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
▲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
ⓒ 이승만TV |
아베 신조 총리 대신을 비롯한 일본 우익은 식민지배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식민지배가 한국에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았다고 강변한다.
한국전쟁(6·25전쟁) 휴전 3개월 뒤인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나온 구보다 간이치로도 그랬다. 식민지배 배상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일본은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고, 대장성(일본의 과거 중앙행정기관-편집자 주)에서는 많은 해엔 2천만 엔도 내놓았다"며 이런 것과 식민지배 배상을 상쇄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는 황당한 발상을 입에 담았다.
대장성이 조선총독부에 제공한 그 2천만 엔으로 경찰서나 형무소를 짓지 않았느냐는 한국 측 반박이 있었지만, 쇠 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식민지배가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됐다며 한국 측 심기를 살짝 살짝 건드렸다.
식민지배가 득이 됐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본 우익이 서슴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잘못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믿음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내부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로 대표되는 이들은 일본 우익과 똑같은 주장을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에 학술적 색채까지 입히고 있다. 일본 우익이 이들을 '한국 내 양심적 학자들'로 포장해서 선전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식민지배가 한국에 해가 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낙성대경제연구소가 내세우는 것 중 하나는 '일제에 의한 식량 수탈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영훈과 김낙년·김용삼·주익종·정안기·이우연이 함께 쓴 <반일 종족주의> 제3장 '식량을 수탈했다고?' 편에 이런 주장이 담겨 있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조선총독부 자료
식량 수탈 혹은 쌀 수탈로 한민족이 고난을 겪었다는 점은 한국사 교과서에 잘 소개돼 있다. 쌀 증산을 목표로 일제가 시행한 산미증식계획이 한국이 아닌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국사편찬위원회가 2007년 발행한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로 설명됐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에 근거한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일제강점 2년 뒤인 1912년에 1156만 8천 석이었다. 산미증식의 결과로 이 양은 1928년에 1729만 8천 석이 됐다. 1912년에 비해 49.5%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으로 판매된 양이 1912년에는 291만 석, 1928년에는 740만 5천 석이다. 154.5% 증가한 것이다. 쌀 생산량은 49.5% 증가한 데 반해, 대일 판매량은 3배 이상이나 증가한 것이다.
그럼, 증가된 생산분만큼만 일본으로 넘어간 것일까? 1912년과 1928년을 비교하면, 증산분만큼만 넘어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1912년에는 1156만 8천 석이 생산되고 1928년에는 1729만 8천 석이 생산됐다. 461만 6천 석이 증산된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넘어간 쌀은 1912년 291만 석, 1928년 740만 5천 석이다. 449만 5천 석이 더 넘어간 것이다. 이것만 보면, 대일 판매량의 증가분이 증산량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다른 연도들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간 해들이 발견된다. 1912년과 비교할 때, 1929년에는 194만 3천 석이 증산됐지만 대일 판매량은 269만 9천 석이 증가했다. 1930년에도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갔다.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점은 한국인의 쌀 섭취량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표에 따르면, 1912년에 1인당 연간 0.772석이었던 1인당 섭취량이 1929년에는 0.446석으로 떨어졌다. 쌀이 증산됐는데도 섭취량은 줄어든 것이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점은 한·일 양쪽의 섭취량을 비교해보면 더 잘 드러난다. 쌀 생산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섭취량은 매년 1석이 안 되지만, 일본인의 소비량은 1석을 넘겼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만으로도 이런 참담한 실상이 드러난다.
위 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참담한 실상은 한반도 거주 한국인과 일본 거주 한국인의 식생활 차이에서도 표출된다. 농림성 같은 일본 정부 자료를 분석한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생활의 지역성과 식민지성'(고려사학회가 2019년 발행한 <한국사학보> 제75호)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한국에서 쌀이 생산되는 데도 한국인 87%는 쌀을 제대로 먹지 못한 데 반해, 일본에 가서 노동 일이나 날품팔이를 하는 한국인들의 생활은 달랐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살기 힘든 이들이었다. 조선에서 이들은 쌀을 먹는 13%에 끼지 못했다. 이들이 속한 쪽은 1년 내내 동물성 단백질을 먹기 힘든 계층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일본에 가기만 하면, 돈을 아무리 적게 번다 해도 일년 내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생산한 쌀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넘쳐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아일보> '조선 쌀을 막지 말라' 기사의 실체
하지만 이영훈 교수는 그것을 수탈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반일 종족주의> 제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쌀 수탈을 묵인하고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바보라는 것인가?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글이다.
그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지 않았겠느냐고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이 지금의 언론처럼 보도의 자유를 누렸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쌀 증산량에 비해 한국인 섭취량이 줄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때문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들의 쌀 섭취량이 감소한 것은 수탈의 결과가 아니라 인구증가의 결과라는 것이다. 식민지 한국 내부에서 책임 소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인식인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은 언뜻 보면 총독부에 유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불리하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겠다고 들어온 총독부가 한국인 인구증가도 고려하지 않고 쌀 정책을 결정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쌀의 대일 유출을 조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무책임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을 수탈할 의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쌀 섭취량이 감소한 원인을 인구증가로 돌린 뒤, 이영훈 교수는 1931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조선미 이입제한엔 절대 반대'를 거론하면서 화제를 전환한다. 조선 쌀의 유입으로 피해를 본 일본 농민들이 조선미 유입을 반대하는 현상을 거론하면서, 이 기사는 '조선 쌀을 막지 말라'는 항의의 의견을 내보냈다. 이 기사의 결론 부분은 이렇다.
이 조금이라도(此毫) 조선 쌀의 일본 판매를 방해하는 게 있으면 절대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이 기사를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동아일보>는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 단호히 반대"했다면서 이렇게 해석한다.
산미증식으로 쌀 유통량이 늘어났는데도 한국 쌀값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이 한국 쌀을 구매해줬기 때문이고 이 덕분에 한국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쌀 유입을 반대하는 일본 농민들에 맞서 <동아일보>가 '한국 쌀을 막지 말라'는 경고성 기사를 실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싫어했다면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내보냈겠냐는 게 이영훈 교수의 생각이다.
그런 뒤 그는 1인당 쌀 섭취량이 감소한 문제를 재차 거론한다. "쌀을 수출한 것이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온 원인은 아닙니다"라고 강조한 뒤 송이버섯 비유를 꺼낸다.
한국인들이 송이버섯을 수출하기 위해 자체 소비를 줄인다고 해서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일제하 한국인들이 일본에 쌀을 수출하느라 쌀을 못 먹었다 하여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쌀은 핵심 식량이고 송이버섯은 그렇지 않다는 이치를 도외시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농민'과 '지주'... 착각을 유도하는 고약한 장치
이 대목에서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다. 위 <동아일보>에 따르면, 1931년 당시의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일제의 쌀 정책이 식민지에 도움이 됐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말을 듣다 보면, 일제 식민지배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 생길 여지가 있는 것은 이영훈 교수가 글 속에 '장치'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농민'이란 표현을 강조해서 사용했다.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희망했으며 그런 판매가 한국에 이익이 됐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만약 그가 '조선 농민' 대신 '조선 지주'란 표현을 썼다면, <동아일보>가 쌀의 대일 판매를 지원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일제의 쌀 정책으로 대다수 한국인이 수탈을 당하는 가운데 소수의 지주계급만큼은 총독부와의 협력 하에 이익을 봤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났을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지주'를 '농민'으로 바꾸는 바람에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유통회사 대리점을 경영하는 사람은 상인으로 불릴 수 있어도, 유통회사 본사의 사장은 상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유통회사를 경영하므로 상인인 것은 맞지만, 그 표현으로는 그가 하는 일과 그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지주도 농민이기는 하지만, 농민이란 표현으로는 지주의 기능과 지위를 정확히 표시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농민'이란 표현은 지주보다는 소작농을 먼저 연상시키기 마련이다. 이영훈 교수가 '조선 지주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고 하지 않고, '조선 농민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고 하는 바람에 독자들이 착오를 일으킬 소지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쌀의 대일 판매로 이익을 본 것이 소수의 지주계급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영훈 교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제3장 본문의 후반부에서 그 점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는 이렇게 서술했다.
쌀의 대일 판매로 득을 본 것은 3.6%에 불과한 지주계급이나 그들에 필적하는 소수의 부유 자작농뿐이었다는 점을 이영훈 교수도 인정했다. 일반 농민인 소작농한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음을 그도 인정한 것이다. 소작농들은 쌀 섭취량 감소로 생활고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쌀의 대일 판매가 총독부 지지 계층인 지주계급한테만 유리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 농민들이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며 착오를 유도했던 것이다.
그가 쌀의 대일 판매로 소수 지주들만 이익을 봤다는, 자기 주장에 해가 되는 말을 한 이유가 있다. 한국 소작농들이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은 일본 때문이 아니라 지주계급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말을 하다 보니 쌀의 대일 판매로 이익을 본 게 지주계급뿐이었음을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낙성대경제연구소에 포진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은 고약하다. 한국인들의 착각을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는 허술하다. 일제의 쌀 수탈을 부정하는 그들의 논리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의 논리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논리도 일본 우익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양심적인 한국 지식인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고마워하고 있다는 선전을 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가 한국에 해가 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자, 낙성대경제연구소가 내세우는 것 중 하나는 '일제에 의한 식량 수탈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영훈과 김낙년·김용삼·주익종·정안기·이우연이 함께 쓴 <반일 종족주의> 제3장 '식량을 수탈했다고?' 편에 이런 주장이 담겨 있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조선총독부 자료
식량 수탈 혹은 쌀 수탈로 한민족이 고난을 겪었다는 점은 한국사 교과서에 잘 소개돼 있다. 쌀 증산을 목표로 일제가 시행한 산미증식계획이 한국이 아닌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국사편찬위원회가 2007년 발행한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로 설명됐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에 근거한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일제강점 2년 뒤인 1912년에 1156만 8천 석이었다. 산미증식의 결과로 이 양은 1928년에 1729만 8천 석이 됐다. 1912년에 비해 49.5%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으로 판매된 양이 1912년에는 291만 석, 1928년에는 740만 5천 석이다. 154.5% 증가한 것이다. 쌀 생산량은 49.5% 증가한 데 반해, 대일 판매량은 3배 이상이나 증가한 것이다.
그럼, 증가된 생산분만큼만 일본으로 넘어간 것일까? 1912년과 1928년을 비교하면, 증산분만큼만 넘어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1912년에는 1156만 8천 석이 생산되고 1928년에는 1729만 8천 석이 생산됐다. 461만 6천 석이 증산된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넘어간 쌀은 1912년 291만 석, 1928년 740만 5천 석이다. 449만 5천 석이 더 넘어간 것이다. 이것만 보면, 대일 판매량의 증가분이 증산량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다른 연도들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간 해들이 발견된다. 1912년과 비교할 때, 1929년에는 194만 3천 석이 증산됐지만 대일 판매량은 269만 9천 석이 증가했다. 1930년에도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갔다.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점은 한국인의 쌀 섭취량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표에 따르면, 1912년에 1인당 연간 0.772석이었던 1인당 섭취량이 1929년에는 0.446석으로 떨어졌다. 쌀이 증산됐는데도 섭취량은 줄어든 것이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점은 한·일 양쪽의 섭취량을 비교해보면 더 잘 드러난다. 쌀 생산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섭취량은 매년 1석이 안 되지만, 일본인의 소비량은 1석을 넘겼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만으로도 이런 참담한 실상이 드러난다.
위 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참담한 실상은 한반도 거주 한국인과 일본 거주 한국인의 식생활 차이에서도 표출된다. 농림성 같은 일본 정부 자료를 분석한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생활의 지역성과 식민지성'(고려사학회가 2019년 발행한 <한국사학보> 제75호)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주식은 전체적으로 쌀만을 섭취하는 경우는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보리 및 다양한 잡곡을 혼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중 약 30%는 1년 내내 육류·생선·계란 등의 어떠한 동물성 단백질도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
한국에서 쌀이 생산되는 데도 한국인 87%는 쌀을 제대로 먹지 못한 데 반해, 일본에 가서 노동 일이나 날품팔이를 하는 한국인들의 생활은 달랐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재일 조선인은 주식으로 백미를 섭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거의 최하층이었지만, 쌀을 구입해서 쌀밥을 지어먹었다."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살기 힘든 이들이었다. 조선에서 이들은 쌀을 먹는 13%에 끼지 못했다. 이들이 속한 쪽은 1년 내내 동물성 단백질을 먹기 힘든 계층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일본에 가기만 하면, 돈을 아무리 적게 번다 해도 일년 내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생산한 쌀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넘쳐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아일보> '조선 쌀을 막지 말라' 기사의 실체
하지만 이영훈 교수는 그것을 수탈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반일 종족주의> 제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과서의 서술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누군가가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한다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가만히 참고 있을 농민도 없겠거니와, 그것이 곧 신문에 보도될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쌀 수탈을 묵인하고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바보라는 것인가?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글이다.
그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지 않았겠느냐고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이 지금의 언론처럼 보도의 자유를 누렸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쌀 증산량에 비해 한국인 섭취량이 줄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때문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말한다.
"생산량에서 수출량을 빼고 수입량을 더해서 구한 국내 소비량은 정체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쌀 섭취량이 감소한 것은 수탈의 결과가 아니라 인구증가의 결과라는 것이다. 식민지 한국 내부에서 책임 소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인식인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은 언뜻 보면 총독부에 유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불리하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겠다고 들어온 총독부가 한국인 인구증가도 고려하지 않고 쌀 정책을 결정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쌀의 대일 유출을 조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무책임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을 수탈할 의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쌀 섭취량이 감소한 원인을 인구증가로 돌린 뒤, 이영훈 교수는 1931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조선미 이입제한엔 절대 반대'를 거론하면서 화제를 전환한다. 조선 쌀의 유입으로 피해를 본 일본 농민들이 조선미 유입을 반대하는 현상을 거론하면서, 이 기사는 '조선 쌀을 막지 말라'는 항의의 의견을 내보냈다. 이 기사의 결론 부분은 이렇다.
▲ 본문에 인용된 <동아일보> 기사. | |
ⓒ 동아일보 |
"조선의 입장으로 앉아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물론하고 어떠한 종류의 이입 제한이든지 그것이 차호(此毫)라도 조선미의 일본 유출을 방해하는 성질의 것이면 차(此)를 절대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이 조금이라도(此毫) 조선 쌀의 일본 판매를 방해하는 게 있으면 절대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이 기사를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동아일보>는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 단호히 반대"했다면서 이렇게 해석한다.
"이를 거꾸로 보면, 일본이라는 쌀의 대규모 수출 시장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쌀 생산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쌀값은 불리해지지 않았고, 그것이 조선 농민의 소득 증가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미증식으로 쌀 유통량이 늘어났는데도 한국 쌀값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이 한국 쌀을 구매해줬기 때문이고 이 덕분에 한국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쌀 유입을 반대하는 일본 농민들에 맞서 <동아일보>가 '한국 쌀을 막지 말라'는 경고성 기사를 실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싫어했다면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내보냈겠냐는 게 이영훈 교수의 생각이다.
그런 뒤 그는 1인당 쌀 섭취량이 감소한 문제를 재차 거론한다. "쌀을 수출한 것이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온 원인은 아닙니다"라고 강조한 뒤 송이버섯 비유를 꺼낸다.
"요즘 송이버섯은 귀하고 하도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먹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송이버섯 사랑은 유별나서 일본에서도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한국의 송이버섯 채취 농가가 생산량을 늘렸다고 해도, 더 많이 수출하고 나면 송이버섯의 한국 내 소비가 줄어들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송이버섯을 수출하기 위해 자체 소비를 줄인다고 해서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일제하 한국인들이 일본에 쌀을 수출하느라 쌀을 못 먹었다 하여 생활수준이 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쌀은 핵심 식량이고 송이버섯은 그렇지 않다는 이치를 도외시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농민'과 '지주'... 착각을 유도하는 고약한 장치
이 대목에서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다. 위 <동아일보>에 따르면, 1931년 당시의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일제의 쌀 정책이 식민지에 도움이 됐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말을 듣다 보면, 일제 식민지배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이 생길 여지가 있는 것은 이영훈 교수가 글 속에 '장치'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농민'이란 표현을 강조해서 사용했다. 한국인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희망했으며 그런 판매가 한국에 이익이 됐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만약 그가 '조선 농민' 대신 '조선 지주'란 표현을 썼다면, <동아일보>가 쌀의 대일 판매를 지원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일제의 쌀 정책으로 대다수 한국인이 수탈을 당하는 가운데 소수의 지주계급만큼은 총독부와의 협력 하에 이익을 봤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났을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지주'를 '농민'으로 바꾸는 바람에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유통회사 대리점을 경영하는 사람은 상인으로 불릴 수 있어도, 유통회사 본사의 사장은 상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유통회사를 경영하므로 상인인 것은 맞지만, 그 표현으로는 그가 하는 일과 그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지주도 농민이기는 하지만, 농민이란 표현으로는 지주의 기능과 지위를 정확히 표시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농민'이란 표현은 지주보다는 소작농을 먼저 연상시키기 마련이다. 이영훈 교수가 '조선 지주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고 하지 않고, '조선 농민들이 쌀의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고 하는 바람에 독자들이 착오를 일으킬 소지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쌀의 대일 판매로 이익을 본 것이 소수의 지주계급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영훈 교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제3장 본문의 후반부에서 그 점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는 이렇게 서술했다.
"전체 농가 중에서 지주의 비중은 3.6%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작료 수입을 통해 전체 쌀 생산량의 37%를 취득하고 있었습니다. 자가 소비를 제하고 상품화되는 쌀을 기준으로 하면 지주의 몫은 50% 이상으로 늘어납니다. 앞에서 쌀이 수출 상품이 되어 조선의 농민들이 유리해졌음을 언급했지만, 그 혜택은 쌀 판매량이 많은 지주나 자작농에게 집중되었고, 소작농에게 돌아간 것은 미미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쌀의 대일 판매로 득을 본 것은 3.6%에 불과한 지주계급이나 그들에 필적하는 소수의 부유 자작농뿐이었다는 점을 이영훈 교수도 인정했다. 일반 농민인 소작농한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음을 그도 인정한 것이다. 소작농들은 쌀 섭취량 감소로 생활고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쌀의 대일 판매가 총독부 지지 계층인 지주계급한테만 유리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 농민들이 대일 판매를 찬성했다'며 착오를 유도했던 것이다.
그가 쌀의 대일 판매로 소수 지주들만 이익을 봤다는, 자기 주장에 해가 되는 말을 한 이유가 있다. 한국 소작농들이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은 일본 때문이 아니라 지주계급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말을 하다 보니 쌀의 대일 판매로 이익을 본 게 지주계급뿐이었음을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낙성대경제연구소에 포진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은 고약하다. 한국인들의 착각을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는 허술하다. 일제의 쌀 수탈을 부정하는 그들의 논리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의 논리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논리도 일본 우익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양심적인 한국 지식인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고마워하고 있다는 선전을 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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