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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5일 일요일

참혹하게 맞아 죽은 서울대 교수... "적당히 덮자"는 검사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최종길 교수 죽인 박정희 정권

20.03.16 08:29l최종 업데이트 20.03.16 08:29l

 생전의 최종길 교수
▲  생전의 최종길 교수
ⓒ 의문사위 자료사진
 
1973년 10월 16일 오후 2시경 최종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아래 서울법대)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아래 중정) 직원이자 막내 동생인 최종선과 함께 조사를 받기 위해 중정에 자진 출두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19일 새벽, 최종길 교수는 중정 건물 앞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중정은 "최종길이 간첩 사실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정의 남산 분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중정의 논리대로라면 북한의 고정간첩이 서울법대에서 어엿한 교수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최종길 교수는 누구였고 박정희 정권은 왜 한 서울법대 교수를 '간첩'으로 조작했던 것일까?

최종길은 193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1951년 서울법대에 입학해 1955년에 졸업했다. 1957년 서울법대 대학원 졸업 후 독일로 유학 가 1961년 쾰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서울법대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64년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1967년부터 법과대학 학생과장을 거쳐 1972년 서울대 정교수가 되었다.

최종길 교수는 박정희 집권 동안 1969년 3선개헌 이후 1972년 유신체제 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공개적 지지를 보낸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료 교수들의 진술에 따르면 최 교수는 경찰이 대학생들을 강압적으로 연행하는 것을 반대했고, 교수회의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온건한 법대 교수의 조용한 발언도 박정희 정권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것 같다. 중정은 공작 차원에서 최종길 교수에 대한 내사를 진행했다.

1973년 10월 최종길 교수의 막냇동생 최종선은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한 해 전인 1972년 그는 중정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973년 10월 13일 오전 그는 중정 동료로부터 중정이 북한 공작원 이재원과 중학교 동창인 자신의 형 최종길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종선은 곧 직속상관에게 형인 최종길 교수가 혹시 이 문제로 조사받게 된다면 비인격적인 대우가 없도록 노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경 최종선은 동료인 담당 수사관을 만나 같은 요청을 했다. 그 수사관은 "이미 실질적인 조사는 종결되어서 최종적인 기자회견 발표문을 쓰고 있으니 신경 안 써도 된다"며 최종선을 안심시켰다. 그날 저녁 그는 형인 최종길 교수를 만나 낮에 중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혹시 중정에서 수사 협조 요청이 있으면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선의 협조를 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아무쪼록 교수회의 등에서 발언을 자제해줄 것도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형인 최종길 교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협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며 흔쾌히 수사협조요청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형제는 오랜만에 술 한잔을 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1973년 10월 16일 오후 1시 45분, 아우 최종선과 형 최종길 교수는 다방에서 만나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중정 남산청사 정문에 도착해 담당과에 알렸다. 담당과의 직원이 나와 최종길 교수를 안내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을 이때 한번 봐주십시오"라고 동생은 말했고 형은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와 보게 되었구나"하고 환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 형제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 자진 출두한 지 사흘 만인 1973년 10월 19일 새벽 5시, 최종선은 중정으로부터 아침 7시까지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주 불길한 예감을 안고 출근한 그는 형이 그날 새벽 1시 30분경 7층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고 통보받았다.

충격적인 소식에도 최종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형이 투신자살했다는 그 현장을 찾았다. 그 현장에는 유혈이나 물로 닦아낸 흔적 같은 것도 아예 없었다. 최종선은 곧 형이 투신한 것도 자살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1973년 박정희 정권 시절 최종선에게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어디 호소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고문을 했다" 자백
 
 최종길 교수 의문사 후
▲  최종길 교수 의문사 후
ⓒ 의문사위 자료사진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는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중정 수사관들은 최종길 교수에게 잠 안 재우기, 쌍욕 등의 언어폭력, 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질 등 심한 구타, 각목을 무릎에 끼워 발로 밟기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이런 모진 고문 이외에도 중정요원들은 최종길 교수의 겉옷을 벗기고 속옷만 입힌 채로 상당 시간 조사를 하면서 감내하기 어려운 온갖 정신적, 육체적 모욕과 고통을 주었다.

당시 중정 직원이었던 양아무개는 지난 2001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최종길 교수가 1973년 10월 16일부터 지하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자신은 10월 17일 오전 8시 30분부터 18일 오전 8시 30분까지 수사보조원으로 근무했다고 했다. 양아무개는 최종길 교수에 대한 고문을 목격한 시점이 1973년 10월 17일 오후 8시에서 10시 사이였으며, 당시 최 교수는 조사관들 앞에 런닝과 팬티만 입고 있었으며 중정요원 차철권, 변아무개 등이 최 교수를 심하게 고문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증언했다.

"(중정요원) 변아무개가 최종길을 몽둥이로 빠따를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변아무개는 최종길에게 '엎드려'! 하고 말하자 최종길이 책상인가 벽에 양손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때 최종길의 옷을 완전히 벗기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최종길을 엎드리게 만든 다음 변아무개가 몽둥이로 엉덩이를 3~4회 정도 때렸습니다.

그리고 (차철권은) '이 새끼 제대로 불지 못해'라며 욕을 하면서 몇 차례 발로 최종길을 걷어찼습니다. (최 교수를 때린 몽둥이는) 조사실 내에 있던 야전침대에서 뺀 몽둥이로 각진 형태이며 길이는 1m에 약간 못 미치고 두께는 약 3 내지 4cm입니다. (최 교수는 그때) 런닝과 팬티는 입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정 5국 10과 과장인 안아무개는 조사관 차철권에게 "노골적으로 때려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라고 한 일은 없고 단지 혼을 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라고 한 일은 있다"고 2001년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더욱이 안아무개는 최 교수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3년 10월 18일 밤에 중정 7층 721호실에서 잠을 자기 위해 누워있던 중 7층 조사실에서 차철권이 최종길 교수를 고문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저는 10월 18일 7층 721호실에서 잠을 자기 위해 누워 있던 중, 최종길의 비참한 신음소리와 차철권이 악을 쓰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7층 조사실에서 차철권이 최종길을 고문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아~악' 소리를 들었는데 최종길이 맞으면서 내는 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나 그런 소리가 계속되었는데 단지 엄살이 아니라 고통에 겨운 비참한 비명과 신음소리였습니다."

당시 중정 감찰실장 손아무개도 최종길 교수의 부검 사진 중 엉덩이의 피멍 자국은 "분명 누군가가 몽둥이로 때린 자국"이라고 2001년 의문사위에서 증언했다.

최 교수 사망 이후 차철권을 조사했던 중정 감찰과 조사관 김아무개도 "차철권이 1973년 10월 17일 오후 10시경 지하조사실에서 (최종길 교수가) 벽에 등을 대고 무릎을 반쯤 구부리도록 해서 세워 놓기도 하고, 발로 양쪽 엉덩이를 몇 회 걷어찬 일도 있고, 야전침대의 몽둥이(각이 진 몽둥이로 길이가 약 80cm, 두께는 약 5cm 정도)를 무릎 사이에 끼워 꿇어 놓는 방법 등으로 고문을 했다"고 자백한 사실이 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고문치사 은폐하기 위한 방법"

당시 최종길 교수에 대한 수사를 총괄 지휘했던 중정 수사단장 장송록도 의문사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심하게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는 7층 화장실은 물론 어디로든 제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사람이 화장실 창문을 타고 넘어서 자살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살이 아니라 최종길은 이미 고문으로 죽었거나 가사 상태에서 사고 현장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최종길은 전혀 간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종길의 사후에 '간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최종길은 분명 간첩임을 자백한 일이 없는 데다가 그 외 간첩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중정에서 '간첩임을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발표한 자살 동기가 이미 거짓입니다. 최종길이 자살을 한 것이라면 긴급구속장, 피의자 신문조서, 압수수색장, 부장에게 올리는 보고서, 신문보도안 등 서류 일체를 사후에 만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간첩으로 만들면 그 시절에는 아무도 의심하거나 항의할 수 없었기에 고문치사를 은폐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를 선택한 것입니다."


당시 최종길 교수의 고문 수사관 차철권의 상관인 공작과장 안아무개는 최종길의 타살 가능성을 2001년 의문사위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날) 새벽 1~2시 사이에 두 사람 정도가 복도를 우당탕거리며 뛰어오는 소리를 들은 것은 분명합니다. 위 소리를 들은 직후 김아무개 계장이 내가 자고 있던 방으로 나를 깨우러 왔습니다. 김 계장은 나를 깨운 후 7층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비상계단 좌측의 한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서 밀어버렸어'라며 양손으로 최종길을 밀어 떨어뜨리는 동작을 연출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종길이 소변기를 딛고 투신자살했다기에 자세히 확인을 해봤으나 소변기에 발자국은 분명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최종길은 고문을 당한 이후였고 부검 사진에서 나타나는 엉덩이 상처로 볼 때도 최종길이 소변기를 딛고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엉터리 주장입니다."


당시 중정 건물 7층 경비원이었던 임아무개도 2001년 의문사위에서 최종길 교수가 (걷지도 못할 정도로 고문받은 상태에서) 변기를 밟고 창문을 딛고 올라가 떨어진다는 것은 상식상 이해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또한 임아무개는 사고 후 (중정요원) 차철권의 지시로 자신이 당시 허위진술을 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증언했다.

심지어 당시 중정부장 이후락조차 "최종길이 접촉한 사람이나 북한에 갔다는 등의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2001년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낙인
 
 최종길 교수 가족들
▲  최종길 교수 가족들
ⓒ 의문사위 자료사진

당시 최종길 교수가 고문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하자 중정은 즉각 사태수습에 나섰다. 중정 감찰과장 이아무개는 최종길의 동생 최종수에게 중정에서 보상금으로 3000만 원(당시 여의도 52평 아파트 두 채 값)을 주고 자녀들 교육도 중정에서 책임을 지며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사실도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하고 화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중정의 요구에 대해 최종수는 보상금 제의를 거절하고 최종길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들지 말 것, 자녀들의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막내 동생 최종선을 계속해서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도록 할 것 등 3가지를 중정 측에 제의했다. 중정은 최종선의 3가지 제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곧바로 최종길이 간첩이라고 언론을 통해 발표하며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가장 최종길 교수의 뜻밖의 죽음 뒤에도 그 가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멀고 먼 고통의 날이 시작이었다. 중정은 가족들이 남편과 아버지인 최종길 교수의 시신을 아예 보지 못하도록 했다. 중정은 죽음조차 무서웠던지 최종길 교수의 장례식 영구차를 감시하며 장례행렬조차 통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집전한 첫 추모 미사에 중정이 최종길 교수 부인 백경자 여사의 참석을 막았다. 그래서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추모미사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중정 직원들은 최종길 교수 집 앞에서 국내 언론은 물론 외국 언론도 취재를 아예 못 하도록 몸으로 막았다.

더욱이 서울대 동료 교수들조차 간첩에게는 조의금을 줄 수 없다며 최종길 교수 가족에게 조의금 지급을 거절했다. 그리고 최 교수와 가족의 지인들은 일체의 연락을 끊고 유족을 외면했다. 최 교수 가족은 '빨갱이'라는 낙인을 벗어나기 위해 박정희 정권하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문 제기보다는 침묵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2004년 필자는 의문사위에 몸담았던 시절 최종길 교수 재판을 법원에서 참관한 적이 있다. 그때 법원에서 직접 들은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면 이렇다.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서 의문사하고 당시 의사였던 부인 백경자 여사는 거의 6개월마다 직장을 옮겨야 했다. 새 직장에서 몇 개월만 지나면 곧 "빨갱이 마누라"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최 교수도 사망 후 10여 년 동안 재직했던 서울대로부터 퇴직금과 잔여 급여 등을 전혀 받지 못했다. 생전에 책 출간을 계약하고 집필을 완성한 상태였으나 그의 죽음으로 인세 수익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은 어린 시절 "간첩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초등학교도 여러 번 전학 다녀야 했다". 최종길 교수의 가족은 간첩의 처, 간첩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염려가 있으면 이사도 자주 하고 직장과 학교도 수시로 옮겨야 했다. 결국 어린 최광준은 국내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독일로 유학 갔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일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필자가 그를 법정에서 만났을 때 경희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최광준 교수의 여동생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지 않고는 하루도 못살 정도로 정신이 쇠약해져 있었다.

33년만에 국가의 불법행위 인정

한편, 형의 뜻하지 않은 죽음 이후 그의 동생 최종선은 세브란스 정신병원에 위장 입원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실을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생각으로 최종선은 중정의 감시를 피해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이곳에서 최종선은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수기를 남몰래 집필했다.

1974년 겨울 최종선의 수기가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어 보관되었다가 1988년 최종길 교수 사건 공소시효를 며칠 앞두고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를 바탕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혹심한 고문 수사 과정에서 빚어진 폭압적 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며 서울지검에 재수사를 요청했다.

검찰은 최종길 교수 사건의 진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이 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정작 수사는 형식적이었고 아무런 성의 없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당시 검찰에 출두한 최종선을 정보부 사람으로 착각한 검사가 "수고 많으십니다. 적당히 덮어버리는 거지요, 뭐!"라고 말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은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결국 검찰은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도, 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애매한 발표로 이 수사를 그냥 얼버무렸다.

지난 2002년 의문사위는 최종길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고 중정에서 고문당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최 교수가 고문당한 멍든 엉덩이 사진 자료 등과 함께 언론에 발표했다. 이로써 최종길 교수의 타살이 사후 29년 만에 국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의문사위의 진실규명 결정을 바탕으로 최종길 교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006년 2월 14일, 사건 발생 33년 만에 서울고등법원은 1973년 중정에서 고문받다가 숨진 최종길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해 '국가는 유족들에게 18억 4000여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최종길 교수의 억울한 죽음과 그 가족들이 잃어버린 세월은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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