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서품을 받는 후배들아
» 사제 서품식. 사진 박종식 기자
사제생활에 광야를 만날 때
-서품을 앞둔 후배 사제들에게-
사랑하는 아우님들과 한 주간 참 행복했습니다. 주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제직 준비의 마지막 여정에 함께 했다는 것이 너무나 큰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피정기간 함께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시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용감히 주님 제단에 나가는 여러분의 사제직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소명 서원이 일생을 통하여 주님 앞에 바쳐지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시대의 초상]
인류 문화사에 오늘날처럼 기술문명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며 황금송아지를 경배하고 육신과 영혼의 건강성을 타락시키는 우상의 시대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종교가 오늘날처럼 세인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천시되는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종교의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기업체나 사회단체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타락의 시대에 사제직의 소명이 더욱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새로운 일꾼들을 뽑아 추수밭으로 보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제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뽑으셨는데 그 이유를 [당신 곁에 두시고 파견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케 하시고, 악령을 추방하는 권능을 주려고] 했다고 분명하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장막을 지키며 오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성체성사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숭고한 소명에 응답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무소유의 사제]
사제는 무소유의 인간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사제 집안인 레위 지파에게는 물려줄 유산이 없고 오로지 야훼 하느님 자신이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 외에는 무소유의 삶이 운명입니다. 자발적 청빈을 자존심으로 여겨야 합니다.
[소비문화 시대의 사제]
현대사회의 악령은 과시욕과 비교행복을 부추기며 정보와 소비문화 마케팅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교육, 인간의 생노병사 모든 것을 상품적 가치로 평가하고 인간을 성과주의의 노예로 삼는 정말 악령이 판치는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영성과 인간성]
사제의 손은 분향을 드려 인간의 탄원을 하느님께 전달하는 메신저입니다. 사제 자신이 기도로서 분향의 연기를 뿜어내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사제이기 이전에 먼저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며 종교인이어야 함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겸손하고 예의범절과 사랑과 인정이 많은 사제가 되어주십시오. 사제이기 이전에 먼저 높은 도덕성과 정의감, 교양이 풍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선교의 핵심]
여러분은 모두 세계 각국에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파견될 선교사제들입니다. 인정과 윤리, 예의염치는 실종되어버렸고 정신세계와 사회정의, 공동체는 가정공동체마저 해체되어버리고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신앙하면서 남북분단 70년의 갈등과 분쟁으로 살아가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나라를 조국으로 둔,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사제로서 선교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의 빈곤의 대륙에 파견될 여러분은 예수를 전하고 세례를 베풀겠지만.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일이 그들에게 풍요와 부에 대한 로망을 거두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경제 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다가 오늘의 천박한 자본주의에 빠져버린 대한민국을 절대로 닮지 말아야 한다고 간증해야 합니다.
가난할지라도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인정을 나누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운 일인지, 노동할 수 있고 아기를 출산할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삶인지, 하느님 나라는 지상에서 그런 가치들이 지켜지고 공유되는 삶에 있다는 것을 선교해 주십시오. 이것은 살아있는 현실의 복음적 증거 입니다.
» 사제 서품식. 사진 신소영 기자
[순명]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입니다. 교회와 공동체의 건강성은 지체들의 건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순명이 지체로서의 자기 몸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웁니다. 한국외방선교회가 나를 만들고 내가 선교회를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서원]
지난 목요일 흰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우리는 미리내 김대건 신부님 묘소를 참배갔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겠다는 고백과 함께 사제의 서원을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고백을 드렸고, 주님께서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시던 당부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께 드린 서원을 반석위에 새기고 날마다 부족함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제사를 바쳐드려야 합니다. 교우들을 위해 우리 손으로 바치는 미사를 나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단 한번 뿐인 미사처럼 성심으로 봉헌하여야 합니다.
[서원의 봉헌]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 하시고는 이튼 날 정말로 당신 몸을 십자가로 바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상징이나 의미나 관념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산 사람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친 어린양의 목숨 자체입니다. 사제는 그 자신이 세상의 죄를 위해 바치는 속죄의 어린양입니다.
[사제생활에서 광야를 만날 때]
사제 서품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서품을 축하하는 인사에서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요 머지않아 광야의 목마름이 나타날 것입니다. 목은 마르고 타는 갈증은 푸른 풀밭과 물터를 찾아 헤매는 목마른 사슴처럼 방황할 것입니다.
특별히 일이 잘못되었을 때나 성과가 보이지 않을 때 입니다. 사제라는 정체성 혼돈과 시련의 먹구름이 걷히질 않고 위로와 힘이 되어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텅 빈 신작로 길을 홀로 한없이 걸어가는 고독한 나그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신 일도 사실은 나 처럼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하느님의 아들로 왔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는 오로지 보내신 아버지의 뜻만이 전부였고 그래서 자아가 없었기에 실패하신 사명과 죽음의 책임까지도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지신 일이 곧 부활입니다.
사제의 일은 자신의 일이 없고 모두 예수님의 일이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제로서의 사명이 분명 주님께 대한 순명으로 받아들인 일이었다면 일이 잘못되어도 그 책임은 주님께서 친히 지실 몫 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할 일이 있으면 사제직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주님께 불평하십시오.
모세는 하느님께 뽑힌 야훼의 사람이었습니다. 에집트 탈출에 성공하자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며 풍악을 울려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막의 갈증으로 목말라 하던 백성들의 항의를 받을 때에 야훼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 “지금 뭐하십니까? 저들이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요.” 야훼께서는 바위를 쳐 생수를 샘솟게 하여 해결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순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제직의 완성]
사제생활에 넘어질 수 있지만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완주하십시오. 사제직의 성공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해 놓았느냐?가 아니라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완주했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과는 없었지만 십자가까지 완주하셨고 김대건 신부님도 사제생활 1년 밖에 못하셨지만 순교까지 완주하셨습니다. 젊은 청춘 새 사제 여러분도 요절을 하건 백발의 노사제로 죽건 굵고 짧게 살건 가늘고 길게 살건 모두 주님의 사제로서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아멘.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당신 백성 앞에 구원의 잔 받들고서 야훼의 이름을 부르리라.”
- 시편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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