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해달라” 유가족 호소에 시민들 “함께 하겠다” 화답
- 윤정헌 기자 yjh@vop.co.kr
- 발행 2024-10-26 23:07:00
- 수정 2024-10-27 07:28:06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는 26일 이태원 참사 당시 압사 위험을 처음으로 신고된 오후 6시 34분 서울광장에서 2주기 시민추모대회를 열었다. 서울광장은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은 유가족들과 시민들로 가득 찼다. 해가 지며 서늘해진 날씨에도 참가자들은 2시간 이상 이어진 추모대회를 끝까지 지켰다.
이날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시민들의 관심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지난 2년여간 거리에서 싸우며 힘들게 출범시킨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첫발을 내딛었지만,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향한 길이 멀고 험난하다는 것이다.
현재 참사 책임자들 중 극히 일부의 공직자들만 재판에 넘겨진 상황이다. 그나마도 윗선으로 꼽히는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등은 최근 이뤄진 1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 이주영 님의 아버지인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눈물과 애환의 산증인들이 있다. 가족을 잃고 평생을 고통스러운 멍에를 메고 살아가야 하는 4월의 세월호, 그리고 10월의 이태원, 또 수없이 많은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이 그분들”이라며 “이런 사회적 참사가 수십년이 지나도 반복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 이상 이 나라에 이러한 불행이 반복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재난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도록 한 걸음 나아가는 주춧돌이 되고자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참사를 겪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피해당사자로서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사회 각계에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우선 정부와 여야 정치권을 향해 “이태원 참사는 정쟁의 도구로 소모되어서는 결코 안 될 엄청난 국가적 재난 참사”라며 “그러므로 이 참사가 정치권에 부여하는 의미를 깊이 되새기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을 진지하게 이행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를 향해선 “참사 직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안전사회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활동하고 함께 걸어주셨던 것을 기억한다”며 “이제 막 걸음을 뗀 진상조사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감시자이자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드린다. 진상을 규명하고 그 책임을 묻는 과정에, 그리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그 긴 과정에 지치지 않는 걸음으로 함께해달라”라고 호소했다.
끝으로 시민들에게도 “함께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 2년간 여러분들이 보여주신 연대는 우리 유가족들이 버텨온 힘이자 위로였고 응원이었다. 또한 왜곡된 시선으로 악의적인 모욕과 폄훼를 퍼붓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버티게 해 준 힘이었다”며 “그러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이는 수많은 생존피해자와 목격자들이 이태원 참사를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일을 주저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들에 맞서 이태원 참사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함께 해달라”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꿈들의 잃어버린 진실을 찾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내딛고 있다”며 “그 긴 여정에 지치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거듭 호소했다.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을 맡은 송기춘 특조위원장은 이날 추모대회에 참석해 “유가족들의 애끓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송 위원장은 “위원회는 2년 전 10월 29일 밤의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 왜 희생자와 피해자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들이 행해졌는지, 왜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는지,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이러한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우리들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의문과 요청에 답하고자 한다”며 “우리는 참사 원인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조건을 확보하고 그런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 함께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송 위원장은 “위원들은 추천된 정당과 무관하게 활동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참사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규명하려 한다. 특조위원 9명의 뜻과 마음도 결코 다르지 않다”며 “위원회가 가지는 권한의 한계에도 많은 분들이 진상규명 작업에 함께할 것으로 믿는다. 진실은 밝혀지고 거짓은 드러나지 않을 리 없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 초 야당이 통과시킨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지난 5월 여야 합의로 수정안이 통과되면서 특조위는 어렵게 출범했다. 첫 회의는 지난 9월 개시됐고, 활동 기간은 조사 개시 결정일로부터 1년이며 3개월 이내 범위에서 한 차례 연장 가능하다. 특조위는 참사 발생 원인과 수습 과정, 후속 조처 등 참사 전반의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까지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유가족들, 정부와 국회 향해 “정치가 해야 할 역할 해달라” 당부
여야 7개 정당 대표들, 한목소리로 ‘특조위 지원’ 약속
유가족들의 간절한 호소에 정치권도 화답했다. 추모대회에는 여야 7개 정당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특히 야당 대표들은 참사에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정부를 질타하며,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국회의 역할을 약속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폭력이다. 이태원 참사가 인재라는 증거가 차고 넘치지만 참사의 책임자는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있다”며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통과됐지만, 특조위 임명은 지체됐고, 예산과 인력 지원은 요원하다. 과연 정부가 이태원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엄벌할 수 의지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는지 심각하게 따져 묻게 된다”라고 비판했다.
박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특조위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충분한 예산과 인력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며 “반드시 참사의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고 책임져야 할 이들이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함께 분노하고 싸우겠다”라고 힘줘 말했다.
황운하 조국혁신당 원내대표도 “그날 국가와 정부가 제 역할을 다했다면 수많은 생명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유가족들은 진실과 정의를 밝히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왔지만 참사를 둘러싼 책임 있는 이들은 하나둘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조위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야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고, 조사 권한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정부를 상대로 한 증거와 자료 확보가 필요한 조사이기 때문에 앞으로 길고 지난한 싸움이 예상된다”며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혁신당은 특조위 활동에 최대한 협조하고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는 “지난 2년간 온갖 난관을 헤치고 싸워 마침내 특조위를 출범시키며 진실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고 국민을 대신해 맨 앞에서 싸워준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 상임대표는 “어렵사리 출범한 특조위가 여러 악조권을 뚫고 감춰진 진실의 문을 열고 책임자 처벌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진보당이 함께 하겠다”며 “진실을 감추고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공직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생각조차 없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시민과 함께 손잡고 싸워 나가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처럼 야당 대표들의 발언이 끝날마다 참가자들은 환호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반대해 온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가 무대에 오르자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거센 항의와 야유를 보냈다.
추 원내대표는 “다시는 이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할 뿐”이라며 “특조위의 피해구제심의위원회와 추모위원회도 조만간 출범한다. 관련 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국가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도록 국회가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을 향한 항의는 추 원내대표의 발언을 끝내고 내려올 때도 이어졌다. 한 유가족은 추 원내대표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어디서 발언을 하느냐”고 소리쳤다.
이날 추모대회에서는 특별한 추모 공연이 준비 돼 시민들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가수 하림이 오래된 지인이자, 이태원 참사 유가족인 최정주 씨(고 최유진 님 아버지)가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작사, 작곡한 추모곡 ‘별에게’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하림의 노래가 시작되자, 참석자들은 희생자들을 향한 마음이 하늘에 닿을 수 있도록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켜고 함께 추모곡을 들었다.
한편 유가족과 시민들은 시민추모대회에 앞서 참사가 발생했던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4대 종단 기도회를 진행한 뒤, 용산 대통령실을 거쳐 서울광장까지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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