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6년 6월 14일 화요일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조작사건 - 9·18만주사변2

[항일연재37]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조작사건 - 9·18만주사변2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7)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06/15 [08: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7)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8.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전후 만주 각지 유격대창건

4)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조작 - 9·18만주사변


제국주의자들의 태생과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9 · 18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 지금으로부터 근 1세기 이전이나, 85년이 흐른 21세기 2016년 현재 세계나 제국주의 침략적 본성은 전혀 변함이 없다또 자신들이 침략을 하고자 하는 나라들에 대해서 온갖 모략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또 그들은 자신들이 꾸며낸 모략과 음모에 따라 해당 나라들에 대해 악마화를 극렬하게 진행하고 있다최근 들어서 제국주의 연합세력들은 테러라는 명분을 붙여 해당 나라를 분열 이간질 시켜 그들 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조성한다동시에 제국주의자들은 해당 나라에 대해 민주요 인권이요 하면서 자신들이 해당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선사할 것처럼 여론전을 벌인다.

침략의 대상이 되는 나라들은 제국주의 침략세력들이 꾸민 음모와 모략의 각본에 따라 반정부세력이요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비정부기구요, 인권단체요 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해당 나라의 정치권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하면서 극도의 혼란을 조성한다동시에 제국주의세력들은 유엔이나 국제기구들을 동원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을 한 다음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장을 위해 침략대상으로 삼은 나라들을 군사적으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정당성을 부여한다물론 형식적인 조사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세력들의 꼭두각시들로서 객관적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제국주의세력들의 계획에 따른 조사결과를 발표를 한다.

이러한 모든 음모와 모략을 통한 침략대상국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전을 통해 계획이 완성이 되면연합국입네 뭐네 하면서 침략대상국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적 공격이 결코 상대국을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적인 연합을 하여 악의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해당나라를 침략한다. 21세기 들어서서만 해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리비아에 대한 제국주의세력들은 자신들의 석유패권과 달라패권지역패권 그리고 잠재적 적수를 포위하이 위해 서슴없이 침략하여 초토화시켰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벌인 9 · 18사변》 역시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예와 판박이처럼 같다9 · 18사변이 발생을 하자 국제조사단이라는 것을 꾸려 심양 현지조사를 벌였다하지만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세력들 중에 아시아의 맹주라고 자처를 하던 강대국이었기에 해당 조사 역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그 어떤 책임의 소재를 따지지 않았다참으로 가증스러운 제국주의세력들이다.

이에 대해 북측 자료를 인용해서 보기로 하자.


❝ 9.18사변은 조선과 중국뿐아니라 온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일본이 조선을 삼킬 때 경악을 금치 못했던 세계가 9.18의 포성에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인류는 그것을 새로운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았다.

일본이 이 사변을 중일간의 교섭으로 해결할수 있는 지방적인 돌발사건으로 묘사했지만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곧이 듣지 않았다공정한 세계여론은 일본의 만주에 대한 공격을 주권국가에 대한 란폭한 침략행위로 규탄하였으며 일본이 강점지역에서 철병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제를 선두로 한 제국주의자들은 일본의 창끝이 쏘련으로 돌려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국제련맹이 만주에 릿든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그 조사단도 정의의 편에 서서 흑백을 똑똑히 갈라내지 못하고 모호한 립장을 취하였으며 일본을 침략자로 규정하지 못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인용문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국제조사단이라는 것들이 결국 국제관계에서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이 된다는 것을 또 다시 절감하게 하는 내용이다9 · 18사변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깊숙이 숨겨놓은 대동아공영권실현이라는 계획 아래 조작한 국제적인 사건을 마치나 지엽적인 문제인 것처럼 사건을 축소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당연히 9 · 18사변은 일제가 일으킨 것이 아니고 장학량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었다참으로 교활하고 악랄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다뻔히 드러난 사건이지만 자신들의 침략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끝까지 부인하면서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다.

또 인용문에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뼈저린 교훈을 주는 내용이 있다즉 9 · 18사변에 대한 국제연맹차원에서 국제조사단을 꾸려가지고 조사를 했지만 일제에게 그 어떤 책임이 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이 말은 가재는 게편이요초록을 동색이다.”는 말을 절감하게 하는 내용이다당시만 해도 구소련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을 하고 세계 도처에 새로운 사조에 대한 열망이 온 누리를 휩쓸던 때였다당연히 자본주의를 경제적 토대로 삼고 있던 자유주의 국가(사실은 자본과 권력을 쥔 1%의 특권층만을 위한 자유이다)들은 이를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었다따라서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막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인용문에도 언급이 되어있지만 제국주의세력들은 당시 미국을 숙주로 한 세계를 자신들이 지배하는 일극세계주의를 꾀하고 있었다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은 일제가 9 · 18사변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소련의 영향력을 막아내기 위해 일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위 릿든조사단의 조사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는 것은 절대 다른 나라에 의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결국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에 자신들의 나라를 지켜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조국을 외세에게 바치는 행위일 뿐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각인시켜준다.

우리민족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자란 고향땅조국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 땅에서 조국을 찾겠다고 피 어린 투쟁을 벌인 세력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더욱더 뼈아픈 교훈을 주는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우리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바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있었던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다또 하나의 사건은 바로 남쪽 수구세력들이 국부(國父)로 떠받드는 이승만의 청원을 통한 위임통치론을 들 수 있다.

헤이그 밀사사건과 위임통치론에 대해 간략히 보도록 하자.


① 《헤이그 밀사사건

헤이그 밀사사건은 1907(융희 1) 고종황제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위종이상설 등 세 명의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의 양심에 폭로하고 호소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1905년 조작과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빼앗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형식상으로만 남아있었던 국권을 완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발생된 사건이다.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배경과 경과 그로인한 결과로 대한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 헤이그 밀사파견 배경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완전히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미국은 반응이 없었다또한 고종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박제순(朴齊純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나라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주로 중재재판·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밀사파견 경과

고종은 전(의정부참판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등 3명을 평화회의에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끄뜨 페테스부르그)에 도착하여 전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과 이위종을 만났다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결국 6월 19일 상끄뜨 페테스부르그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했다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대한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네덜란드 정부와 교섭할 것을 권하였다이에 특사들은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고특사들은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하여 이 같은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매일 각국 기자들과 면담이 있었으며 기사화되었다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의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하였다.

특히 7월 9일에는 협회의 회의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대한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이 연설이 있은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대한제국의 사정을 논()하여 '억일부한'(抑日扶韓)의 여론이 일어났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는 이러한 사정이 외면당하였으며 결국 밀사들이 본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좌절되고 말았다밀사들의 본 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없다는 울분에 휩싸여 식음을 전폐하였으며그로 말미암아 병을 얻어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이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결설,병사설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배달겨레 남과 북이 하나 되고 우리겨레의 힘이 강대해졌을 때 다시 재 조사가 되어야 하며본 사건에 대해서도 재조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여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이후 이들은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결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8일 일제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놓게 되었다

인터넷 위키백과사전 헤이그 밀사사건’ 중에서


인용한 헤이그 밀사사건을 보고 나라의 자주권과 힘이 없으면 결코 그 어떤 나라도 도움을 주지 않으며함께하겠다는 나라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을 한다오늘 날에도 국제사회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더욱더 강화가 되었으면 되었지 변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남쪽 땅에서 벌이고 있는 국제외교라는 것을 보면 헤이그 밀사사건보다도 더 외세의존에 국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겨레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온 누리를 돌아치고 있다참으로 민족적 양심과 자존을 가지고 있는 겨레구성원들은 현 남쪽의 상황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여기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분석하는 것아 아니기에 상세한 분석은 하지 않고 인용하여 살펴보는 정도로 그친다다만 우리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통해 뼈저린 교훈을 찾아야 한다즉 현재 남과 북 우리겨레 구성원들이 처해 있는 분단상황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갈라진 겨레의 문제를 풀어가는 현명한 대안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외세에 의존해서는 절대로 민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어떤 외세도 분단된 우리겨레 하나가 되어 온 누리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헤이그 밀사사건을 바로 현재의 우리겨레가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물론 헤이그 밀사사건 보다도 훨씬 더 한심한 것이 9 · 18만주사변》 전후에 벌어진 중국의 대처방안이라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②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이승만이 주창한 위임통치론은 9· 18만주사변》 전후에 중국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주침략과 대륙침략계획에 대처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것이 아니다새로운 강대국에게 나라를 식민지로 내맡기자는 것이다현 남쪽의 상황은 어쩌면 일제강점기에 이미 탄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물론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 맺었던카쓰라-테프트밀약부터 우리민족의 분단은 결정이 되어있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분석이 될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은 힘없는 나라를 단 한 번도 가만 두지 않았다그것은 역사의 진리이다.
그럼 아래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대해서 살펴보고이에 대한 당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독립운동가 진영의 이승만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위임통치 청원이었다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작성한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청원서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크게 분노하였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의정원에서 국무총리 후보에 이승만이 거론되면서 다시 한 번 위임통치론이 문제가 되었다의정원 의원이요 사학자인 신채호는미국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오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하지 않소그런데도 우리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오?” 했으며군무총장 이동휘는이승만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박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갔느냐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은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는게 어떻겠느냐?”고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거절했다. (주석 22)

독립운동가들이 문제삼은 이승만의 <청원서한 부문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천 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주석 23)

이승만은 이 청원서에서 한반도는 모든 나라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중립적인 상업지역으로 바뀔 뿐 아니라동양에서 어떤 특정국가의 세력확장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완충국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요컨대 완전독립으로 가는 중간단계로서 위임통치를 설정하고 그것이 이 지역에 관심을 갖는 나라들에게 정치적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주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석 24)

독립운동가들은 이 내용이 외신을 통해 알려지면서 분통을 터뜨렸다더욱 분기충천한 것은 3월 14일 정한경이 미국 신문과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였다한마디로 일본의 통치 대신에 미국의 지배를 받자는 내용이다.

정한경은 한 발 더 나아갔다. 3월 21일 <뉴욕타임즈기고문 <한국의 호소>에서 한국의 모든 계층의 인민들은 한마음으로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 사회에서 31만세 시위가 거세게 전개되고 있는 시점이었다정한경은 이승만의 측근으로서 늘 그와 함께 행동해왔다정한경의 일련의 발언은 이승만의 의중으로 인식되었다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민족의 절대독립을 절체절명의 대의요 목표로 삼고 투쟁해온 민족주의계열은 물론 사회주의(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친미사대주의 발언으로 치부되었다이승만이 해방 뒤 한 때 반탁운동에 참여했다가 곧 미군정과 협력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택한 데는 이와 같은 긴 사력과 뿌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위임통치 문제를 가지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었다이승만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비로소 절대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한 시점에서 제기되었던 위임통치 청원은 거족적으로 표출된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손상시켰고이승만의 입장에서 볼 때도 스스로 외교독립론의 명분과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그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이승만의 대통령직 탄핵으로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주석 25)

방대한 이승만연구의 저서를 남긴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위상이 반쪽 나는 기록이다.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주석 26)


주석

22> <건국의 아버지친일파의 대부!>,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대책위원회, 10, 2011.
23> 방선주앞의 책, 239재인용.
24> 고정휴,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한국독립운동사전(6)>, 57독립기념관, 2004.
25> 앞의 책, 58.
26> 정병준앞의 책, 105

위임통치론’ 이완용 비판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재자 이승만 평전/[4짧은 귀향긴 망명생활 2012/03/08 08:00 김삼웅 중에서


아마도 위 청원서에 대한 김삼웅의 비판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힐 것이다바로 저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승만 이었다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이승만의 청원서는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체제에서 식민지배자를 미국으로 바꾸자는 내용이다개인적인 감정이지만 본 내용을 또 다시 들여다보니 필자로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물론 오늘 날 남쪽의 상황은 이승만이 청원서를 쓰던 1919년 2월의 상황보다도 훨씬 더 참담하다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으로 본다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 땅은 땅은 그대로이되 사람들의 얼과 넋은 절대 배달겨레의 것이 아니다사용하는 말과 글문화문명,종교학문.... 모든 분야에 걸쳐서 우리 것은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심지어 몸동작 하는 것까지 서양의 백인들을 따라하느라고 얼과 넋을 다 빼앗기고 있다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겨레의 얼과 넋이라고 성할 수 있겠는가오늘 남쪽의 이러한 사태는 19세기 말부터 배태를 했으며, 1919년 2월 청원서를 쓸 때 이미 그 움이 트고 있었으며,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1945년 8월 9일 나가사끼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결정이 되었다고 본다다행이 우리겨레의 반쪽이나마 남아 있었음을 위안을 삼아야 하는지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인용문에 있는 청원서를 보면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천 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천 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라고 하여 마치나 자신들이 일천 오백만 전 조선민족의 총의를 모은 것처럼 청원서를 보냈다이승만을 포함한 몇 사람이 과연 당시 조선의 일천 오백만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말인가과연 그들에게 누가 일천 오백만 백성들의 이름으로 청원서를 제출하라는 권한을 주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더욱더 한심한 것은 이렇게 명백한 자료와 증거 그리고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청원서의 해석이 잘 못 되었느니오해를 했다느니 하면서 민족반역자 이슴만을 극구 비호해나서는 강력한 세력이 이 땅에 존재를 한다는 것이다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후세들은 과연 오늘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를 할지 두렵기만 하다.

또 조선민족 구성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연합국 열강들에게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말인가이러한 청원서의 내용은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니신탁통치니 뭐니 하면서 해방 후 이 땅에서 벌어진 굴욕적인 사태와 그대로 잇닿아있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라는 청원서의 내용은 해방 후에 이 땅에서 실현이 되었으며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외세가 이 땅 발을 딛고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아니 오히려 외세가 이 땅을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바짓가랑이를 붓 들고 있는 형편이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한경이라는 매국 · 배족 민족반역자는 미국의 뉴옥타임스에 한국의 모든 계층의 인민들은 한마음으로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을 하였다고 하니 더욱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그들은 자신들 몇 몇이 전체 조선민족인양 혹은 전체 조선민족이 자신들에게 대표권을 준 듯 행세를 하면서 청원서를 보냈다참으로 안하무인격의 민족반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을 하였다.

이승만 세력들의 청원서의 진정한 목적은 인용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통치를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로 해달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에 대한 인용문을 보면 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였다한마디로 일본의 통치 대신에 미국의 지배를 받자는 내용이다.”라고 기고를 하였다고 하니 이 땅에서 태어난 배달겨레의 한 사람으로서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결국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 미제국주의식민지로의 변화일 뿐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청원서의 내용이다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승만의 권력욕을 채우고이승만을 옹호하는 소수의 세력들이 미제국주의식민통치 아래 권력을 향유하자는 내용으로 보면 될 것이다자신들의 사적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뜩이나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에서 신음을 하는 조선민족들을 독립도 이루지도 못한 나라를 또 다른 제국주의나라에 팔아먹자는 심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세력이 보낸 반민족적인 청원서에 대한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들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어떻게 단호하게 대처를 했는지 보도록 하자.

인용문을 보면

먼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미국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오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하지 않소그런데도 우리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오?”

라고 격하게 반응을 하였다.

청원서에 대한 단재 선생의 올바른 비판이다물론 이 땅은 이승만이 청원서를 낸 1919년 이후 26년여 만에 그의 꿈이 실현되기는 하였다역사의 모순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군무총장 이동휘 선생은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박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갔느냐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은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는게 어떻겠느냐?”

라고 하여

청원서를 낸 이승만 세력에게 강력하게 비판을 하였다이동휘 선생은 한 발 더 나아가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자고 제안을 한다하지만 사적 권력욕에 취한 이승만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다.

한편 이승만이 청원서를 작성하였던 1919년 2월 25일은 1919년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치면서 전 조선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3 · 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5일전이다이런 역사의 모순을 어떻게 봐야할지 우리들에게 보내는 역사의 교훈이 참으로 뼈저릴 수밖에 없다.

청원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목숨을 걸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을 하던 독립지사들은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당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을 하던 투사들은 만약 청원서의 내용대로라면 굳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이승만에 대해 분개를 했을 것이다청원서가 작성되고 제출되었던 시기는 바로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 사회에서 31만세 시위가 거세게 전개되고 있는 시점이었기에 역사의 모순을 일깨워주고 있으며일개 한 개인 혹은 극소수의 사적야욕이 전체 민족을 망국의 그늘을 영원히 지게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이승만의 청원서에 대한 비판은 비단 민족주의계열만이 아닌 당시 새로운 사조인 공산주의계열의 투쟁가들 역시 강한 반발이 있었다이에 대해 인용문은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민족의 절대독립을 절체절명의 대의요 목표로 삼고 투쟁해온 민족주의계열은 물론 사회주의(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친미사대주의 발언으로 치부되었다.”고 당시 독립운동진영의 실태를 전해주고 있다.

1925년 2월 25일에 작성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던 이승만의 청원서의 내용은 위에서도 간략히 언급을 하였지만 그로부터 29년 후인 1945년 해방이 된 이 땅에서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이에 대해 인용문도 이승만이 해방 뒤 한 때 반탁운동에 참여했다가 곧 미군정과 협력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택한 데는 이와 같은 긴 사력과 뿌리가 작용하고 있었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동감한다이 땅에서는 아직까지도 이승만이 97년전에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지출되었던 청원서의 내용이 그대로 지속이 되고 있다이는 우리민족사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우리겨레의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시대라고 본다.

이승만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청원서의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집요하게 행동하였다.인용문을 보면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위임통치 문제를 가지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었다이승만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비로소 절대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라고 하여 청원서를 작성한 이승만을 비롯한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행동했는지를 말 해주고 있다.

사진13 · 1 독립운동과 조선백성들의 독립열망

▲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에 의해 해방도 되지 않은 나라를 새로운 강대국이 식민통치를 해달라는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놀음을 벌인 청원서 작성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을 하던 시기인 1919년 3월 1일부터 이 땅 조선반도 백성들과 해외 동포들은 하나로 뭉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로부터 나라를 독립하겠다고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었다. 참으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결국 이승만의 청원에 의한 위임통치론은 자신을 옥죄는 사슬이 되었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31운동을 전후한 시점에서 제기되었던 위임통치 청원은 거족적으로 표출된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손상시켰고이승만의 입장에서 볼 때도 스스로 외교독립론의 명분과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그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이승만의 대통령직 탄핵으로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자신들의 사적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청원서가 결국 자신들을 옥죄는 자승자박의 꼴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지배 아래에서 벌어진 외세에 의존하여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던 대표적 두 가지 사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과 1919년 2월 25일 작성되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던 위임통치론을 청원한 청원서와1931년 9월 18일에 있었던 9 · 18만주사변을 전후한 장개석의 국민당이 외세에 대처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들 나라의 운명문제는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절대 그 어떤 나라도 자신들이 속한 나라의 운명문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1907년에 있었던 헤이그 밀사사건과 1919년 2월 25일 작성되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던 위임통치론을 청원한 청원사건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교라는 간판을 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구걸하는 외교를 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힘을 키워 스스로 민족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길 이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심양(당시 봉천)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조작하여 벌어진9 · 18만주사변에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민족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럼 9 · 18만주사변이 벌어진 이후 우리민족을 독립하겠다고 하였던 민족주의계열이나 공산주의계열의 반일독립투쟁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북측 자료를 통해 보도록 한다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들은 반일·항일민족운동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계획을 했는지에 대해 분석해보도록 한다.


❝ 전쟁의 포성이 대륙을 뒤흔들고 일본군의 맹공격에 장학량군벌의 막강한 대군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져 총퇴각한 사실은 수억만사람들의 의기를 꺾어놓았다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의 승리에서 생긴 무적황군에 대한 신화는 한갖 신화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되였다.피눈물나는 분노와 함께 공포의 파도가 조선과 만주는 물론온 아세아대륙을 휩쓸었다.그 공포의 파도속에서 모든 무장력과 정치세력혁명단체형형색색의 우국지사들과 저명인사들은 자기의 본색을 적라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9.18사변의 폭발은 붕괴상태에 있던 독립군잔여세력의 대부분을 산간오지로 몰아넣었으며 실력배양을 고창하던 사람들을 일제의 품으로 밀어던지였다독립군들이 손때묻은 총을 땅에 묻고 어깨를 움츠리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친일을 부르짖었다독립선언을 련발하여 구국항쟁을 웨치던 우국지사들이 망향가를 부르며 황황히 해외로 망명하였다이전날의 활동거점들을 버리고 퇴각하는 장학량군의 뒤를 따라 금주로장사로서안으로 달아나는 독립운동자들도 있었다.

애국과 매국반일과 친일자기 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과정이 9.18의 포성과 함께 민족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였다각자가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가붙고 음극에도 가붙었다만주사변은 민족의 매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어려울 때 진의가 드러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1931년 9월 18일에 있었던 9 · 18만주사변은 일제의 강대성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내는 작용을 하였다겨우 일만 여명 정도 되는 군국주의 일본군대에 무려 30만에 달하는 장학량의 군대가 총 한 방 쏘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으니 어찌 무적황군에 대해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세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그 강대성만 드러내니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섰던 민족주의계열이나 이전 공산주의계열의 항쟁가들은 당연히 그 세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전쟁의 포성이 대륙을 뒤흔들고 일본군의 맹공격에 장학량군벌의 막강한 대군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져 총퇴각한 사실은 수억만사람들의 의기를 꺾어놓았다…… 9.18사변의 폭발은 붕괴상태에 있던 독립군잔여세력의 대부분을 산간오지로 몰아넣었으며 실력배양을 고창하던 사람들을 일제의 품으로 밀어던지였다.”라고 하여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9 · 18만주사변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이로 인해 독립운동진영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음을 말 해주고 있다.

사진2도산 안창호와 도산 안창호 강연참석자들 체포사건
▲ 도산 안창호는 그의 실력배양론을 설파하기 위해 1927년 2월 만주 길림시 조양문 밖 대동공창에서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시국대강연회를 하였다. 이 시국대강연회에 참석한 이들을 체포한 사건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1927년 3월 22일자 사진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해야할 내용은 실력배양을 고창하던 사람들을 일제의 품으로 밀어던지였다.”라는 사실이다실력배양론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창한 실력배양론은 우선 우리민족의 실력을 배양하고 난 후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싸워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것이다이 말은 뒤집어보면 우리민족의 실력이 없었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이 된다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물론 우리민족이 500여 년에 걸쳐 평화시기를 살다보니 잠시 얼과 넋이 나가있었던 것은 사실이다근세조선조가 바로 그러한 민족의 퇴조시기이다이 퇴조시기에 서구제국주의시대가 이 땅에도 몰아쳐왔고 이에 편승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근 이천 여 년 이상을 호시탐탐 노려오던 조선반도를 집어삼켰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민족 자체가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요 능력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다.그 능력과 실력을 이끌어줄 지도자와 정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바로 근세조선조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우리민족사에 가장 무능한 시대였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근세조선조의 무능과 무사안일로 인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우리민족 전체가 단일한 나라로서 자주독립의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그 아픔을 아직까지도 겪고 있다.

실력배양론의 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통치자들의 무능을 마치나 전체 조선민족이 무능하고 실력이 없는 듯 몰아가면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직접 투쟁을 해서 나라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일정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농사도 짓고 산업을 부흥시키고 후세들을 교육하여 실력을 배양한 다음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싸워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주장을 했다니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필자로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물론 현 시기 남쪽에서는 이를 떠받드는 세력도 있다는 점 부정하지 않는다하지만 이는 진정 이 땅에 완전한 자주성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잊고 있으며어쩌면 실력배양론을 찬양하면서 현 남쪽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나아가서 민족구성원 전체를 세뇌시키고자 하는 음모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바로 이러한 실력배양론자들이 9 · 18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품으로 찾아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실력배양론의 기만성과 허구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미 앞 장들에서 1920년대 중반이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분석을 하였다엎친데 덮친격이라고 가뜩이나 위축되어 제대로 된 반일투쟁도 하지 못하고 있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완전히 독립투쟁의 꺾어버리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우선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면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은 본성이 있다9 · 18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적황군의 위용이 떨치게 되자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상대로 무장항쟁이나 무장독립투쟁을 벌일 의욕아저 철저하게 꺾여버린 민족주이 독립운동가들은 우선 중국 내륙 깊숙이 피신을 해가는 길을 선택하였다또 다른 의지가 약한 독립운동가들은 변절하여 일본제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9 · 18만주사변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참담한 상황을 만들어주었으며변절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9 · 18만주사변이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지사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9.18사변의 폭발은 붕괴상태에 있던 독립군잔여세력의 대부분을 산간오지로 몰아넣었으며 실력배양을 고창하던 사람들을 일제의 품으로 밀어던지였다독립군들이 손때묻은 총을 땅에 묻고 어깨를 움츠리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친일을 부르짖었다독립선언을 련발하여 구국항쟁을 웨치던 우국지사들이 망향가를 부르며 황황히 해외로 망명하였다이전날의 활동거점들을 버리고 퇴각하는 장학량군의 뒤를 따라 금주로장사로서안으로 달아나는 독립운동자들도 있었다.”

라고 하여

9 · 18만주사변으로 인하여 독립운동진영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음을 말 해주고 있다.더욱더 가관인 것은 민족계량주의자들의 행태이다민족개량주의자들의 대표격이 당시 조선의 지식인을 대표한다는 최남선이광수 등 현 남쪽 사회에서 근대문학가요사상가요 하고 추앙을 바도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이들은 9 · 18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기세가 등등하여 전체 조선민족은 일본천황의 두리에 굳게 뭉쳐야 미래가 있다는 등의 주장을 하면서 조선민족의 분을 돋우고 있었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친일을 부르짖었다.”라고 하여 당시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친일행위가 친일을 넘어 숭일사상(崇日思想)에 찌들어 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반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피신해가기 여념이 없었다는 것을 인용문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독립선언을 련발하여 구국항쟁을 웨치던 우국지사들이 망향가를 부르며 황황히 해외로 망명하였다이전날의 활동거점들을 버리고 퇴각하는 장학량군의 뒤를 따라 금주로장사로서안으로 달아나는 독립운동자들도 있었다.”라고 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스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목숨 바쳐 투쟁할 의기를 다진 것이 아니라 피신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결국 1931년 9월 18일에 벌어진 9 · 18만주사변은 조선의 반일민족운동과 독립운동진영에게는 조국을 독립하겠다는 의욕을 스스로 꺾어버리는 기재로 되었으며민족개량주의자들에게는 기세등등하게 친일을 미화하고 합리화할 수 있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이에 비해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9 · 18만주사변을 어떻게 바라보았으며이를 어떻게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보기로 하자.

먼저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쟁세력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만주하면 그나마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마수가 거의 미치지 않는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일제의 압제로부터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편이었다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정치적 자유가 주어져 있었던 조건아래 반일 · 항일독립운동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9 · 18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를 전격적으로 침략하여 점령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이제는 만주를 직접 통치를 하게 되니 그나마 이전에 주어져 있었던 정치적 자유와 일제의 마수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또 일제가 만주를 직접 통치를 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반일 · 항일독립운동 역시 커다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만주를 점령하고 직접 통치를 한다고 하여 결코 좌절하고 물러설 조선의 젊은이들이 아니었다과연 9 · 18만주사변이 발발을 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만주를 점령하여 직접통치를 하는 상황을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항일세력들은 이를 어떻게 분석을 하고 있으며이를 토대로 하여 어떻게 반일· 항일운동의 방법을 택할 것인가이에 대해 북측의 자료는 간략하지만 비교적 핵심을 지적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먼저 9 · 18만주사변이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 보도록 하자.


❝ 우리는 그때 돈화에서 진한장과 함께 며칠을 두고 9.18사변에 대한 론의를 계속하였다.우리도 처음에는 몹시 당황하였다무장을 들 때가 되였다는 판단은 쉽게 하였으나 일본군이 사태처럼 쓸어드는 정국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그러나 침착성을 인차 회복하고 사태발전을 랭철하게 주시하였다.

그 당시 나는 일제의 만주침략이 조선혁명에 끼치는 영향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일본군의 만주출병이 현실로 되고 만주점령이 기정사실로 됨으로써 우리는 자기곁에 적을 두게 되였다미쯔야협약과 같은것을 턱에 걸고 일본관헌들이 몇해동안 중국반동군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선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심하게 하였지만 조선땅에 있는 군경들이 월경하여 만주에 들어오는 실례는 드물었다중국과의 협정에 의하여 일본군경들이 넘어오는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여있었다.

만주지방에서 조선혁명가들을 색출하고 잡아가는것은 대체로 이 일대에 와있는 일본령사관 경찰들이 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일대에 조선강점군이 들어오지 못하였다로씨야공민전쟁당시 씨비리를 들이쳤다가 철수할 때 중국측의 량해를 얻어 훈춘에 떨어진 두개 중대력량이 동북지방에 주둔하고있는 조선강점군의 전부였다.

그러나 9.18사변과 함께 만주는 일본군대의 란무장으로 전변되였다조선에서도 상해에서도 일본에서도 수만명의 일본군대가 떼를 지어 만주땅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만주대륙은 적아가 한데 엉켜돌아가는 최전선으로 되였다조선과 만주를 갈라놓고있는 국경은 사실상 일본군의 침공과 함께 제거된셈이였다.

일본군에 의한 만주강점은 의심할바없이 이 일대를 활동거점으로 삼아온 우리들의 투쟁에 험악한 난국으로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본심의 하나가 이 일대에서 앙양되는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을 교살하고 조선국내의 치안유지를 용이하게 하자는데 있는것만큼 우리는 금후 자기의 활동에서 여러모로 일본군경들의 위협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조선국내에서 적용되던 신치안유지법의 쇠몽둥이는 만주지방 조선사람들의 머리우에도 떨어지게 될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가를 세우게 되면 우리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커다란 장벽이 될수 있었다실지로 그후 일본이 조작해낸 만주국의 존재는 우리의 활동에서 막대한 장애로 되였다.

일본의 만주강점은 이 일대에 울짱을 박고 살아온 수십만을 헤아리는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도탄에로 몰아넣을것이였다왜적이 없는 고장에서 총독정치의 멍에를 쓰지 않아도 되였던 조선이주민들의 자유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인정풍토가 생소한 이역의 삶의 터전을 옮긴 류랑민들의 리향은 무의미한것으로 될것이였다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글이 길어져서 인용문에 대한 분석은 다음 회에 계속한다.※※※

자료제공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이 창기 기자

2015년 6월 14

이 용 섭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