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와 뜨는 해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한 ‘분할하여 지배하라’라는 말은 상대를 분열시킨 뒤 지배하는 분할통치 전략을 뜻합니다. 이 말을 국제 정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라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 외교를 상징하는 인물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부장관은 소련과 중국이 가까워지면 미국에 불리하다는 지론을 펼쳤고 몸소 미중수교를 주도해 소련과 중국을 분열시켰습니다. 이를 ‘키신저 전략’이라 부릅니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2022년 2월 22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냉전 시기 미국이 중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냉전 구도에서 승기를 잡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베트남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15년 동안 전쟁을 치른 미국과 베트남은 종전 20년 후인 1995년 수교를 단행하였습니다. 2016년 미국은 베트남에 무기 수출을 전면 허용했는데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하는 베트남을 지원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2018년에는 미 항공모함이 베트남 다낭 항에 입항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은 이런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에 공세를 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중국을 고립시키자는 ‘역키신저 전략’이라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외교 현상은 북·중·러의 단결입니다. 미국의 국무부, 국방부에서 작성하는 보고서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이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들 나라의 단결을 깨는 게 미국 외교 정책의 1순위 원칙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 열린 중국 전승절 행사나 10월 10일 열린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행사로 확인할 수 있듯 미국의 외교 원칙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북·중·러가 우뚝 서고 있으며 미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고립되는 형국입니다. 북·중·러는 뜨는 해, 미국은 지는 해라는 게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한때 대립하던 북한과 러시아·중국
2017년 11월 29일 북한이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자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이 본토로 날아올 수 있다는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북미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한 목적이 이것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소련을 고립하고,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으로 중국을 고립하려 했던 것처럼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중국, 러시아를 고립하자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박후건 경남대학교 교수는 2018년 5월 28일과 10월 17일 자 프레시안 기고 글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조선[북한]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고 조선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짰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하고 북한이 절실히 필요한 경제 지원을 해주고 북한을 미국 편으로 만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이 이게 가능하다고 여긴 건 당시 북중관계, 북러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6년 10월 14일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 편에 섰습니다. 중국은 아예 북한의 핵시험을 두고 북한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큰 나라라고 하는 것들이…”라며 러시아, 중국을 비판했습니다.
2013년 2월 12일 북한의 3차 핵시험 직후 중국공산당 기관지는 사설을 통해 북한을 비판했고 중국 정부는 독자적인 대북 제재를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박근혜를 초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옆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역시 대북 제재 결의안을 충실히 따라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015년 12월 모란봉악단의 중국 공연 취소 사건은 당시 북중관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중국은 공연 배경 화면에서 핵, 미사일을 빼라고 요구했고 현송월 단장이 “토씨 하나도 고칠 수 없다”라며 공연을 몇 시간 앞두고 급히 철수해 버렸습니다.
노동신문은 2018년 2월 8일 자 논평 「무엇을 얻어보려고 비루한 참견질인가」에서 “훈시질에 여념이 없는 중국의 일부 전문가들과 언론은 세계 면전에서 고립 배격당하고 있는 트럼프 패나 아베 일당 그리고 시대 밖으로 밀려난 남조선 보수 나부랭이들과 꼭 같이 놀고 있다”라고 중국을 맹비난했습니다. 북한의 노동신문이 ‘중국’ 국명을 거론하면서 직접 비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당시 북중관계, 북러관계는 매우 험악했습니다. 이때 북한이 러시아, 중국과 계속 대립하면서 미국에 붙었으면 베트남처럼 경제 성장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방에 관계를 반전시킨 북한
2018년 3월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중국과 먼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키신저 전략에 강한 타격을 준 역사적인 조치이며 세기적인 주요 장면이었습니다. 실망하고 분노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했다가 번복할 정도였습니다.
북한은 북미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중국이 위기를 느낄 때 북중정상회담을 전격 추진해 중국이 아무 조건 없이 즉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도록 했습니다. 중국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황제급 의전을 선보였으며 엄청난 선물 공세를 폈습니다. 중국은 북중관계를 깨뜨리게 될까 봐 북한에 핵문제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북한은 격렬하게 대립하던 북중관계를 일거에 전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019년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할 때는 북한이 베트남과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를 돈독히 했습니다.
과거 베트남전쟁 때 북한이 베트남에 전투기 조종사를 파병하면서 양국은 혈맹관계를 맺었습니다. 북한은 북베트남과 조종사 파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백여 명으로 추정되는 조종사를 파견했습니다. 팜푸타이 베트남 공군 중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1967~1968년 기간 북한 조종사는 1,266회 출격해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하고 8명의 조종사를 생포했다고 합니다. 또 북한은 무기 10만 정, 군복 1백만 벌 등 물자 지원을 했고 공병부대를 보내 갱도 건설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북한이 베트남전쟁에 지원한 물자를 합산하면 당시 북한 돈으로 1억 7,500만 원이라고 합니다. 당시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이 약 40원임을 고려하면 현재 가치로 2천만 달러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경제원조 협정을 맺어 4천만 루블을 무상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쿠르스크 전투 파병 이상으로 북한이 적극적으로 베트남을 지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2019년 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를 베트남으로 정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이번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행사 때 또럼 베트남공산당 총비서가 환대받고 주석단에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 바로 옆에 선 것을 보면 당시의 성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8년 3월부터 1년 반 사이에 무려 5차례나 북중정상회담이 열리자 러시아도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섭니다. 이에 2019년 4월 25일 8년 만에 북러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이후 북러관계는 급진전해 쿠르스크 파병을 거치며 최고, 최상의 경지에 올라갔습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는 5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오랜 시간 우리는 북한이 고립에 빠졌을 때 그저 확립된 규칙(제재)을 따르고 행동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대북 제재에 동참한 걸 반성한 것입니다. 러시아처럼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나라가 공개적으로 반성한 것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희생적으로 싸운 북한에 감복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외교의 기본이 이해관계를 따지는 게 아니라 진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상대 국가를 감복하게 하는 요인일 것입니다.
북한의 근원은 주체사상
오늘날 북한이 키신저 전략을 산산조각 내고 북·중·러 단결로 미국 몰락의 역사를 열어내는 근원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북한에만 있는 사상인 주체사상에 그 뿌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 중국, 베트남에는 주체사상이 없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과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사상은 경제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정치를 가장 중요하게 보며 사상을 결정적 요인으로 봅니다.
경제를 가장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미국에 붙고 나아가 미국 가랑이 사이로 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가장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세계를 약탈하는 미국식 정치에 맞서 사회주의 정치가 단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주체사상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을 핵으로 하기 때문에 외교에서도 이해관계가 아니라 진심을 다하는 것을 절대시한다고 합니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북한이 반미진영과 북·중·러 단결이라는, 세계에 없었던 새 역사를 주도적으로 펼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대로 가면 북한의 주체사상이 전 세계에 급속히 확산할 수 있습니다. 이건 좋은가 싫은가,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주체사상에 관한 연구가 시급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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