예비 후보 운동 당시 후보들끼리 그 현수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 현수막을 볼 이주민들은 어떤 기분을 느낄까? 이런 현수막이 공공연하게 붙어있는 사회에서, 그들은 스스로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엄청난 배제와 소외의 감각을, 그로 인한 절망감을 느끼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현 : 실제로 관련 단체에 방문해 간담회를 가졌을 때, 많은 이주민 분들이 그 현수막을 보고 힘들어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그런 '혐오 현수막'에 저항하는 활동을 기획했다. 러시아에서 온 이주민 분들이 많이 거주하고 계신 동네에 "우리는 이주민과 함께한다"는 내용을 담아 노어로 된 현수막을 걸었다. 바로 어제(19일) 일이다.
프레시안 : 외국어로 쓴 선거운동 현수막이라니, 실제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다.
김 : 이 또한 선례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외국어로 현수막을 만드는 일을 어떤 후보도 해본 적이 없었다. 보통 이주민 분들은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편의를 배려하거나 선거운동의 타겟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다. 외국어 현수막을 걸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지역 선관위에 했는데, 선관위에서도 처음 보는 활동인데다 마땅한 선례도 없어서 그분들이 중앙선관위까지 가서 해석을 받고 돌아오시기도 했다.
"당신이 '몰랐던' 페미니즘 정치, 우리가 보여주러 나왔다"
프레시안 :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스스로, 또 지역 선관위도 '몰랐던' 선거운동 방식이라 말씀해 주셨다. 지역사회 시민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정리하자면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가 지향하는 정치는 이른바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나는 정치'라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이 당당한 청주", "성평등한 지방자치" 등 후보들이 내건 정치적 슬로건들도 그렇다.
김 :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만 잘 알 수 있다. 여성을 비롯해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의회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의회의 구조를 보면, 단순히 생각해도 인구의 반이 여성인데 여성 의원의 수는 (중앙·지역을 포함해) 어디에서도 전체 의석의 20%를 넘기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치단체장은 말할 것도 없다. 기초 자치단체장의 여성 비율은 4%에 불과하고, 광역 자치단체장은 30년 동안 1명도 여성 단체장이 나온 적이 없다. 그래서 "성평등한 지방자치"란 여성 대표성이 일단 높아져야 구현될 수 있는, '우리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 개념이다.
프레시안 : 그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에 대한 열망도 물론 높지만, 그에 대한 반발(백래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대선 과정에서의 백래시가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 출범의 이유라고도 말씀하셨다. "페미니즘이 당당한 청주"를 내건 후보들에 대한 청주시의 반응은 어떤가.
현 : 대선 국면에서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가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등을 비판하며 '마녀들의 행진'을 벌인 적이 있다. 청주시의 중심가인 성안길에서 마녀 복장을 입고 행진하며 여가부 폐지 반대 등의 발언을 외쳤다. 그때의 반응부터 말씀드려 볼까 한다.
유 : 그때 진짜 욕을 많이 먹었다. 성안길 행진 구간에서 다른 집회도 정말 많이 열리는데, '페미니즘 집회'만큼 반응이 뜨거웠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날 하필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서 선전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우리가 윤 캠프의 공약을 비판하며 그 인파를 뚫고 나가다보니 주변에서 온갖 욕설이 들려왔다.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분도 있었다. 특히 남성 시민들의 경우, 정말 다양한 나이대의 남성분들이 저희에게 적대감을 표한 기억이다.
현 : 그런 격한 반응에서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해방감이 들기도 했다. 그 폭력에 개인으로 마주쳤다면 무섭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함께였다. 우리가 건네주는 팜플렛을 구겨서 우리 앞에 던진다거나 하는 반응이 있었는데, 함께 모여 있으니 그 정도의 반응은 '귀여운 정도구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불어 '이 사람들도 우리를 처음 본 거잖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그들 입장에서 우리는 '처음 만난 페미니스트'들인 거다. 그날의 기억을 넘어서, 지금 선거운동 기간에도 계속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가령 유세 중 오락실에 들어가면 초·중등학생 정도 되는 남성 청소년들에게 우리는 완전히 '처음 보는 광경'이다. "봤어? 봤어? 페미니스트래!" 하는 소리가 막 들려온다.
이 : 중요한 말이다. 서로가 처음 만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혐오나 조롱, 외면 섞인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도리어 '이번이 처음인' 존재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런 시선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예비 후보 운동 당시 마주친 한 남성 시민을 보고 그런 확신을 가졌다.
프레시안 :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 : 우리끼린 일명 '메두사 사건'이라 부른다. 예비 후보로 활동할 때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시민 분들께 명함을 나눠드리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내가 페미니스트 후보임을 확인한 한 남성분이, 아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걸어오시는 거다. 명함이라도 받아가라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는데, 끝까지 "네, 네, 네"하면서 나를 쳐다보지 않으셨다. 농담 섞어 페미니스트를 무슨 메두사처럼 알고 계시는 게 아닐까 했다.
그분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무슨 악마처럼 오해를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저렇게까지 해서 외면하고 싶은 게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인터넷 속 혐오발언의 근본이 이런 오해와 두려움이었던 건가? 하는 생각에 허탈감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사람들, 우리를 잘 모르고 있구나, 한 거다. 우린 마주치면 돌이 되는 메두사가 아니지 않나. 우리를 '몰랐던' 그들이 우리를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냥 똑같은 사람이라고, 우리는 그냥 누군가의 권리를 얘기하는, 사실 당신의 권리까지도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열심히 말해준다면?
프레시안 : 일종의 '페미니즘 반복 노출'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이 : 노출이 필요하다. 정확한 말이다. "페미니즘이 당당한 청주"라는 슬로건을 굳이 내건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가령 '걔네' 이전에도 페미니즘 활동이 청주시 내에서 없던 게 아니다. 이미 지역엔 많은 여성 단체들이 있었고, 각 이슈마다 그분들이 행한 대응 활동도 많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그런 활동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네 글자가 전면적으로 부각된 적은 별로 없었다고 느낀다.
그에 따른 반응도 흥미로운데, 그냥 '여성'이란 단어를 내건 집회엔 '마녀행진' 때와 같은 격한 반응이 없었다고 느낀다. 그냥 누군가 집회를 하는구나, 하고 그러려니 하는 느낌? 그런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붙으면 난리가 나는 거다. 똑같은 집회인데도. 모르니까, 그냥 그 단어가 왠지 싫고 무섭고 악마 같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여성단체의 집회도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굳이 붙이지 않아왔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페미니즘을 굳이 전면에 내걸었다. 페미니즘이 금기시되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오독이니까. 그리고 그 오독을 해결하려면 페미니즘을 보고, 마주치고, 알아야 하니까 그랬다. 페미니즘이 당당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다. 대놓고 이 단어를 노출시켜야 한다는 내부적인 결심이 있었다. 그래서 슬로건엔 꼭 페미니즘 네 글자를 넣자고 결의했다.
프레시안 : 그들이 몰랐던 페미니즘 정치를 직면케 해야 한다?
이 : 그렇다. 가령 현 후보가 아까 남성 청소년들의 반응 이야기를 해주셨지 않나. 그분들이 우리를 보고 놀라거나 조롱하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다. 다만, 그 경우에도 그들을 진지하게 대해주면 오히려 달라질 때가 있다. 굉장히 진지하게, 한 명의 시민으로서 대우해주며 한 번 읽어봐 달라 부탁하면 조롱을 하다가도 진지하게 우리 공보물을 읽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김 : 맞다. 청소년들은 특히 그렇다. 이 또한 선례를 만드는 일 중 하나인데, 우리는 청소년이나 아동 시민 분들에게도 명함이나 공보물을 꼭 전달한다. 보통 후보들이 어린이 시민들에게 명함을 돌리지는 않지 않나. 표가 안 되니까. 그래서 그런지 명함을 주려고하면 어린이들은 오히려 "어, 저는 아니에요" 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팠다. 표가 없다는 이유로 정치에서 배제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막상 한 번 읽어봐 주세요, 하고 주면 되게 좋아들 하신다.
메갈·페미라고 던지는 욕에,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으로 맞서다
대선이 끝나고 여가부 폐지론이나 이대남 현상 등의 개별 이슈는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페미니즘 이슈는 여전히 정치권에서 뜨겁게 다루어진다. 23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윤석열 대통령을 '2022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윤 대통령을 가리켜 "반페미니즘을 무기로 당선된 포퓰리스트"라 평했다. 비슷한 시기 더불어민주당에선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정치인으로 꼽히는 박지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20대 여성 지지층인 '개딸(개혁의 딸)' 세력이 규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 : 개딸 현상(20대 여성을 중심으로 강성 민주당 지지층이 형성된 현상. 인터뷰 당일은 '박 위원장 규탄 집회'가 열리기 전이었다.편집자)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성 청년이 정치의 주체로 확 올라서는 계기가 됐다고도 평할 수 있겠지만, 결국 누군가의 '딸'로 그들이 남는 것에 저희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김 : 정말로, 안타깝다. 그들에게는 '여성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활동을 돕는 딸'이 되는 것 아닌가. 결국 남성 대리인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는 정치가 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여성들이 얼마나 내가 주체가 아니라고 느끼면 그렇겠나. 결국 이 또한 여성 정치 주체가 부족한 상황, 또 거기서 나오는 '이준석 현상' 등의 백래시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특히 대선 과정에서 혐오를 팔아먹는 혐오 세일즈맨의 정치, 혐오 세일즈맨의 언론이 너무 많았다.
유 : 정치권과 언론이 한참 이대남 현상을 강조하고, 갖가지 백래시 현상이 몰아칠 당시엔 사실 뉴스도 잘 보지 않았다.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활동가인 내가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반대로 그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윤 정부의 백래시 기조는 여전히 강력하고, 민주당에선 성비위 사태가 계속 터져 나온다. 성범죄와 관련된 사람들이 지선에서 공천을 받고, 개딸이 집결하는 상황에도 그런 상황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대로 끝난다면 결국 이번 지선도 거대양당 기득권의 엄청난 승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정당과 선을 긋는 페미니스트 정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는 그래서 나왔다.
프레시안 : 쉬운 길은 아닌 듯하다. 말씀하신 백래시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윤석열 정부의 내각 인사 과정에선 '성별, 지역, 연령 등을 고려한 안배가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메갈, 페미가 역차별을 일으킨다"는 사회 일각의 목소리와도 궤를 같이 한다.
이 : 페미니스트를, 혹은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을 탄압하는 목소리는 언제나 능력과 공정의 외피를 두른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강조해온 능력주의 프레임이 대표적이다. 그것이 새로운 정치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평가한다. 능력을 강조하면서 결국은 다양성을 훼손한다. 다양성이 훼손되면 누군가의 인권은 침해된다.
김 : 성평등국의 설치, 공직 내 여성비율 확대, 여성위원회의 설치 등 성평등 추진체계 강화를 우리의 핵심공약으로 내놓은 이유다. '비율'은 심각한 문제다. 청주시만 보더라도 2급, 3급 등의 고위공직자 자리를 보면 여성 비율이 아예 사라진다. 그나마 5급 이상은 승진을 통해 20% 정도를 맞춰놓은 상태다. 또 청주시 내에는 전문가·시민 자문위원회가 150~160개 있는데, 그 위원회 중 50% 이상이 '특정성별 비율 60% 초과 금지' 원칙을 어기고 있다. 지방자치 내에서 여성의 대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능력주의 광풍이 불고 있는 중앙이라고 이와 다른가.
현 :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여성정책은 빈약할 수밖에 없다. '여성친화도시' 같은 타이틀을 달아놓고 막상 하는 건 도로 위에 로고젝트 쏘는 일 뿐인 경우 많지 않나. 현재 여성친화도시인 청주가 딱 그렇다.
김 :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여성은 장애인일 수도 있고 이주민일 수도 청소년일 수도 있다. 결국은 최대한 다양한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주류 정치에 녹여내는 것이 페미니즘 정치의 관건이다. 이주민을 위한 현수막을 만들고 어린이 시민에게 공보물을 나눠주는 청주 페미니스트 연대의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프레시안 : 결국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말로 수렴되는 듯하다.
김 : 그렇다. 페미니즘 철학은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철학이고, 페미니즘 정치는 차별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는 정치다. 지금의 정치는 경제력을 갖춘 기득권층 남성의 이야기만이 진입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치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기껏해야 시혜 대상으로만 다루어진다. 그래서 페미니즘 정치는, "페미니즘이 당당한" 정치와 "성평등한 지방자치"는 그러한 정치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유 :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을 내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정치 등에서) 배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 생물학적 여성은 인구의 반을 이루고 있는 다수 집단이기 때문에 여성의 차별이 가시화되는 것이고, 그래서 차별에 대항하는 담론도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로 얘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정 후보의 얘기처럼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사실 여성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배제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얘기하는 단어가 페미니즘이다. 이주민이나 장애인, 노동자나 지역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우리를 배제하고 있는 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현 : 지금 시대 정치의 키워드가 성장, 시혜, 혹은 배제 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존엄이다. 시혜로서의 보호가 아닌 권리가 중요하다. 배제가 아니라 평등이 옳다. 그러한 지향성이 바로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다. 우리는 그 지향성, '모두를 위한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 페미니즘에 대한 오역과 맞서고 싶다.
이 : 내가 페미니스트가 맞을까 고민하며 자기검열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이전에, 그냥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나는 온건하게 인권을 주장할 뿐인데,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더라. "쟤 메갈이래", "쟤 페미야" 하면서 말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그냥 얘기한 것뿐인데도 나는 "메갈"이 되고 "페미"가 됐다. 넘어서 "꼴페미"가 되고 "쿵쾅이"가 됐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아, 나 페미니스트 맞구나? 우습게도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그들에게 당한 셈이다.
그들이 상상하는 "페미"가 무엇인지 몰라도, '같은 인간이니까 인권을 주장할 뿐'이라는 처음의 입장엔 변화가 없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맞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여성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인간들도 마찬가지의 권리를 누려야 하며, 때문에 페미니즘의 정치는 모두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모두의 정치가 페미니즘의 정치가 되어야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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