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2-05-23 04:59수정 :2022-05-23 07:36
척수성 근위축증 앓는 정희숙씨
척추측만증에 일반인 폐보다 작았지만
집중관리군 아닌 일반관리군으로 분류
팍스로비드 처방 대상에서도 제외돼
고열·근육통·호흡곤란 시달려도
보건소·119 “병상 없다” 말만 되풀이
사망 8시간 전에야 겨우 응급실로
“입원시켰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결국에는 가둬 놓고 죽인 거잖아요”
“(코로나19 환자인 아내가) 중증장애인입니다. 119는 (신고)했고, 병원 섭외가 안 된다고 해서요. 도저히 (병실이) 안 난다고 하는데… 치료를 좀 받을 수 있나요? (환자가) 곧 죽을 것만 같아서….”
3월17일 새벽 1시 안영일(49)씨가 광주광역시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영일씨의 전화기에 자동녹음된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다급했다. 척수성 근위축증을 앓았던 아내 정희숙(39)씨는 3월12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재택치료 중이었다. 확진 초기부터 고열과 호흡곤란에 시달렸던 희숙씨의 건강이 이날 새벽 극도로 악화됐다. “계속 뭘 먹지를 못했어요. 확진 초기에는 3일 동안 토하고, 거의 물도 삼키지 못했어요. 토하고 가래를 뱉으면 핏기 섞인 게 나오고, 정신을 거의 못 차리고 있어요.” 영일씨 가족은 셋째 아이가 3월11일 첫 확진을 받고, 다음날 부부와 나머지 두 아이 등 다섯 식구가 모두 확진 판정을 받았다. 병원은 보호자 영일씨가 확진자라는 사실에 머뭇댔다. 거듭된 읍소 끝에 영일씨는 병원의 입원 ‘허가’를 받았다. 병상을 확보한 건 보건소도, 119도 아닌 남편이었다. 하루 신규 확진자가 역대 최다 62만명을 넘었다는 뉴스가 떠들썩하던 날이었다.
자고 있는 7살, 12살, 14살 세 자녀를 뒤로한 채 차에 희숙씨를 싣고 응급실로 내달렸다. 희숙씨는 병원 도착 8시간 만인 오전 9시30분 숨졌다. 폐·신장이 이미 크게 망가진 상태였다. “아기 엄마 데리고 병원 빨리 갔다 올 요량으로 아이들 잠 안 깨게 조심히 갔거든요. 그럴 줄 알았으면 아이들이 엄마한테 인사라도 하게 하는 건데….” 확진 뒤 격리 기간이 남아 있던 영일씨는 아내의 주검을 장례식장에 먼저 보내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룻밤 사이 엄마를 잃은 세 아이를 붙잡고 울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빠가 엄마를 못 지키고 혼자 왔다. 미안하다….”
‘엄마 아프면 안돼. 응알게찌. 엄마가 아프면 가족도 마음이 아파 그러니까 아프지마’. 5월17일 찾은 거실 한켠에 걸린 희숙씨의 사진 위엔 편지가 놓여 있었다. 2021년(2022년의 오기) 3월16일. 엄마가 숨지기 하루 전날 7살 막내가 쓴 간절한 편지였다.
희숙씨는 ‘재택치료’가 시작된 3월12일부터 내내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듯한” 근육통과 구토, 고열과 호흡곤란에 시달렸다. 보다 못한 영일씨는 확진 다음날인 13일부터 병상을 요청하기 위해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보건소에 수십통의 전화를 했다. 거의 불통이었다. 어쩌다 연결되더라도 보건소는 “병상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119도 마찬가지였다. “이송은 해줄 수 있지만, 병상이 없기에 먼저 병원을 섭외해달라.” 개별로 접촉한 병원들은 “확진자는 진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결국 비대면 진료를 통해 약을 처방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구토를 계속해 삼키기도 어려운데다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코로나19 먹는 치료제 팍스로비드는 처방 대상도 아니었다. 그렇게 5일을 버틴 끝에 희숙씨는 숨지기 8시간 전에야 지역의 대학병원 응급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희숙씨는 ‘척수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중증장애인이었다. 팔꿈치 아래 외엔 온몸에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척추측만증이 심해 폐가 일반인보다 작았다. 그럼에도 3월12일 재택치료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집중관리군’이 아닌 ‘일반관리군’으로 분류됐다. 희숙씨의 자기 기입식 조사서에는 ‘지체장애인,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라고 돼 있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당시 정부는 △60살 이상△먹는 치료제 투약 대상자인 50대 이상 고위험·기저질환자(고혈압, 심혈관계 질환 등) △먹는 치료제 투약 대상자인 면역 저하자(암 환자, 장기이식 환자 등)를 ‘집중관리군’으로 관리했는데, 희숙씨의 희귀질환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준에 따르면 정씨는 팍스로비드 처방 대상(60살 이상, 면역 저하자, 40·50대 기저질환자)도 아니었다. 감염 시 폐 손상 위험이 컸지만 ‘일반관리군’이라는 이유로 병상 배정에서 후순위로 밀렸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할 시기였다는 점 외에도 희숙씨의 입원이 어려웠던 결정적 이유는 또 있었다. 보호자와 함께 입원해야 하는 장애인이라는 점이다. 광주 남구 보건소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보호자도 들어갈 수 있는 1인실 병상이 없어서 병상 배정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확진 뒤 사흘이 지난 3월15일, 영일씨도 병상을 요청하며 비슷한 설명을 들었다. “5~6인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보호자는 함께 갈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보호자가 동행해야 한다”는 영일씨의 답변에 보건소는 그날 밤까지 연락이 없었다.
확진 나흘 뒤인 3월16일 영일씨는 다시 보건소에 병상 배정을 요청했다. 보건소는 “우선 외래진료센터를 가보라”고 권했다. 여러 병원에 연락한 끝에 확진자 대면진료가 가능한 외래진료센터를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원 문턱에서부터 일이 꼬였다. 확진자 전용 출입구에 계단이 있었던 것. 100㎏이 넘는 전동휠체어를 들고 진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비확진자용 입구로 돌아 간신히 입구로 들어섰지만,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 손상 여부를 보는) 엑스레이 검사를 해야 했는데, 일어서야만 찍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건 아내에게 무용지물이에요. (혈액검사를 위해) 혈액을 뽑아야 되는데, (희귀질환 탓에) 그렇지 않아도 혈관이 안 나오는 사람이 며칠을 못 먹으니까 (의료진이) 혈관을 찾을 수가 없어요. 결국 혈액도 뽑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부는 초음파 검사와 3차 의료기관 진료의뢰서만 받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일씨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내는 숨지기 전 심한 폐 손상, 패혈증을 겪었다. 영일씨는 대면진료 때 엑스레이를 찍지 못한 점, 더 빨리 입원하지 못한 점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아내가 확진된 이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해서다. “환자 상태가 그렇게 심해졌다는 걸 알았으면 어떻게든 안 했겠냐고요. 우리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냥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었죠. 계속 살려달라고 전화만 하고요. (중략) 입원을 시켜서 치료를 받았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나라에서 격리하라니까 격리하고, 집에서 치료받으라고 하니까 치료했어요. ‘가둬놓고 죽인 거’잖아요.”
광주시는 이 일 이후 장애인단체와 면담을 거쳐 코로나19와 관련해서 △중증장애인 전담 병상 확보 △장애인 전담 상담창구 마련 △중증장애인 이동 지원 등을 담은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항을 규정해두지 않으면 이런 일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앞서 보건복지부도 2020년과 지난해 장애인 대상 감염병 대응 매뉴얼을 내놓은 바 있다. 지난해 4월 매뉴얼을 보면, ‘65살 이상’을 우선 고려하도록 했지만 ‘장애인 확진자가 입원할 수 있는 의료지원·생활지원 병동·병원을 확보하고, 확진 시 확보 병상 우선 조치 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실제 적용은 상황별로 다르다. 복지부 관계자는 “병원별로 활동지원사나 보호자를 거부하는 등 사례가 있을 것”이라며 “장애인 병상 배정은 각 시·도에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필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기획실장은 “장애인 병상 배정은 지방자치단체의 상황이나 병원장의 재량에 좌지우지된다”며 “매뉴얼을 이행하고 적용하는 일을 지자체 판단에 맡겨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전장연 등 장애인 단체는 코로나19 먹는 치료제 처방과 재택치료 시 고위험군·집중관리군으로 중증장애인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레미콘 기사로 일하는 영일씨는 아이들이 크고 나면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계단과 문턱이 널린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외식을 하더라도 좌식인지 입식인지, 전동휠체어가 가능한지 알아봐야 하는 생활에 스트레스가 컸다. “휠체어가 어디든 막힘없이 다닐 수 있게끔, 아내를 위해 집을 지어 살고 싶었어요.”
희숙씨는 시골로 가서 노인 복지 관련 일을 해보는 데에 관심이 컸다. 세 자녀를 키우면서도 공부를 시작해 사회복지 전공으로 올해 초 대학을 졸업했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취득도 준비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희숙씨를 ‘다정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30여년간 가깝게 지내온 김민선 광주장애인가정상담소장은 “셋째를 가졌을 때 저희 사무실에 왔는데, 한 아이는 엄마한테 안기고, 한 아이는 휠체어 뒤에 타고 왔다. 놀라웠다”며 “여러 사람들하고 편지로 소통했다. 사람들과 관계가 굉장히 좋아서, 한번 알게 되면 관계를 오래 유지한 친구”라고 기억했다.
희숙씨의 가장 큰 즐거움은 가족과 야외로 나가는 일이었다. 영일씨는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아내를 위해 쉬는 날이면 야외 어디든 가려고 애썼다. 희숙씨는 그런 남편을 ‘친절한 영일씨’라 부르며 행복해했다. “아기 엄마는 휠체어 타고 같이 야구장으로, 산으로 가서… 가다 소나기 오면 비 맞고 그랬던 추억이 있네요. 남들은 피하지만, 우리는 못 피하잖아요. 비가 막 쏟아지면요.”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젠 이 땅 어디에도 희숙씨가 없다.
광주/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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