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황금비 기자
무작위로 전화를 돌리는 여론조사 말고, 지역 주민들의 내밀한 속마음을 들어볼 방법은 없을까. 지역구 민심은 어딜 가야 가장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을까. <한겨레>는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전체 253개 국회의원 지역구 가운데 국민의 관심이 쏠린 핵심 지역구 5곳을 고르고, 그중에서도 ‘민심 풍향계’로 꼽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정동을 찾아가기로 했다. 주민센터, 경로당, 전통시장, 아파트단지, 24시간 사우나 앞…. <한겨레>가 골목길 구석구석에서 보고 들은 민심을 5차례에 걸쳐 싣는다. 첫번째 지역구는 이낙연 전 총리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출마하면서 ‘대선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울 종로구다.
“문재인 대통령한테 좋은 일이 참 없었는데, 저게 좀 도움이 되려나?”
지난 11일 오전 11시30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자리한 운니경로당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김아무개(85)씨가 말했다. 화면에서는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소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경기도 안 좋고, 병 때문에 다들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 여기 할머니들은 한국당도 있고 민주당도 있고 정의당도 있고 다 있어. 서로 말만 안 할 뿐이지.” 김씨는 평생을 운니동에서 산 ‘종로 토박이’다.
평소 같으면 매일 스무남은 할머니들이 경로당에 모여 점심을 함께 만들어 먹었겠지만, 코로나19의 여파로 경로당을 찾는 발길도 뚝 끊긴 상태였다. 1주일간 문을 닫았다가 이날 문을 연 경로당에는 오후 1시까지 네 사람만 자리를 지켰다.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최병임 노인회장이 말했다. “경로당에서 정치 얘기하면 싸움 나요. 종로는 대대로 누굴 더 밀어주고 그런 게 없어. 선거는 가봐야 아는 거야.”
■ ‘접전지 중의 접전지’ 종로1·2·3·4가동 <한겨레>는 10~11일 이틀간 가장 유력한 여야 대선 후보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후보의 ‘한판 대결’이 예정된 종로구를 찾았다. 종로구는 2000년 이후 총선에서 보수정당이 4번 연속 석권했지만, 2012·2016년 총선에서는 정세균 현 총리가 2번 연속 승리한 곳이다. <한겨레>가 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대표 최정묵)와 함께 2012년 이후 전국단위 선거 여섯차례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종로구는 민주당 지지세가 좀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로구의 전체 17개 행정동 가운데 이화동·혜화동 등 7개 행정동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던 곳’으로, 4개 행정동은 ‘민주당 지지세가 다소 강했던 곳’으로 분류됐다. 한국당의 평균 지지세가 민주당보다 높게 나온 곳은 평창동과 사직동 두 곳뿐이었다.
종로1·2·3·4가동은 종로구 전체 행정동 가운데 양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가장 대등한 곳(민주당 평균 지지율 43.9%, 한국당 평균 지지율 43.7%)이었다. 하지만 종로1·2·3·4가동 역시 균질한 지역은 아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다면, 탑골공원 주변은 한국당 지지가 우세했다. 종로구청에서 인사동 문화의 거리를 거쳐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구간과 종로 주얼리타운, 세운상가 일대 등은 양당의 경합세가 두드러졌다. ‘접전지 중의 접전지’인 이곳 민심을 살피면 종로 선거 전체의 판세를 가늠해볼 수 있는 셈이다.
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에서 역대 투표 결과에 더해 연령·성별 등 사회경제적 데이터를 결합해 예측한 ‘총선전략 마이크로지리정보’를 보면, 광화문역과 맞닿은 빌딩가와 고급 오피스텔이 모여 있는 서남부 구역은 민주당이 더 유리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탑골공원을 주변으로 한 중부 구역은 한국당이 좀 더 우세할 것으로 예상됐다.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각 젊음의 거리.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 “경기 꼴 좀 봐라, 민주당 찍겠나”
“경기 꼴을 좀 보세요. 그럼 누굴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10일 오전 익선동의 한 과일도매점에서 만난 이아무개(61)씨는 오는 총선에서 어떤 후보를 선호하는지 묻자 이렇게 되물었다. 이씨는 종로구 주변 주점에 과일을 납품하는 도매점을 운영한 지 11년째인데 “지금 같은 불경기는 처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에 경기가 바닥이잖아요. 주변 주점들이 다 장사가 안되니까 저도 타격을 받은 거죠. 매출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정부·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소규모 자영업자들과 노년층 위주로 나왔다. 운니동에서 40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김아무개(70)씨도 “경제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고, 지금 정부가 하는 일들도 마음에 안 든다. 조국이랑 울산 선거 개입이 맨날 뉴스에 나오잖느냐”며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맨날 어렵게 산다. 지금 여론이야 이낙연이 낫겠지만, 최종 결과는 가봐야 안다”고 잘라 말했다.
‘정권심판론’을 강조하는 한국당의 전략은 황교안 후보가 지난 9일 첫 종로 방문에서 ‘종각 젊음의 거리’를 선정해 자영업자들을 만난 행보에서 잘 드러난다. 황 후보 쪽 관계자는 “소상공인·자영업자는 확실히 우리 편이라는 게 느껴진다. ‘경제는 자신 있다’라는 프레임으로 가려 한다”며 “정권심판론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반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우세했던 종로구에서 유독 종로1·2·3·4가동의 양당 지지세가 대등한 이유는 노인층 인구 비율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9년 11월 기준 서울시 인구 통계를 보면, 종로1·2·3·4가동의 전체 인구 7247명 가운데 60살 이상이 2663명으로 36.7%에 달했다. 10일 오후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난 돈의동 주민 최석기(74)씨는 “노인들 표는 고정돼 있다. 황교안 대표를 뽑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 “그래도 한국당은 안 뽑는다” 인구 7천여명의 작은 행정동 안에서도 민심은 세대별로 온도 차를 보였다. 젊은층은 정부·여당에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한국당을 찍을 순 없다’는 여론이 강세였다. 인의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직장인 최아무개(37)씨는 “그전 선거에서도 정세균 후보를 찍었다. 주변 친구들 중에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있어도 대놓고 한국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고 했다. 익선동에 사는 전업주부 이아무개(37)씨도 “종로1·2·3·4가동은 고령층이 많아 황 대표가 선전할지 몰라도 종로의 전체 여론을 뒤집기엔 역부족일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당을 지지할 순 없으니 민주당에 투표하겠다’는 소극적 여론도 많았다. 청진동 오피스텔에 3년째 살고 있는 김성환(35)씨는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지만 한국당이 싫어서 민주당을 뽑은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씨는 “부동산 정책 실패와 조국 논란을 보며 정부에 실망했다. 하지만 황 대표가 종로에 등 떠밀리듯 나온 우유부단한 이미지 때문에 국회의원을 떠나 대선후보로 괜찮을지 의문이 든다”고 평했다. 종로의 한 고시텔에 살면서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김아무개(25)씨도 “지역구는 이낙연 후보를 찍더라도 비례대표는 다른 당에 투표하려고 한다. 민주당을 강하게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당투표에) 고민을 많이 할 것 같다”고 했다.
젊은 인구가 많은 혜화동·이화동을 포함해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던 지역의 표심이 얼마나 결집할지도 관건이다. 이 후보 쪽 관계자는 “선거 승리를 위해 청년층 투표 독려 전략은 필수다. ‘청년이 돌아오는 종로’라는 슬로건을 꺼낸 것도 이를 위한 포석”이라고 말했다.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진동 거리. 종로1234가동 서부 구역은 광화문역과 맞닿아있어 빌딩과 오피스텔이 밀집되어 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 전체 총선 판세에 영향…“사활 건다”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주자들이 ‘정치 1번지’에서 맞대결을 벌이기 때문에 이번 종로 선거 결과는 향후 대선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한국 정치에서 종로구가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 종로구에서 이겼다는 것은 다른 지역구 몇 개 이긴 것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며 “여야 대선주자 1위 후보들이 ‘정치 1번지’에서 격돌하고 있어 주목도가 더 높다”고 말했다. 이를 의식하듯 양당 모두 종로 선거 결과에 사활을 걸고 있다. 황 후보 쪽 관계자는 “한국당의 조직세가 종로에서 상대적으로 약한데, 외부적으로 보완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당 전체가 종로 선거에 온 힘을 쏟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후보 쪽 관계자도 “선거가 가까워지면 숨어 있는 동정표가 나오면서 (현재 여론조사 결과보다) 격차가 좁혀들 것으로 보인다. 최대한 지금 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양쪽 모두 당의 역량을 총동원할 예정인 만큼 실제 본선이 벌어지면 일방적인 게임이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박 평론가는 “종로구는 보수-진보가 번갈아 당선될 정도로 중도층이 제법 두터운 지역이다. 두 후보 모두 중도층을 확실히 끌어안을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