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https://responsiblestatecraft.org

 러시아가 핵 독트린 변경에 착수했다. 더 적극적이고, 더 공세적인 방향으로 핵 정책을 변화시키고 있다.
 
9월 26일 푸틴은 핵억제에 관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회의에서 “지정학적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조정이 필요”하다면서 핵 독트린 개정 방향을 공개했다. 즉 핵 독트린 수정안을 제시한 것이다. 다만 이날 회의에서는  수정 초안이 제시되었고, 승인 절차까지는 밟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9월 29일 크렘린궁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핵 교리 개정 내용이 준비됐고 공식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 승인 절차가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승인은 형식적 절차라는 점에서 사실상 개정이 완료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크렘린궁 대변인은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공격에 가담할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경고하는 신호”라며 핵 교리 개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러시아 핵 독트린에서 새롭게 추가된 내용은?
 
푸틴의 상임회의 모두발언에 따르면 새롭게 추가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핵보유국이 (러시아 공격에) 포함되거나,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비핵국가가 공격할 경우
▶ (러시아를 겨냥한) 대규모 공중 또는 우주 공격무기가 발사되었거나 그러한 무기가 국경을 넘을 것이라는 믿을만한 정보가 있을 경우(전략 및 전술 항공기와 순항 미사일, 무인기 등 포함)
▶ 핵보유국이 참여하는 비핵국가(벨라루스)에 대한 공격을 러시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 적군이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여 중대한 위협을 가하는 경우
 
2020년의 러시아 핵 교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 핵무기 사용 조건으로 러시아를 겨냥한 탄도 미사일이 날아오는 경우
▶ 러시아나 동맹국을 겨냥해 핵무기나 다른 대량살상무기가 사용됐을 경우
▶ 러시아의 핵대응능력이 저해될 경우
▶ 러시아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재래식 무기의 공격이 있을 경우
 
따라서 달라진 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탄도 미사일 외 순항 미사일, 무인기 등의 공격에도 핵 사용 가능
▶ 핵보유국(미국, 나토)의 지원을 받은 비핵국(우크라이나 의미)의 공격에도 핵 사용 가능
▶ 벨라루스에 대한 비핵공격에도 핵 사용 가능
 
러시아의 핵 독트린 변경에 대해 미국은 “전적으로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비난했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역시 “러시아 지도부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라며 러시아 비난에 가세했다.
 
미국의 핵 정책은 이미 3월에 변경
 
우리 언론 역시 푸틴의 핵 독트린 개정에 비판적 보도 일색이다. 보수 매체는 물론이고, 민주·개혁과 진보를 표방해 왔던 매체들 역시 “러시아가 핵전쟁의 문턱을 낮췄다”라는 식의 보도 행태를 보인다.
 
러시아의 핵 독트린 개정이 핵무기 사용의 조건을 완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핵전쟁의 문턱을 낮췄다고 결론을 내리기엔 충분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나토 회원국들 상당수가 러시아 공격용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고 있으며, 지원한 무기로 러시아 영토를 공격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는 유엔 총회를 방문하여 국제사회의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바이든을 만나 러시아 영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지원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바이든 정부는 장거리 미사일 제공 여부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을 위시한 나토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러시아에게 “지정학적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핵 독트린 개정에 착수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추가로 지적되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3월 새로운 핵운용 지침(Nuclear Employment Guidance)을 승인한 점이다. 4년마다 개정되는 이 문서는 극비사항이라 전자 사본도 없고, 소수의 국방 안보 관리들에게만 인쇄물로 배포된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4년마다 개정되는 이 문서는 극비사항이라 전자 사본도 없고 소수의 국가 안보 관리와 국방부 지휘관들에게만 인쇄물로 배포”된다.

바이든이 지난 3월 극비리에 핵운용 지침을 승인한 사실은 뉴욕타임스의 8월  20일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 백악관 NSC의 프라나이 바디(Pranay Vaddi)가 새로운 핵지침을 언급하면서 “러시아, 중국, 북한을 동시에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데서 드러나듯이, 적대적 핵보유국인 북중러를 겨냥하는 핵지침인 것은 분명하다.
 
나토 사무총장의 발언 역시 러시아의 핵 독트린 변경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6월 16일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전선으로부터 심각한 핵 위협에 직면할 수 있다”면서 “작전상 핵탄두가 얼마나 필요하고 어떤 핵탄두를 보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협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누가 핵전쟁의 문턱을 낮추고 있나?
 
한 나라의 무장력은 국익의 치명적 손상이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해 존재한다. 핵무기 역시 무장력 중의 하나이다. 200여 개의 나라 중에 10여 개 나라밖에 보유하지 않은 상당히 '독보적인' 무장력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지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다.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정치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왔다. 그리고 이젠 러시아 영토를 공격할 장거리 미사일 등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독보적인' 무장력인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어쩌면 핵보유국으로서 상식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푸틴이 6월 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에서 “핵 정책은 살아있는 도구”라면서 “우리 주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시하고 있으며 이 정책의 일부 변경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것은 미국과 나토의 핵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핵 독트린의 변경은 푸틴이 아니라 미국이 먼저였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운동 법칙을 미-러 관계에 적용한다면, 러시아의 핵 독트린 변경은 미국과 나토의 공세적 핵 및 군사정책에 대한 ‘반작용’이다.
 
핵 독트린의 변경이 핵전쟁의 문턱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핵 전쟁의 문턱을 낮춘 것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다. 

 장창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