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집행위원회
오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제2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에서 상영될 영화 26편에 대한 심사평을 연재합니다.
올해 영화제에는 전 세계 37개 나라에서 151편의 장·단편 영화가 출품돼 국내외 영화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거쳐 26편의 영화가 상영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첫 회는 윤정모 조직위원장의 총평, 개막작 <알 아우다>와 폐막작 <힌츠페터 스토리> 그리고 올해 특별히 마련한 ‘내란 특별 섹션 영화’에 선정된 <단카 프리실라 단카> <정돌이> <군락>에 관한 심사평입니다.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가 올해 ‘내란 특별 섹션’을 마련한 이유는, 지난해 12월 3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윤석열 쿠데타 내란을 기억하고 '휘슬'을 불기 위해서입니다. 폐막작 <힌츠페터 스토리>는 내란 특별 섹션 영화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총평:출품작 다수가 국가, 사회, 자본의 폭력 문제 다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출품해온 작품이 150여 편입니다. 국가, 사회, 자본의 폭력 문제가 다수였고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모든 작품들이 대체로 수준이 높았습니다.
선별된 작품은 장·단편 26편이고 개막작 <알 아우다(Al Awda)>는 세계 18개 국의 행동대원들이 ‘알 아우다’라는 이름의 어선을 타고 비폭력을 외치며 이스라엘이 봉쇄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를 향해 가는 얘기입니다. 폐막작 <힌츠페터 스토리>는 5.18광주항쟁 당시 그 모든 사실을 영상으로 찍어 전 세계로 전송한 독일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보낸 항쟁과 살상의 영상은 독일, 미국, 프랑스 등의 적십자사에서 상영을 했고 그때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그 영상을 보고 뉴스에 캄캄했던 한국과 세계 각국 유학생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진한 인생 이야기에서 지중해를 떠도는 중동 난민들, 세월호까지 있으니 이 가을 우리는 매우 알찬 이야기들을 수확한 것 같습니다. /윤정모(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조직위원장, 소설가)
알 아우다: 이스라엘 폭력 맞서 떠난 22인 활동가 이야기
(개막작, 제이슨 수(Jason Soo) 감독, 1시간 10분, 요르단, 싱가포르)
고발할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을 꿈꾸는 휘슬러영화제는 존립 이유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악은 때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존재해왔고 미화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로서 역사는 발전해왔다고 믿는다. 악에 맞서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작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현재 가장 큰 악으로 간주되는 이스라엘 정부의 무도함에 맞서 대양 위의 낙엽 하나에 불과한 플로티야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비폭력의 연대를 이루며 단지 그 사실이 알려지도록 고투한 알 아우다의 22인에 대해 만든 영상에 높은 점수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해가 미미한 한국 사회에서 관심의 기폭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높은 평가를 만든 요인이다. 꼭 봐야 한다. /조한욱(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힌츠페터 스토리: 광주항쟁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의 미공개 영상
(폐막작, 장영주 감독, 내란 특별 섹션 영화, 1시간 35분, 한국)
영화 <힌츠페터 스토리>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힌츠페터의 신념과 양심, 그리고 진실의 위력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의 용기와 진실의 힘이 한국의 민주화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음을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국가폭력 앞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한 5·18 광주의 정신’을 조명한 이 영화는 침묵하지 않고 저항을 지향하는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의 취지와 가장 잘 맞는다.
목사로서 나는 힌츠페터의 진실을 향한 믿음, 고통받는 광주시민과 연대, 평화를 향한 헌신에 최고점을 준다. 특히 유언처럼 “광주에 묻히고 싶다” 하는 그의 말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던 부활의 예수를 떠오르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12.3 내란을 넘어 국민주권 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묻고 싶다. “우리는 여전히 진실 앞에 떳떳한가?”, 이 물음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우리가 삶으로 응답해야 할 부르심이다. 힌츠페터의 카메라 앵글에 담긴 진실과 정의는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울림을 준다. /백은경(사회운동가)
단카 프리실라 단카:칠레 배경으로 한 권력·학대의 본질 찾는 영화
(내란 특별 섹션 영화, 이나키 발레스케즈 감독, 23분, 칠레, 미국)
23분간의 드라마는 120분간의 장편 시네마에 비해 많은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간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단카 프리실라 단카(Danka Priscilla Danka)>는 그 어려움을 이 영화의 매력으로 바꾸어 놓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메시지 전달의 압축성과 강렬함을 맞보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간결해서 부족할 수 있는 부분을 강렬한 암시성에 기초해 관객의 상상으로 채워넣는 서사 전략이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조직의 비리를 접한 구성원의 양심의 목소리를 재현내면서 그 고뇌와 어려움에 관객이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장편영화여야 가능한 스토리 전개의 핍진성(개연성)에서의 부족함을 이 영화는 서사의 앞뒤로 배치한 프리실라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만회하고 있다. 일에 쫓겨 유보시키고 있던 그녀의 사랑은 결국 어머니의 품안에서 완성된다.
주인공의 이름 프리실라(Priscilla)는 스페인어로 시대의 변화에 관계없이 ‘오래되어 유서깊은, 그래서 존중받을 만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극중 프리실라의 양심의 목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동시에 대세에 몸을 실어 승리를 향해 진군하던 단카(Danka)의 회심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의 후반부 역시 개연성 부족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역시 이 영화의 좀더 큰 맥락, 즉 인간의 근원적 양심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23분의 짧은 시간이 내뿜는 암시의 힘에 설득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단카’는 고마움을 시사하는 이름이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양심의 목소리를 내어주는 모든 고통받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이승렬(전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정돌이: 전두환 독재 시절 운동권에 나타난 가출소년 이야기
(내란 특별 섹션 영화, 김대현 감독, 1시간 32분, 한국)
다큐멘터리 <정돌이>는 중1 때 알콜 중독과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떠나 가출한 어린 소년이 당시 고려대 정경대 운동권 학생들의 보살핌 속에 커나가는 성장담과 그의 내레이션으로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전위로서 역할을 했던 학생운동, 특히 고대 학생운동의 치열한 투쟁과 고민 그 후일담을 들여다보는 기록영화이다.
386세대가 양극화의 주범으로 이중적 잣대를 가진 엘리트주의 강남좌파로 공격받고 있는 지금 감독은 왜 80년대의 학생운동을 끄집어내게 되었을까? 우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기억하라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다. 우물에 이끼가 끼었다고 우물을 누군가가 조금 더 퍼 간다고 피 흘려 맨손으로 그 우물을 판 자들의 희생을 잊을 것인가. 2025년, 정돌이는 연민과 연대를 아는 훌륭한 전통 음악의 지도자가 되었고, 나는 그리하여 그 우물의 생명력을 아직 믿는다. /허수경(기업인)
군락: 73년 칠레와 80년 한국의 국가폭력 비극은 어떻게 연결되었나
(Good Luck, 내란 특별 섹션 영화, 모현신 감독, 1시간 36분, 한국)
<군락(Good Luck)>은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한국 광주민중항쟁(1980)과 칠레 피노체트 쿠데타(1973) 당시 벌어진 끔찍한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한다는 점에서 ‘휘슬러영화제’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칠레인 동화작가 구나이가 나무를 소재로 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그가 한국 독자를 만나기 위해 내한한 곳이 하필 광주였으며, 이곳의 어느 길거리 전파상(전기제품 수리점) 쇼윈도에서 광주 민중항쟁 당시의 끔찍한 영상을 보고 칠레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학살 만행을 연상하는 발상이 참신하다. 은폐된 국가 폭력 사건들의 내막을 어떻게든 들춰내려는 감독의 필사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구나이는 어릴 적 실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GPS 탭을 나무 뿌리 속에 심었고, 그 나무가 칠레에서 마약을 들여온 이들에 의해 우연찮게도 그가 들른 광주 외곽의 어느 농원으로 옮겨져 있었고, 한국의 ‘정글’을 보고 싶어 하는 그가 그의 책을 출간한 재경의 안내로 우연히 찾아간 곳이 하필 이 농원이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GPS탭을 뿌리에 간직한 나무를 발견한다는 설정은 공상적이지만 유의미하다.
칠레와 한국에서 오래 전 자행된 국가폭력과 칠레에서 광주로 마약을 들여오는 이들의 사적 폭력이 ‘빨갱이는 죽여’라는 표어로 합일하는 줄거리는, 2차 대전 이후 세계사를 관류해 온 반공·적대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이미 마약처럼 번졌음을 고발하는 은유다.
이 은유는 2차 대전 이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반문명적이고 반인륜적인 국가폭력 사건들 모두 반공·적대 이데올로기라는 한 뿌리에서 발원했음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가 80년째 분단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반공·적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는 단순명쾌한 사실을 <군락>이 일깨워주기를 바란다. /강진욱(전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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