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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6일 월요일

백범 김구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선생이 묻힌 효창공원이 국립묘지로 성역화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정운현 | 2017-06-26 15:10:3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백범 김구 선생의 이력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백범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한번 있다. 한민당 수석총무 설산 장덕수(張德秀) 암살사건과 관련해서였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에 이어 설산 장덕수가 1947년 12월 7일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당시 설산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문제를 두고 백범과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도 앞장서서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백범이 암살 배후인물로 오해를 사게 됐다.
5차 공판이 열린 4월 8일, 미군정 군사법정은 백범 앞으로 12일 오전 9시 증인으로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백범에게 소환장을 보낸 사람은 재판장이 아니라 미합중국 대통령 트루먼이었다. 일개 살인사건에 증인 소환 요청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명의로 소환장을 발부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증인 출석을 하루 앞둔 4월 11일 백범은 자신이 이 사건과 무관함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금번 군율(軍律)재판소에 출정함은 나를 미국대통령 트루만 씨의 명의로 불렀으므로 국제 예의를 존중하고자 함이지 내가 증인이 될 만한 사실이나 자료를 가진 까닭은 아니다. 내가 장 씨 사건에 관련이 있는 것처럼 발표된 데 대해서는 나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그것은 담화를 발표한 그 부문의 모략이며, 따라서 그 부문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설산 장덕수 암살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백범 김구 선생
8차 공판이 열린 3월 12일, 백범이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9시 45분 미군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범이 입정했다. 검은 두루마기 차림에 검은 구두, 굵은 검은 테 안경에 자주색 토시를 끼고 검은 색 중절모를 손에 든 백범이 법정 한 복판에 놓인 증인석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통역은 김용식(金溶植·전 외무장관). 곧이어 검사의 인정신문이 시작되자 검사가 그에게 물었다.
“직업은 무엇이오?”
그러자 백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당시 법정에서 취재를 하고 있던 조선통신사 사회부 기자 조덕송(趙德松·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이 장면을 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순간 가슴이 뻑뻑해지도록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격에 자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명답이 아닌가! 나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짐을 의식했다.”고 썼다. (필자는 반민특위 관련 증언 청취 차 조덕송 선생을 여러 번 만났는데 조 선생은 반민특위 출입기자로도 활동했다.)
이어 강거복 변호인과 검사의 증인신문이 시작됐다. 몇 군데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변호인 : 장덕수 씨를 아십니까?
증 인 : 잘 알지요.
변호인 : 언제부터 아십니까?
증 인 : 장덕수 씨가 일곱 살 때부터 아는 사이요.
변호인 : 김석황이나 신일준이나 기타 사람에게 장덕수 사건에 대해서 무슨 명령을 하신 일은 전혀 없습니까?
증 인 : 전혀 없소.
검 사 : 1947년 8월이나 혹은 9월쯤 장덕수 씨가 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습니까?
증 인 : 종종 찾아왔소.
검 사 :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었습니까?
증 인 : 사제 간이니까…… 혹 병문안으로 온 적도 있겠고 하니 그 목적이란 것을 명백히 지적할 기억은 없소.
검 사 : 장 씨가 찾아간 목적은 선생이 임시정부로 하여금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었소?
증 인 : 원 답답하구려…… 임시정부는 기능이 없는데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겠소?
검 사 : 직접 본인이 장 씨에게 불만하다고 말한 적은 있소?
증 인 : 없소.
검 사 : 작년 8월이나 9월 중에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신일준 4명이 찾아왔을 때 장 씨를 없애버리라고 말한 적은 없소?
증 인 : 없소.
검 사 : 확실하오?
증 인 : 확실하오.
검 사 ; 다른 것은 기억이 없다면서 이 기억만은 확실합니까?
증 인 : 사람을 죽이라니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니만치 확실치 않을 수 없소.
검 사 : 내가 장시간에 걸쳐서 질문하는 목적은 선생의 본심을 혹 오해해 가지고 아랫사람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키지나 않았는가 싶어서 그러는 것인데 어찌 생각하오?
증 인 : 나는 동족과 조국을 사랑하오. 그러한 나로서 어느 좌석에서든지 그놈 죽일 놈이니 마니 함부로 말할 리가 없소.
검 사 : 그렇다면 선생의 제자 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증 인 :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하오.
검 사 :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오?
증 인 :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 단체 등의 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 죽일 리가 없소.
검 사 : 그러면 김석황은 선생을 두고 거짓말을 한 셈이오?
증 인 : 그렇소. 거짓말을 안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리 된 것 같소.
검 사 : 무슨 환경으로 그랬을까요?
증 인 : 그야 경찰에서 고문도 했다고 합디다.
검 사 : 경찰에서 고문을 했다는 말은 확실히 보고 하는 말이오? 짐작으로 하는 말이오?
증 인 : 내 눈으로 고문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소만 고문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백범이 장덕수 암살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것은 범인 김석황(金錫璜)의 기소장 내용 때문이었다. 당시 한독당 중앙위원으로 있던 김석황은 조사과정에서 자신이 백범을 찾아갔을 때 백범이 장덕수 등을 두고 “이놈들은 나쁜 놈이야”라고 말했으며, 그 후 살해계획을 백범에게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 말하더라고 진술했다. 검사는 이 점을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나 별다른 애초에 관련이 없었으니 성과나 나올 리 만무했다.
증인신문은 무려 네 시간 반 만에야 끝이 났다. 재판장은 15일 아침 9시부터 공판을 속개하며 백범에게 다시 증인으로 출두해 줄 것을 요청하고 폐정을 선언하였다. 3월 15일 9차 공판에 백범이 증인으로 다시 출석하였다. 그런데 이날 재판정에서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증언 도중에 백범이 퇴정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오전 9시, 백범이 공판정에 나와 증인석에 앉자 검사가 곧바로 신문을 시작했다.
검 사 : 지난 금요일(12일) 내가 신문한데 대하여 선생이 답변한 내용 중에서 피고인들이 진술하기를 모두 선생의 명령을 받아서 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물었던바 선생은 모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답변한 바 있는데 그러면 그 모략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증 인 : 대답을 못하겠소.
검 사 : 대답을 못한다는 것은 그 답변이 혹 피고인들에게 대하여 유죄가 되든 무죄가 되든 하여간 무슨 영향을 줄까 싶어 그러는 것입니까?
검사의 질문에 백범은 즉답을 하지 않은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검사 대신 재판위원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소.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미국 대통령의 요청이 있어 국제 예양(禮讓)을 존중해서 증인으로 여기 나온 바인데 마치 나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듯하니 나로서는 매우 불만이오. 내가 지도자는 못되더라도 일개 선배요, 나라를 사랑하는 내게 대해서 법정에서 이렇듯 죄인취급을 함에는 나로서 이 이상 말 할 것이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만일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령을 띄워 잡아넣도록 하시오. 증인으로서는 더 말 할 것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
말을 마친 백범은 모자를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누구도 백범을 제지하지 못했다. 방청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채 법정 문을 나서기 전에 강거복 변호인이 급히 백범에게 다가와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백범이 다시 증인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 때 피고석에 앉아 있던 주범 박광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사형을 받아도 좋지만 저분(백범)은 왜 붙들어다 놓고 들볶는 거요?”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장내가 수습되자 강거복 변호인이 재판장에게 증인신문 종결을 요청했다. 재판장은 검사 측과 상의한 후 증인신문 종결을 선언했다. 백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을 빠져나왔다. 두 차례에 걸친 백범의 증인 출석은 이걸로 모두 끝이 났다. 나중에 재판부는 백범이 장덕수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미묘한 시기에 백범이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함으로써 세간의 오해를 사는 등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이는 당시 미군정과 한민당, 이승만 등이 노리던 바였다.
오늘은 백범 서거 68주기다. 일제하에서는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 후에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심초사하였으나 끝내 극우세력의 하수인인 안두희가 쏜 총탄에 생을 마감했다. 백범인들 티끌만한 오점이나 허물도 없을까마는 그만하면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는 발행될 예정이나 백범을 기리는 우표는 발행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는 하나 긴 안목에서 보면 역사는 그래도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선생이 묻힌 효창공원이 국립묘지로 성역화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선생의 안식을 기원한다.
포병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서거한 백범 선생
2017.6.26. 백범 선생 68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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