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13 20:31
최종 업데이트 15.09.13 20:49
▲ 13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장례문화 개선 시민캠페인 '생사 문화의 날' 행사 | |
ⓒ 이정환 |
하나, 반드시 죽는다.
둘, 혼자서 죽는다.
셋,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복잡한 듯 보이지만 한편 이렇게 단순하다. 사람마다 생사관(生死觀)은 달라도 "모든 사람이 아는 것" 또한 이 세 가지다. '웰다잉 10계명' 머리글, 생사 문화의 날 행사 현장이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서울시설공단이 주최한 장례문화 개선 시민캠페인 '생사 문화의 날' 행사가 13일 청계 광장에서 열렸다. 지난 7일부터 '오픈 앤 체인지(Open & Change, 열어라, 그리고 변화하라)'란 주제로 시작한 '2015 서울 생사 문화 주간'을 마무리하는 날인 만큼, 지배적 장례 문화에서 '일탈한' 흔적들이 행사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3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착한 가격, 더 착한 '산골'
▲ '생사 문화의 날' 행사장에서 공연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 |
ⓒ 이정환 |
"안치료 1시간 당 2,500원, 빈소 사용료 1시간당 1만8천원∼4만 원, 수의 13만 원∼25만 원, 관 11만 원∼17만 원, 남자 상복 3만 원, 여자 상복 1만5천 원, 자연장 50만 원, 산골은 무료." (서울형 착한 장례서비스 안내서에 있는 패키지 및 표준 요금 일부 발췌)
'서울형 착한 장례 서비스'는 지난 5월 1일부터 서울시설공단이 새롭게 선보인 프로그램이다. 서울의료원과 서울시설공단의 '장례 인프라'를 활용해 장례, 화장, 안장에 이르는 절차를 하나의 패키지 형태로 묶어낸 서비스다. 비교적 최근 선보인 서비스인 만큼 장례비용 거품을 걷어내자는 논의와 맞닿아 있다.
착한 가격을 우선 내세우고 있다. 서울시설공단에 따르면 이 서비스 이용료는 약 6백만 원 수준으로 일반적인 장례비용보다 저렴하다고 한다. 상조회사에서 보통 제공되는 장례 지원 서비스도 사실상 이용할 수 있다. 행사 현장에서 만난 문수련(27·여)씨는 "장례를 좀 더 원활하게 치를 수 있도록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공단 직원이 도와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직은 시범 사업 기간으로 서울의료원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경우에 한 해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친환경 장법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산골(화장 후 유골을 자연에 뿌리는 형태)'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형 착한 장례 서비스는 '부담 없는 가격', '화장에 최적화된 장례용품'과 함께 '친환경적 장사법'을 3대 원칙으로 내걸고 있다.
작은 장례로 나눈다
▲ 지난 3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종로구에 홀로 살고 있는 어르신 아홉 분이 구술한 삶을 책으로 엮어냈다. 책에 실린 사진 | |
ⓒ 한겨레두레협동조합 |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부엌이다. 방문 바로 옆으로 냉장고가, 냉장고 위에는 참치 깡통과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놓여 있다. 작은 싱크대도 놓여 있다. 대낮인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불을 좀 켜자고 하니 천장을 가리키며 겸연쩍게 웃는다. 형광등 소켓에 형광등이 없다. 아직 맞는 걸 못 찾아서 그냥 두고 있다고 한다." ('나는 종로에 사는 사람입니다' 중에서)
행사 현장에서 한겨레두레협동조합 김영주 차장이 소개해 준 책이다. 지난 3월,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종로구에 홀로 살고 있는 어르신 아홉 분이 구술한 삶을 책으로 엮어냈다. 저소득층 독거 노인의 장례 지원 사업 '품앗이 마을 장례' 일환으로 만든 책이다. 품앗이 마을 장례에 필요한 비용은 조합원 회비 중 일정 비율을 출자해 충당하고 있다. 장례 거품을 걷어내는 데서 한 발 더 나가고 있는 셈이다.
고 리영희 선생의 민주사회장을 시작으로 김근태, 성유보 등 우리 시대 '양심'의 장례를 주관했던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소박하고 조용한 장례를 지향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삶의 결과인 죽음을 준비하고, 상호 부조의 방법으로 장례를 치른다"는 협동조합 설립 본연의 취지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란 설명이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장례 서비스는 '더불어 삶'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상포계 서비스로 직거래 공동 구매를 통해 장례 비용을 절감하고, 조합원으로 구성된 장례지도사와 접객 도우미가 장례식의 모든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현재 조합원 숫자는 2천5백여 명, 법적 기준에 따라 월 납부금(곗돈)의 50%를 은행에 예치하고 있다.
스토리를 담는다
▲ 은빛기획협동조합이 만든 고 내툰나잉 미얀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장의 조문보 | |
ⓒ 은빛기획협동조합 |
"민주주의 기차 있잖아요? 처음에는 같이 출발하는데 어떤 역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내릴 수도 있고 어떤 역에 도착하면 누군가는 또 타요. 타고 내리면서 기차는 계속 갈 거예요. 종착역에 도착하면, 다 같이 도착하면 더 좋겠죠." (고 내툰나잉 미얀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장의 조문보)
은빛기획협동조합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만드는 인쇄물, 조문보로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고 신해철의 조문보가 만들어진 사실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당시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문보에는 그의 삶의 궤적, 추모의 글들, 일화들이 담겨 "형식만 남은 장례에 스토리를 담은" 시도로 평가됐다.
이처럼 조문보 제작은 가족의 '몫'만은 아니다. 내툰나잉 한국지부장의 조문보는 평소 그와 친분이 깊었던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가 주도해 만들어졌으며, 지난 달 31일 별세한 호서대 설립자 강석규 박사의 경우는 학교측에서 요청했다고 한다. 유족의 동의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행사 현장에 전시된 조문보 중에는 1973년 박정희 정권 시절 의문사한 고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의 부인 고 백경자씨의 조문보도 있었다. 펼치면 A4 용지 크기, 앞서 언급한 조문보들에 비해 비록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이 슬픔을 나눠주십시오"로 시작하는 글이 전달하는 울림은 컸다. 고인의 아들이 직접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항래 은빛기획협동조합 대표는 "계약 과정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 내용만으로도 조문보를 만들 수 있다. 6시간 이내 제작이 가능하다"면서도 "본인이 직접 써오는 게 가장 좋더라. 미리, 지금 준비하시면 더욱 좋다"고 말했다.
'미리' 또는 '지금'의 무게
착한 가격, 착한 안장에 나눔을 더하고 스토리를 담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장례 문화, 그래도 핵심적인 것은 노 대표의 말처럼 '미리' 또는 '지금'이 아닐까. 웰다잉 10계명의 '모든 사람이 모르는 것 세 가지'가 다시 떠올랐다.
하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
둘,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셋,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 '생사 문화의 날' 행사장에 전시된 '웰다잉 10계명' | |
ⓒ 이정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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