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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석 기자
- 승인 2025.10.0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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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인민항쟁' 79주년

1946년 10월 1일, 대구지역 400여 개 공장 노동자와 시민 1만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미군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시민 1명이 총에 맞아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구 시민 1만5천여 명이 밤새 항의 시위를 이어갔다.
10월 2일 오전 10시, 대구경찰서 앞 광장에서 항의 집회가 이어졌다. 한 청년이 분노에 찬 연설을 하던 그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연설하던 그 청년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5명의 연사가 연단에 올랐다. 그들 역시 차례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같은 참변은 운집해 있던 시민의 분노를 일거에 폭발시켰고 원한의 표적이었던 경찰서를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게 만들었다. 탄압의 아성인 경찰서를 때려 부수고 무기를 탈취했다. 무장한 시민은 100여 명씩 대오를 지어 시내의 모든 파출소를 공략함으로써 대구 전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10월 인민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10월 2일 오후 6시, 미군정청은 대구지역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이 대구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한번 점화된 봉기의 불길은 대구와 인접한 영천, 의성, 군위, 왜관, 선산, 그리고 포항, 영일 등지로 무섭게 번져 갔다. 이르는 곳마다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사무친 증오심이 폭발했고, 미국의 식민통치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항쟁의 불길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10월 3일 서울시민 1만여 명이 미군정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경찰서를 습격하여 수감 중인 애국자들을 석방시켰다. 대전에서는 시위에 참여한 시민 31명이 체포됐다. 전라도에서는 화순탄광을 필두로 도내 전역이 봉기에 돌입했다. 화순탄광 노동자 5천여 명이 파업에 돌입, 이중 3천여 명이 광주로 향했다. 이에 발맞추어 목포 지역 전화 교환원들이 파업을 단행했다. 이들은 미군 병력이 투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통신을 마비시켰다.

한편 미 군정은 미군과 친일 경찰, 그리고 정치 깡패 등을 총동원해 피비린내 나는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38선 이남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언론 활동을 전면 통제하는 등 삼엄한 통제망을 펼쳤다. 대구에서는 10인 이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금지됐다.
10월 7일 마산에서는 미군과 경찰이 시위 중인 시민 6천여 명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12월 중순 전주에서는 시위자를 함정에 몰아넣은 후 말을 타고 돌진,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을 휘둘러 아이와 여성 20여 명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죽였다.
3개월 동안 계속된 ‘10월 인민항쟁’ 과정에 1,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6,000여 명이 중상을 입었고, 무려 15,000여 명이 체포‧구금됐다.
당시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가 연석회의를 통해 시국선언에 해당하는 의견서를 발표했다. 의견서에서 ‘10월 인민항쟁’이 발발한 원인을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조국해방 전도에 대한 절망감에서 오는 격렬한 울분
2. 경찰 및 각 행정기관 내에 박혀 횡포한 행동을 하는 민족반역자, 친일파 및 군정에 아첨하는 신형 왜놈 등 친일 반동분자에 대한 극도의 증오
3. 가혹한 공출제에 대한 반감과 식량난으로 인해 해방 이전보다 더 불행한 처지에 대한 반발의식
하지만, 잔인한 진압을 명령한 미군정 장관 하지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지령이 없었다면 10월 2일의 피비린내 나는 제 사건들이나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간단히 말해 10월 봉기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한 것이지 결코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라고 단정했다.
‘10월 인민항쟁’에서 표출된 우리 민족의 조국해방 의지에 놀란 미 군정은 1946년 12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개원한다. 이듬해 7월 ‘입법의원’은 친일파 청산을 위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안'을 제정해 미군정청에 제출한다. 하지만, 미군정 장관 하지가 비준을 거부함에 따라 실제 실시되지 못한다. 하지가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는 당시 미군정청 산하 경찰‧군인‧관료‧기업인 약 70%가 친일파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률이 시행될 경우 이들 대부분이 청산 대상이 되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미군정청 경무국장 매글린은 “만약 그들이 과거에 일본을 위해 일을 잘했다면 그들은 우리 미국을 위해서도 일을 잘해 줄 것”이라며 친일파들을 계속 등용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숭미주의자로 둔갑해 한미동맹을 부르짖으며 지금까지 떵떵거리고 있다.
‘10월 인민항쟁’으로부터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폭탄에 이어 조공을 강요하고 있다. 한국 노동자를 노예처럼 쇠사슬로 묶어 구금한 것도 모자라 미국 비자를 얻으려면 1억3천만 원을 내라며 ‘삥’을 뜯는다. 트럼프 행정부의 한국에 대한 시각은 미군정 장관 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79년 전 ‘10월 인민항쟁’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의 주권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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