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룡. 그는 차관에서 해임되고, 장관에서는 면직됐다. 한 번은 진보정권인 노무현 정부, 또 한 번은 보수정권인 박근혜 정부 때였다. 헌정사에서 유례없이 두 번씩이나 쫓겨났지만, 그는 공직사회에선 롤모델로서 존경의 대상이다. 국민들에게도 영혼 있는 공무원의 대표자로 기억되고 있다. 비결이 뭘까. 그는 “그런 건 없다”고 잘라말했다. 대신 “나라에는 충성했지만, 정권에는 한 번도 충성하지 않았다”며 “코먼센스(상식)에 입각해 무거운 책임감으로 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후배 공무원들에게는 “공무원에게 신분 보장을 해주는 것은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지시받았을 때 따르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며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불이익을 받고 한직에 가 있으라”고 조언했다. 지난 19일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만나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와 공직자의 자세 등에 관해 긴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를 마친 유 전 장관이 뒤로 청와대가 보이는 광화문광장에 서 있다. 글 김종철 선임기자 philkim@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인터뷰
유진룡(60)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간신’들이 득세한 박근혜 정부 안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충신’이었습니다. 장관 재직 때 문화예술인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서 차별하면 안 된다고 진언했습니다. 또, 토론과 협의를 통한 국정운영을 대통령에게 간언했습니다.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요. 결과가 달라졌을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소신과 영혼을 가진 공직자가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자신이 나서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내부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지적한 사람이지만, 막상 정권의 몰락은 그에게도 심적으로 부담이었던 것 같았다. 탄핵 국면이 정리된 후에 다시 설득에 나섰다. 오랜 공직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사회를 위해 공적인 발언을 할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며 조심스레 다그친 끝에야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인터뷰는 지난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카페 ‘구문자답’에서 했으며, 이후 27일 전화로 한 차례 추가 질의응답을 했다.
“세월호 서명 등 정권 비판자 골라
차별하고 배제한 게 블랙리스트
‘홀로코스트’ 맞먹는 범죄행위
재발않게 책임 문제 정리해야”
“부당지시 거부할 자유 주려고
공무원의 신분 보장해 준 것”
“공직자는 누구 편이 돼선 안돼
정당하게 권한 행사해야”
-요즈음 어떻게 지내나.
“국민대 석좌교수로 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학기 내내 너무 악착같이 살지 말라고 해놓고 학기말에는 상대평가 때문에 학점을 악착같이 주어야 하는 상황이더라.(웃음) 학기 내내 거짓말을 한 셈이어서 그건 아니다 싶어 이번 학기부터는 행정대학원에서 리더십과 행정윤리 등을 강의한다.”
-대선 캠프에서 부르는 데는 없나?
“내가 안 갈 것을 뻔히 아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더라.”(웃음)
-정치할 계획은 없나?
“없다. 정말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014년 7월 문체부 장관에서 물러나는 과정은 유진룡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청와대는 후임자가 없는 상태에서 현직 장관을 전격적으로 면직했다. 그는 이임식도 없이 떠나야 했다. 모양새로는 쫓겨난 것이지만, 내막은 달랐다. 이미 한참 전인 그해 5월 자니윤씨의 한국관광공사 감사 임명에 반대하면서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밝힌 상태였다.
-장관에서 잘린 게 아니라 관뒀던 것인데.
“나는 내가 원해서 그만뒀다고 생각하는데 그쪽은 잘랐다고 한다. 김기춘씨가 비서실장으로 온 이후(2013년 8월) 블랙리스트 등의 업무 때문에 갈등을 겪었다. 더 버텨야 하나 관둬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정부 태도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내가 더 얘기해봐야 소용없겠다는 판단이 들어 관두겠다고 마음먹고 다음 개각 때는 반드시 빼달라고 얘기했다. 그쪽에서도 빼주겠다고 했다. 최근에 다른 이들의 법정 증언 내용을 보니까 그 사람들이 세월호 이후에 나를 자르기로 결심했더라. 그랬는데 내가 관두겠다고 하니까 자르는 즐거움을 빼앗겼다며 화를 냈다는 얘기를 모 인사에게 들었다.”
김기춘 온 뒤 영화 <변호인>부터 문제삼아
유 전 장관은 처음 장관직 제의를 수락할 땐 보람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유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았다”면서 “당신이 와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안고 가 주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부터 실망하기 시작했나?
“그전에도 여러 징조에 대해 얘기한 사람이 있었지만, 내가 실감한 것은 김기춘 실장이 온 뒤부터였다. 그가 온 뒤부터 부당한 지시가 계속 전달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였나?
“‘영화 <변호인>을 왜 막지 않고 나오게 놔두느냐, 게다가 문체부가 영화 제작에 돈까지 대느냐’는 등의 얘기였다. 나는 네 편 내 편 가리지 말고 일하자고 문체부 직원들과 약속한 터였다. 그런데 그것과 다른 지시가 내려오니 직원들이 죽을 맛이 됐다. 그 문제를 놔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2014년 1월29일 다른 보고를 핑계로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러면 안 된다, 원래대로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나와 약속했던) 원래대로 하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동석했던 모철민 수석에게 나는 앞으로 김 실장이 대통령 말과 다른 어떤 지시를 하더라도 따를 생각이 없으니 그에게 전하라고 얘기하고 헤어졌다. 그러자 김 실장은 ‘저놈한테 얘기해봐야 소용없구나’라고 생각했는지 씨제이(CJ)에 대한 압박 문제 등을 공정거래위원회 등 다른 기관에 지시했다.”
-블랙리스트가 문건으로 처음 내려온 것은 2014년 5월부터였다는데.
“세월호 사건이 나고 한달쯤 지난 후에 시작됐다. 사람들이 세월호 서명 등을 할 때였다. 김기춘 실장은 이념 문제였다고 하는데 이념 이전에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겨냥한 것이다. 명단을 보면 그들이 얘기하는 좌파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념 이전에 편가르기를 해서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만 골라서 차별했다는 것을 말한다.”
-세월호 이후에 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갔을까?
“나도 그 점이 이해가 안 되더라.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기에 당연히 슬픔을 공감하는 데서 시작을 했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사회는 일사불란해야 하고,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빨리 정리하고 잊혀져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월호 슬픔에 공감하고,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하자고 서명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집단으로 여겨진 듯하다. 그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차별하고 배제한 게 블랙리스트의 시작인 것 같다.”
-블랙리스트는 오래전에 없어졌던 것 아닌가?
“전두환 정권까지 있다가 없어졌는데 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살아났다. 물론 이전 정권에서도 네 편과 내 편을 가르고 내 편한테 떡을 좀 더 주는 정도는 있었다. 그것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남들이 알면 욕먹을 게 뻔하니까 산발적이고 몰래 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그 정도가 아니라 공권력과 공적 제도를 이용해서 광범위하게 차별했다. 민주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범죄행위다. 나는 그것을 나치가 유대인에게 가했던 홀로코스트 같은 일이라고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도 그게 무슨 문제냐 하고 있고, 일부 편드는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얘기한다. 일반 국민의 법의식이나 민주 가치에 대한 의식하고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가 정말 위험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10월25일 오전 청와대에서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 구현을 위한 문화융성위원회 2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동호 위원장(맨 왼쪽), 김기춘 비서실장(왼쪽), 유진룡 문체부 장관(오른쪽)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하위직, “더 비겁하지 말자”며 행동
-블랙리스트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지난해말 일부 언론과의 짧은 인터뷰와 올해 헌법재판소 증언 등을 통해 용기 있게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쉽지 않았을 텐데, 나설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김기춘 실장과 김종덕 문체부 장관 등이 국회 청문회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나서서 문제제기를 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 고민한 게 사실이다. 나는 그게 바른 일이 아니었다고 판단하지만, 그들이 얘기하듯이 어떤 면에서는 통치행위일 수도 있기에 그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내 생각과 다르다고 떠드는 게 옳은 것이냐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청문회에서 그런 적이 아예 없었다고 하는 걸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짚은 뒤에 법적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서 책임이 있다면 적절한 처벌을 해야만 더 이상 내 편 네 편 가르는 일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증언을 뒷받침할 물증이 중요했는데, 그건 문체부 공무원들 덕분인 것 같다. 청와대와 장관이 자료를 다 없애라고 지시했는데도 이들은 잘 보관하고 있었더라.
“그렇다.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여러 사실을 밝혀내는 데 문체부 실무자들이 굉장히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전모가 밝혀진 다음에는 국민과 문화예술인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책을 발표했다. 또 미르와 케이(K)스포츠재단을 취소했다. 정권의 윗사람들이 못 하게 방해했는데도 뿌리치고 했다. 자기 자리를 내놓고, 우리 이제라도 비겁해지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했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문체부 직원들은 블랙리스트를 집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이윤택씨나 창비 등 여러 사람과 단체를 몰래 빼줬다. 그 과정에서 핍박도 많이 받았다.”
-평소 후배들한테 상부의 부당한 지시에 대해서는 메모해서 기록을 남겨두라고 강조한 것으로 안다.
“공무원 경험상 직급이 올라갈수록 특히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가려면 과장 이하의 공무원들이 활발하게 서로 토론하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서 할 수 있도록 시스템 자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내 공로라기보다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메모도 역사의 기록으로서 남기자는 등의 얘기를 하긴 했다.”
-앞으로 차별과 배제는 안 되겠지만,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하는 데 앞장선 사람에 대해서는 새 정부에서 정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한다. 아직도 앞장섰던 사람들 중에서 반성을 하지 않거나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나한테 그러냐면서 말이다. 다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다. 반면에 하위직의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됐었다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 당신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랬느냐고 질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갈등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책임 문제도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지 앞으로 이런 일들이 재발되지 않을 것이다.”
-책임자에 대한 인적 청산을 말하는가?
“그렇다. 누가 지시자이고 누가 이행자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최소한 고위층의 지시자에 대해서는 분명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지금 기소된 사람 말고 다른 책임자들을 뜻하는가?
“그렇다. 기소된 사람들은 분명히 형사처벌돼야 한다. 그 나머지도 법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앞으로 재발이 안 된다. 다만, 블랙리스트 일부를 일부러 빼는 등 실행을 저지하려고 했던 대부분의 실무자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
-그런 책임을 묻게 되면 정권 편이 아닌 쪽을 박해한다고 주장하지 않겠나.
“그럴 수 있다. 그렇기에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도 그게 정의로운 거냐, 공평한 거냐 하는 측면에서 정말 세심하게 판단을 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부도 능력본위 인사해서
공무원에 자율성 최대한 줘야
내편 네편 가리기 시작하면
나라 망하기 시작하는 것”
장관 면직된 뒤 사찰 당해
협박으로 엔지오 접근 막기도
“돈이든 권력이든 더 받지않고
사회에 돌려주는 삶 살 계획”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잘못된 판단이나 정책에서 생기는 손실과 철밥통에서 생기는 비효율을 비교하면 잘못된 판단과 정책으로 인한 손실이 더 크다고 본다”며 공무원 신분 보장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근혜 정부 5년 가기 힘들 거라 봤다”
-지난해 후반부터 우리 사회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구속 기소 등 엄청난 격변을 겪고 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우선은 그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참 안타깝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그만두고 나올 때 이 정권이 끝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했나?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 한 사람이 완벽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옳지도 않거니와 굉장히 전제적이다. 그것은 매우 취약한 시스템이어서 커다란 사건이 벌어질 때 스스로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체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5년을 가기 힘들고, 5년을 그대로 가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후퇴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만둘 때 뻔히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토론과 협의로 국정 운영을 할 것을 박 대통령한테 진언했다. 그러나 말씀을 드리고 나오면서 달라지기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바뀌지 않았고,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인간적인 연민과, 나라가 이렇게 된 데 대한 책임감, 우울함 이런 것이 요즈음 나한테 있다.”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수준은 대단하지 않나. 어떤 이들은 명예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그렇다. 촛불집회 결과에 대해 촛불의 경험과 영향 때문에 앞으로 어떤 정권도 제대로 일을 못 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던데, 나는 그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그런 방식으론 일을 못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촛불집회에 가 본 적이 있나.
“못 갔다. 괜히 갔다가 오해를 살까 봐서.”
공무원은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행정의 민주적이며 능률적인 운영을 기하게 하는”(국가공무원법 제1조) 사람들이다. 즉, 정부 운영의 주체이다. 그 때문에 성격이 다른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공직사회는 홍역을 치른다. 정부 정책과 방침을 따르다 보면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공무원들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야 한다는 건, 말이 좋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상부 지시에 무조건 따르자니 양심에 어긋나고, 거부하자니 여러 불이익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공무원에게 신분 보장을 해주는 것은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지시받았을 때 따르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해서다,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불이익을 받고 한직에 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러다가 다시 기회가 오면 그 일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반드시 세태를 따르고 빨리 승진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중에 자기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를 생각해 봐라,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물론 자신의 소신과 양심이 옳으냐는 부분에 대해서도 자기 검증을 해야 한다. 이게 절대적으로 나쁜 짓이냐 아니면 부당한 정도냐, 내 소신과 양심이 잘못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코먼센스(상식)다. 그리고 제도 면에서는 공무원 신분 보장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공무원이 이미 철밥통이라면서 신분 보장을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잘못된 판단이나 정책에서 생기는 손실과 철밥통에서 생기는 비효율을 비교하면 어떤 게 클까. 나는 잘못된 판단과 정책으로 인한 손실이 더 크다고 본다.”
-새 정부한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뭔가.
“자율성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앞장서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잘못이다.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과거 산업시대에는 정부가 끌고 나갔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났다. 정부는 민간만큼 유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정부는 게임의 공정한 규칙을 만들어 게이머들이 지키도록 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응징함으로써 이 사회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는 믿음을 만들어주면 된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게 거꾸로 갔다.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고, 더구나 그것도 한 사람이 다 결정을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당신은 일은 잘하나 충성심이 부족해”
-역대 정권에서 문체부 산하기관장 등을 임명하면서 낙하산 인사로 갈등이 많았다. 누가 되든 새 정권도 이른바 철학이 같은 사람으로 임명하려고 하지 않겠나.
“민주사회에서 권력은 잡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맡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무원이든 공공기관이든 맡겨진 권력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갖고 판단해야 한다. 첫번째 기준은 능력이다. 능력이 충족되는 것을 기본 전제로, 같은 값이면 자기네들 사람을 쓸 수는 있다. 인지상정이니 어쩔 수가 없다. 능력과 상관없이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가리기 시작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디제이(DJ) 정부 때까지는 공직을 임명할 때 먼저 능력이 있느냐를 보고, 그다음에 내 편이냐를 따졌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해서 그 룰을 깨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그것이 깨진 게 노무현 정부라고 기억한다. 그 후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는 훨씬 더 심화됐다. 나뿐 아니라 많은 공무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다시 원래의 원칙대로 돌아가야 한다.”
유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8월에도 문화관광부 차관에서 전격 경질된 바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신문유통원 출범이 늦어지는 등 직무태만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아리랑티브이(TV) 부사장 등 산하기관장 임명 문제를 놓고 청와대 실세들과 빚었던 갈등이 원인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아무런 인연이 없는 유 전 장관을 발탁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차관에서 잘렸던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 아닌가?
“아마 그럴 것이다. 상대방의 적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누구 편도 아니고, 또 공무원은 누구 편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때 당신은 (이 정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니냐고 얘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국민이 맡겨준 권한의 일부를 행사하는 데 있어 책임감과 무거운 마음으로 해왔지, 너무나도 큰 권력을 받아서 기쁘다는 생각에서 일한 적이 없다.”
1975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유 전 장관은 1979년 제22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문체부의 전신인 문화공보부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능력 있고 일은 잘하지만 주관이 너무 뚜렷하다”는 평 때문에 한직을 떠돌기도 했으나,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에 의해 공보관에 발탁됐다.
-공보관 시절에 박지원 당시 장관과도 갈등을 빚을 정도로 소신파였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소신파라고 하는데 나는 소신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없다. 그때그때 판단해서 했을 뿐이다. 문화부 일로는 갈등이 없었을 텐데 그분이 문화 쪽 일만 한 게 아니지 않으냐. 나는 정부 입장에서 정당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행동했는데 그분은 그런 내 태도가 정권의 입장에서 서운했던 모양이다.(박지원 의원은 유 전 장관이 면직된 직후 트위터에 ‘당시 디제이 홍보 업무를 지시했다’고 썼다.) 그래서 나한테 ‘넌 이 자식아, 일은 잘할지는 몰라도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화를 냈다. 그런 질책을 세번째 받았을 때 내가 그랬다. 공무원한테 정권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지 말라, 조직과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정권을 위해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양반이 더 화가 나서 ‘나가, 이 자식아’라고 소리쳤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나도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한 30분 정도 있다가 장관실로 다시 부르더라. 또 한판 하려는구나라고 각오하고 갔는데 앉으라고 하더니 ‘생각해 보니까 당신 말이 맞기는 하더라, 앞으로 충성 얘기를 하지 않을 테니 지금처럼 일을 잘해라’라고 하더라.”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지난 19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학생운동으로 민주화…부채감 있어”
-정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게 하루이틀 된 게 아닌 것 같다.(웃음) 공무원 연수 때도 그만두라는 얘기를 들었다던데 맞나.
“그때는 정말 억울하다. 한달인가 두달인가 합숙을 하던 시절인데 연수가 거의 끝날 무렵에 교수부장이 잠깐 보자고 해서 갔더니, 자기가 보기에 당신은 공무원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자퇴하고 나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나는 나름 열심히 했는데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그가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
“그때는 유신 시절이어서 모든 게 다 규격화돼 있었다. 머리도 짧게 깎아야 되고 복장도 단정해야 하는데 난 머리도 복장도 불량했다. 하는 짓도 공무원이 뭐 저런가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가 자퇴 권유를 한 데 대한 반발심에서 나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무원 생활 첫 10년을 보냈던 것 같다.”
유 전 장관은 인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평양 등에서 목회 활동을 했던 할아버지(유두환·1877~1967)가 해방 이후 아내와 아들 여섯을 데리고 월남해 자리잡은 곳이 인천이다. 평안남도 순천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3·1 만세운동을 이끌고, 군자금을 모금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유 전 장관은 고교 수학 선생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서울로 이주했다. 명문인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무역학과를 나왔다.
-당시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는데 왜 하필 문화부를 지원했나?
“문화를 하면 재밌을 것 같더라. 중·고교 때 합창반을 하고, 대학 때는 연극반에 들어갔다가 잘린 적도 있다. 문화 쪽에 취향이 있었다. 돈 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싶기도 했다. 문화부에서는 당시 젊은 사람은 공보 쪽에 보냈고, 나이 든 분들은 문화 쪽 일을 했다. 공보 쪽이 당시 힘이 세서 승진도 잘되고 생기는 것도 많았다.(웃음) 나는 처음부터 문화 쪽 경험을 쌓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그분이 지금 부산영화제를 맡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이다.”
-대학 때는 유신 반대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
“별 특징이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지만,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용기는 없었다. 민주화 운동을 끌고 나간 선배와 동료, 후배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었고 나는 그 혜택을 받았다. 거기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그것을 갚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했다. 나름대로 정의롭게 살면서 민주화 이후에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노력하는 게 그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지메일 계정도 사찰 흔적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앞으로 계획은 있나?
“지난번에 차관을 그만둘 때 생각한 게 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사회에서 혜택을 받았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반납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더 이상 사회에서 돈이든 권력이든 뭐가 됐든 받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나, 앞으로는 그동안 살면서 얻은 지식이나 인적 네트워크 등을 다른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데 보태자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높은 자리나 돈을 많이 버는 데는 관심이 없다. 살면서 얻은 유형무형의 것들을 차츰 돌려주면서 살려고 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여담이라면서 장관을 그만둔 뒤 사찰당했던 경험을 들려줬다. 조원동 전 경제수석 등이 그런 얘기를 할 때는 설마 했는데 사실이더라고 했다.
“내가 철딱서니 없이 장관을 안 하겠다고 하니까 괘씸죄에 걸려서 면직 처리됐을 뿐 아니라 사찰을 하더라. 나와 만난 사람이 직장 상사한테 불려가서 너 왜 그런 사람을 만나고 다니냐고 추궁을 받았다. 또 어느 날 내 지메일 계정에 접근하는 기기 리스트를 보니까 우리 집안 식구들이 쓰지 않는 기기가 붙어 있더라. 뿐만 아니다. 내가 엔지오(NGO)에 참여해서 그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단체에 사람이 찾아가서 내가 관여하는지 여부를 꼬치꼬치 물어봤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나중에는 솔직히 겁도 났다. 이러다가 교통사고라도 나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더라. 그런 상태에서 국민대학교만 철없이 나한테 연락을 해왔다. 상황을 다 얘기해줬는데도 자기들은 괜찮으니 와서 강의를 해달라고 하더라.”
-엔지오를 찾아간 사람은 누구인지 아나?
“누군지 당연히 안 밝히죠. 거기에 대놓고 감히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고 하더라.”
-계좌는 혹시 안 뒤졌나?
“계좌는 사후에 통보해야 해서 그랬는지 안 뒤졌더라.”
그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한가지 부탁을 했다. 자기 개인 얘기는 안 쓸수록 좋은데, “너희는 어느 정권 문체부냐”는 비아냥을 들어 가면서도 블랙리스트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애썼던 문체부 실무자들의 노력과 고충은 꼭 기록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도맷금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옥석을 가려야 공직사회가 발전한다”고 덧붙였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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