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한만호씨가 죽었다는 소문을 언뜻 귓전에 들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름, 구태여 기억해 내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한명숙 전 총리를 엮어 꼬박 2년 징역을 살게 한 이른바 ‘한명숙 전 총리 정치자금수수사건’의 핵심 증인이다.
오늘 아침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의 사망기사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이 글이 그의 죽음에 관한 최초의 공개 부고가 아닌가 싶다. 살았으면 올 58세. 너무 이른 죽음일 뿐 아니라 아마도 비참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의 핵심 중 핵심 증인이다. 사건 자체가 이 인물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13대째 고양시에 살았던 토박이. 부친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대규모 꽃농장을 할 만큼 부유했다. 이를 배경으로 1994년 건설회사 한신건영을 설립해 2008년 부도가 날 때까지 경영했다. 2008년 부도가 났을 뿐 아니라 사기 등 혐의로 3년형 선고를 받고 징역을 살았다. 2010년 3월31일 통영교도소에 수감 중 영문도 모른 채 서울구치소로 이감된다.
이때부터 검찰은 무려 73차례나 그를 ‘불러 조져가며’ “한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전달했다”는 혐의사실을 만들었다.
한 전 총리 1차 공판은 2010년 12월6일 열렸다. 12월20일 열린 2차 공판에서 한만호는 극적으로 자신의 증언을 번복했다.
“저는 한 전 총리에게 어떠한 정치자금도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비겁하고 조악한 저로 인해 누명을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재판 속행의 이유가 소멸됐음에도 검찰은 강행했다. 이때부터 재판은 거의 한만호와 감찰, 검찰 측 증인들과의 싸움 양상이 됐다. 검찰은 한 총리 재판이 진행되던 2011년 7월 그를 ‘위증죄’로 기소했다. 2011년 10월31일 1심 재판부는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13년 9월16일 2심 재판부는 단 3차례 공판 끝에 1심을 뒤집고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 추징금 8억8천만 원 유죄를 선고했다. 악명높은 정형식 판사. 2015년 8월23일 대법원은 한 전 총리 유죄를 확정했다.
이와 동시에 한만호 위증죄에 대한 재판이 4년여 만에 속개돼 이듬해 2016년 5월19일 징역 3년이 선고됐다. 위증죄로서는 유례가 없는 중형이었다. 2016년 12월 징역 2년으로 감형됐다.
나는 지금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을 새삼 복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검찰이 한 번 표적을 삼은 사람에 대한 수사가 얼마나 집요한 지, 그 수사를 방해하는 사람에 대한 응징이 얼마나 잔혹한 지, 그것을 상기하고 싶은 것이다.
한만호는 검찰의 의도에 협조하면 자신이 가석방을 받을 수도 있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다. (검찰의 회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재판정에서 양심선언 한 것은 검찰에서 당초 진술을 아무리 번복해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검찰의 협박)
검찰은 한만호의 양심선언 후, 연로한 그의 부모들을 찾아 회유하고 협박했으며 감옥에서까지 감시자를 붙였다. 그리고 끝내 그를 감옥에 쳐넣었다.
결국 한만호는 순간적인 실수로 그의 인생을 망치고 쓸쓸히 죽었다. 애초 검찰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가석방이니 사업 재기 같은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어떠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고 남은 형기 마치고 나와 남은 재산 추스르며 잘 살았을 것이다. 뒤늦게 양심선언하지 않고 검찰에 순종했으면 곱징역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대가는 혹독을 넘어 참혹했다. 그의 이른 사인은 오랜 감옥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불면과 술로 인한 육체적 병일 수도 있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홧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한만호씨가 ‘검찰주의자’들이 만든 참극의 희생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믿는다.
어제 윤석열 검찰청장은 자신이 ‘검찰주의자’가 아니라 ‘헌법주의자’라고 했다. 오늘은 또 검찰이 이른바 ‘조국 펀드’ 운용사와 투자사 대표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뉴스가 넘친다.
내가 한참 지난 ‘한만호’라는 이름을 소환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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