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가 뭐냐고 물으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답해야 했다. 새마을 운동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야 했고, 국민교육헌장을 매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암송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 때 그랬다. 그 무렵 박정희가 밀어붙인 또 하나의 ‘역작’이 있었으니, 교과서 편수와 발행을 국가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교과서 국정제’가 바로 그것이다.
교과서 발행까지 ‘독재화’했던 박정희
왜 교과서 발행까지 ‘독재화’했을까? 그때 발행된 교과서 안에 그 답이 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의 태생적 약점은 ‘정통성과 합법성 결여’였다. 또 유신체제로 ‘영구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에게 최대 걸림돌은 ‘독재자’라는 꼬리표였다. 이런 '반란수괴-독재자'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한 방법으로 궁리해 낸 것이 ‘교과서 국정제’였던 것이다.
그 시절 발행된 국사교과서엔 5.16과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내용이 넘쳐난다. 현대사를 다룬 후반부는 더 이상 교과서가 아니다. 박정희 체제를 찬양하는 헌시에 가깝다. 5.16쿠데타를 위대한 구국의 혁명으로, 유신독재 체제를 ‘평화통일과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라고 미화한다.
이 수법을 모방한 이가 있다. 전두환이다. 1982년 12.12군사반란을 미화하기 위해 ‘전두환판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다. 이때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하)에는 ‘제5공화국 덕분에 우리나라 장래가 밝게 빛날 것’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전두환 정권을 찬미하는 노래나 다름없다.
거짓을 가르치고, 거짓을 암기했다
교사들은 거짓을 가르쳐야 했고, 학생들은 그 거짓을 암기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이 쿠데타 직후 발표한 ‘혁명공약’의 제6조를 날조·왜곡해 교과서에 실었다. 제6조는 ‘쿠데타가 성공하면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복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교과서에는 ‘국가의 토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로 바꿔놓았다.
정권 이양 약속을 내팽개친 탐욕과 부도덕. 이를 가리기 위해 날조라는 파렴치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뉴라이트는 이런 박정희를 두둔하기 위해 ‘역사 도려내기’라는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2013년 교학사가 발행한 국사교과서에는 문제가 된 제6조가 보이지 않는다. 아예 빼버린 것이다.
OECD 회원국가 중 국정제를 채택한 나라는 없다. 검정제에서 인정제, 자유발행제로 점차 민간영역에 맡기는 게 추세다. OECD 비회원국 대부분도 국정제가 아닌 검정제와 인정제를 혼용하고 있다. 국정제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는 북한, 몽골, 스리랑카, 베트남뿐이다.
북한이 하는 ‘국정제’해야 한다… 종북인가?
이런데도 국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북한이나 몽골처럼 말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황우여 교육부총리가 그 선봉에 서서 “올해 내로 국정화를 추진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시한까지 못 박는 걸 보면 논의·결정 단계가 아니라, 실행단계에 돌입한 모양이다.
‘국정화’의 발원지가 어디일까? 청와대가 확실하다. 지난 7월22일 당·정·청이 회동을 갖고 한국사 교과서국정화 추진을 논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위’를 맡고 있는 새정치연합 도종환 의원도 “상반기 내내 청와대의 강한 압박이 있었던 것 같다”며 “김무성 대표와 황 부총리 뒤에 청와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배후가 청와대라면, 이를 주도하고 있는 이는 박 대통령이 된다. 자신의 임기 내에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져 일선학교에 배포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왜 밀어붙이려는 걸까?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왜 추세에 역행하는 ‘국정화’를 밀어붙이려는 걸까? 박 대통령이 칩거생활을 하던 시절 방송사와 인터뷰한 내용에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온다.
“유신에 대해 옳다고 그 불가피성을 주장해야 한다... 5.16과 유신은 매도당해 왔다...부모님에 대해 잘못된 것(국민들이 오인하고 있는 것) 바로 잡는 게 자식의 도리...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다.” (MBC 시사토론, 1989)
5.16은 군사쿠데타, 유신은 영구집권을 노린 독재. 이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구국의 결단이자 최대 업적으로 재평가되도록 이것들을 포장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해야 할 ‘자식의 도리’라고 말한다. 이쯤이면 ‘국정제’로 복귀하려는 이유가 또렷해진다.
기막힌 자기모순과 이율배반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태도는 이미 확고하다. 김무성 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뿐 아니라, 자난달 말 방미 때 교민들에게도 ‘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강하게 피력했다. 황우여 부총리는 지난 19일 언론에 나와 “7가지의 다양한 교과서로 가르치는데 혼란스럽다”며 “9월까지는 국정화와 관련된 매듭을 짓겠다”고 말했다.
국정교과서가 필요한 이유가 ‘다양성에서 오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황당하다. 2013년 친일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이 0%대에 그치자, 김무성-황우여 두 사람은 “1% 채택도 어려운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다양성과 자율성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인 바 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국사교과서는 단 하나만 있어야 한다”며 ‘획일성’을 주장한다. 자기모순의 극치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강조하던 이들이 이젠 입을 모아 ‘국정화’를 외친다. 저들의 주장은 대략 이렇다. 친일이 판치던 일제 때도 발전했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정권 때도 발전했으며, 유신독재 때에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 그 덕분에 지금 이 정도가 된 거다. 그러니 친일도 인정하고, 5.16도 인정하고, 독재도 인정해야 한다. 이러면서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미화하려고 수작을 부린다. 기막힌 이율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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