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화재로 7명이 숨지고 11명이 부상당한 서울 종로 고시원 화재 현장 앞에 희생자를 기리는 꽃다발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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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새벽 7명의 목숨을 앗아간 고시원 화재가 발생한 지 13일로 나흘째다. 고시원 앞에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12일 낮 검은 그을음과 탄내가 채 가시지 않은 서울 종로구 관수동 고시원 화재 현장 앞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꽃들과 물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청계천가엔 이른바 '홈리스' 노동자의 주거권 보장을 촉구하는 현수막과 추모 리본이 잔뜩 걸려 있었다. 오가던 시민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념하기도 했다.
종로 고시원 화재, '홈리스 노동자' 주거권 문제로 확산
▲ 윤성노 전국세입자협회 국장이 12일 낮 종로 고시원 화재 현장을 찾아 헌화대를 정리하고 있다. 지난 9일 새벽 이 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7명이 목숨을 잃고 11명이 다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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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첫날 헌화로 희생자를 기렸던 윤성노 전국세입자협회 국장은 이날도 어김없이 화재 현장을 찾아 헌화대를 정리하고 쌓인 낙엽을 치웠다. 자신도 10여 년 전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잠시 살았다는 윤 국장은 "창문도 없는 방이었는데 옆에서 코고는 소리, TV 소리 다 들리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면서 "더 있다간 정신병이라도 걸릴 것 같아 한 달도 못 버티고 나왔다"라고 털어놨다.
윤 국장은 "이 근처(종로3가)에 인력사무소들이 몰려 있어 일거리도 많고 교통비도 거의 안 들고 밥값도 아낄 수 있어 일용직 노동자들 가운데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주로 나이 든 분들이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이제는 전월세 보증금이 없어 집을 못 구하는 청년 세대로까지 전이되고 있다"고 밝혔다. 화재가 난 고시원 역시 보증금 없이 월 25만~30만 원에 식사까지 제공했다.
윤 국장은 비슷한 연배인 고인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다"면서 "우체국에서 일했지만 비정규직으로 한 달에 200만 원 벌기도 힘든데, 그동안 고시원에서 돈 아껴가면서 전세 보증금이라도 모으려고 악착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실제 조씨의 아버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생활이 넉넉하지 않아 가급적 돈 덜 들이겠다고 (고시원에서) 생활했다"면서도 "좁은 방에서 생활해 불편해 했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아파트를 한 채 사주든지 전세를 얻어주든지 했을 것"이라고 말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거기는 밥을 준대요"
▲ 9일 고시원 화재로 숨진 30대 노동자가 일하던 서울의 한 우체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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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살았던 고시원에서 직장까지는 지하철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매일 오후 2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우편물을 분류하고 옮기는 고된 일과였지만, 직장 동료들 사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붙임성이 좋고 명랑했다고 한다.
지난 2009년 입사 때부터 고인과 함께 일했다는 A씨는 12일 "(고인은) 고향에서 공익근무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섀시 공장, 편의점 물류창고 등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하다 2009년 입사했다"면서 "당시 기본급과 초과수당을 합쳐도 월 100만 원 정도 밖에 안 돼 그때부터 고시원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A씨는 "성격이 참 밝아 처음 보는 사람도 '형! 형!' 하면서 잘 따르고 야구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는 보통 젊은 친구였다"라면서 "월급 일정 부분을 매달 시골에 보내고, 신발 하나 옷 하나 제대로 사 입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라고 밝혔다.
A씨는 "명절 때 시골에 냉장고나 대형 TV를 보냈다며 좋아하던 모습이 기억난다"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거의 투자하지 않고 지출하지 않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갈 줄 누가 알았겠느냐"라며 안타까워했다.
고인과 비슷한 연배인 동료 B씨도 "9년 동안 커피 한 잔 안 뽑아먹고 지독하게 돈을 모아 7천만 원을 만들었다는데, 고위 공무원들 1년 연봉밖에 안 된다"면서 "우리가 받는 처우가 좀 더 나았으면 (고인이 고시원에서 생활하지 않고)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주변 동료들을 더 안타깝게 하는 건 지난 5, 6월쯤 고인이 원래 살던 고시원이 재개발로 문을 닫으면서 지금 있는 고시원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마침 회사 근처에도 고시원이 많이 있고 교통비도 아낄 수 있으니 이쪽으로 오라고 권했더니, (이번에 사고가 난) 거기는 밥을 준다면서 그냥 있겠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종로에 자리 잡아서 익숙하니까 떠나기도 싫었을 거예요."
A씨는 "고인은 9년 동안 단 한 번도 무단결근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친구였다"라면서 "사고 당일 웬일로 출근하지 않아 연락처를 수소문해 보니 집주소가 관수동 고시원으로 돼 있어 걱정하면서도 차라리 어디서 영화를 보다 잠들었길 바랐다"고 밝혔다.
우리는... '지옥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지난 9일 새벽 화재로 7명이 숨진 종로 고시원 앞 청계천가에 홈리스 노동자의 주거권 보장을 촉구하는 현수막과 추모 리본이 걸려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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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사망 사실이 알려진 뒤 직장도 침울한 분위기라고 한다. 특히 고인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동료들 역시 고시원을 비롯한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B씨는 고인이 평소 결혼하고 싶다면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한 적도 있다면서, 자신들이 연애, 결혼, 출산뿐 아니라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이른바 'N포 세대'라고 스스로 밝혔다.
조씨는 계약직으로 입사한 뒤 2년이 지나 무기계약직(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정년이 보장되고 공무원 복무지침까지 따르지만, 급여나 처우는 공무원에 크게 못 미쳤다. 10년 가까이 일했던 고인의 월 급여 수준은 170만~180만 원 정도로 200만 원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A씨는 "이 정도 벌어서는 결혼하기가 쉽지 않아 남성 동료들 가운데 유독 미혼이 많다"면서 "밤 11시에 퇴근하면 보통 다들 자는 시간이라 사람 사귀기도 어렵고, 심지어 오후 9시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 7~8시까지 일하는 야간근무조도 있다"고 밝혔다.
고인은 왜 그토록 어렵게 돈을 모으려 했을까? A씨는 "고인이 평소 돈을 모아서 나중에 시골에 땅도 사고 집도 사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50대인 A씨가 보기에도 'N포 세대'에겐 꿈조차 사치다.
"한 후배에게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 꿈을 가지라는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어요. 지금 20~30대는 자신의 부모를 보면서 꿈을 갖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 아무리 노력해도 집을 살 수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공교롭게 불에 탄 고시원 맞은편에선 '전태일 노동복합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내년 3월 건물이 완공되면 전태일 기념관을 비롯해 노동권익센터, 노동자 건강증진센터 등 소외된 노동자를 위한 시설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윤성노 국장은 "내일(13일)이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날이지만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안전에 취약한 고시원과 같은 '도시 쪽방 사무실'을 없애고 보증금 없이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공동 주거 시설을 정부와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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