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청산면 상예곡리 3대고택 '김진사댁' 일궈온 93세 정헌애씨 이야기
큰사진보기 | |
▲ 충북 옥천군 청산면 상예곡리 "김진사댁"의 정헌애씨 | |
ⓒ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군 청산면 상예곡리에는 고택이 세 개 있다. 김광로 선생이 우암 송시열 선생과 함께 후학을 양성했다던 예곡정사, 광산 김씨 문중의 제사를 지낼 때 집안 사람들이 모인다는 김씨 종갓집 그리고 바로 '김진사댁'이다.
고조할아버지 대에 지어졌다는 김진사댁에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 이 집을 자신의 세상처럼 여기며 살아왔다는 정헌애(93)씨다. 그는 이 집에서 겪은 모든 일이 마치 어제 꾼 꿈처럼 아득하고도 생생하다며 묻어둔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정헌애씨의 시점에서 내러티브 형식으로 재구성한 사연이다.
진사댁에 시집온 새각시의 임무
김 진사가 누구냐고? 우리 시아버지야. 그런데 시할아버지 때부터 진사댁이라 불렸다고 그래. 시할아버지는 참봉, 시아버지는 진사를 달았다지. 이 집에 시할아버지를 모시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리가 어려워 죄 없애버렸어.
없어진 게 사당뿐인가. 광채며 사랑채, 행랑채도 관리가 어려워 전부 없앴지. 외양간이며 가매채(가마채), 목욕간, 사랑채, 사당, 행랑채, 안채 하다못해 방앗간도 있었어. 지금은 시어머님이 지내던 안채만 남겨놓고 나 홀로 생활한다오.
이 집에 대한 첫 기억이라... 나 새각시 시절에는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떠야만 했어. 어른들 기침 전에 세수도 하고 곱게 분칠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차려입었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 몸단장이 아냐. 이 집 삽짝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일이야. 해가 뜨기 전에 문을 열고, 해가 지는 찰나 문을 걸어야 하는 게 새각시의 일이었지. 이게 이 집에 대한 내 첫 번째 기억이라오.
우리 시아버지는 형제간에 우애가 참 좋았어. 집성촌인 이 마을에선 여기 사는 사람들이 죄다 형제였지. 집에 손님들이 엄청나게 드나들었다오. 이 집 관리는 시어머니와 내게 맡겨놓은 한량이었지. 술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내가 놋그릇에 술을 떠다가 20분에 한 번씩 술을 날랐어. 버선이 남아날 일이 없을 정도였지. 시어머니는 매일 술을 담았어. 누룩, 찹쌀, 멥쌀 그 냄새가 아직도 코끝을 스치네. 지금은 술이라면 그저 바라보기도 싫은 정도야.
내가 시집오던 때는 일제강점기였다오. 16살 정도가 되면 군인들이 처녀를 끌구 갔지. 철도에서 처녀들을 가로채서 기차에 태워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거야. 당시 어른들 말로 신세 조지는 거라고 그래.
우리 집 어른들은 나를 각별히 아꼈어. 특히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나를 많이 아꼈다오. 내 이름이 헌애잖아. 울 아버지 눈에 내가 하도 귀여우니, 평생 사랑받고 살라고 '사랑 애(愛)' 자를 이름에 붙여주신 거야. 그러니 일본 놈들이 나를 훔쳐 갈까 얼마나 노심초사했겠어? 시집 자리를 서둘러 알아본 게지. 그렇게 이 집으로 시집을 왔다오.
시집을 와서 3년간 아침 저녁으로 바삐 시집살이시키더니, 얼마간 쉬다 오라며 나를 친정에 보내더라구. 가을이었어. 친정 가는 길이 참 좋았어. 콩닥콩닥 가슴이 다 설레더라고. 내 고향이 영동 심천인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멀게만 느껴졌는지 몰라. 눈앞에 집이 아른거렸어. 친정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 날 시댁에서 편지를 한 통 부쳐 온 거야. 집에서 살림을 봐주던 할매가 돌아가셨으니, 날 더러 다시 돌아오라더군. 내참, 출가외인인데 별수가 있어? 돌아가야지.
나를 예뻐하던 울 아버지가 나를 이 동네까지 데려다줬어. 그때가 음력 4월이야. 아버지가 모시 두루마기를 점잖이 차려입고 친정서 직접 만든 귀한 엿 한 광주리를 들고, 자갈밭이며 흙탕길을 자신의 몸을 앞세워 나를 이끌고 왔어. 혹시 길에서 나를 놓칠까 돌아보며 노심초사 걱정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오.
청산에 도착하니 시댁 일꾼 몇 명이 나를 데리러 나와 있더라고. 아버지께서는 나를 앞에 두고 '앞으로도 시부모님 잘 받들고 살거라' 하시더니,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봐.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 '얘야, 헌애야. 내가 곧 회갑이니 너도 그날 집에 꼭 오너라' 당부하셨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그때 필히 오너라' 다정히 말씀하셨어. 이 애비 회갑 때 꼭 오너라. 그때 다시 만나자... 그 말이 내 기억 속 울 아버지 마지막 말씀이야.
전쟁통에도 떠날 수 없던 집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지더군. 쿵쿵 소리가 나고 인민군이 총을 차고 돌아다닌다고 하대. 그래도 나는 이 마을에만 있으니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잘 몰랐다, 이거야. 인민군이 마을에 오기는 왔어. 학교가 있으니 거기서 밥도 먹고 모여있기도 하더라고.
어느 날 내가 하늘을 올려 보니, 울 친정이 있는 심천 방향에 불이 번쩍번쩍하는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6.25 난리 통에 마을이 절단이 났다 하대. 마을 사람들이 다 죽거나 객지로 피난을 나간 게지.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는데, 감나무에 묶어둔 소가 그 소리만 듣고도 며칠을 날뛰다 놀라서 죽어버리더랴. 그 소를 땅에 묻으니 이듬해 주먹 두 개만한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고 그래.
근데 문제는 그 폭탄에 우리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마을에 거짓 소문이 났더라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놀라 그길로 며칠간 시름시름 앓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더구먼. 우리 오라버니는 집에 돌아와 이 소식을 알고 그 애통함에 가슴을 쳤대지.
우리 외할아버지가 내게 울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며칠을 걸어 걸어 청산엘 오려는데, 전쟁통에 길이 막혀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더라고. 며칠 뒤에 다시 출발하려는데, 울 엄니 꿈에 울 아버지가 나와서 그러더랴. 헌애한텐 알리지 말라고.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하염없이 이 집을 지키고만 있었다오.
우리 바깥양반? 이 집엘랑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외양간이며 가매채, 목욕간, 사랑채, 사당, 행랑채, 안채, 방앗간... 어휴 그걸 다 말해 뭐해. 400평에 이르는 큰 집을 그저 나와 시어머니께 맡겨놓고 객지 생활을 했다오. 바깥양반은 아무것도 할 줄 몰랐어. 그냥 이 세상에 없다고 일찍이 단념했지. 덕분에 이 집을 내가 도맡아 살림을 보는데, 혼자 이 거대한 집을 관리하는 것이 어디 편하겠남? 주먹을 꼭 쥐고 아침마다 마음을 굳게 먹었지.
새마을 운동할 때인가, 마을 초가집 지붕을 죄다 뜯겠다고 그러대. 그 찰나에 우리 집 지붕도 서까래가 무너지고 골이 지더군. 영동에서 기술자를 어렵사리 수소문해 그 양반을 불러다 마당에서 한 계절 내내 내둥 기와를 구워 올렸다오. 근데 어째 내가 속은 것 같아. 기와가 무거워서 집이 휘더구먼. 이건 아니다 싶걸래 다시 알아봐서 대전에서 대목이라 불리는 유명한 목수를 불렀어. 새마을 기와라는 게 있는데 그게 가볍다고 그걸 써보랴. 얹었지. 괜찮겠다 싶어 한숨 돌리는 순간 비가 새.
아, 날 더러 하라는 계시구나 싶더라.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가 닭의 눈처럼 뽕뽕 뚫린 구멍 수백여 개를 하나씩 땜질을 했어. 남자들이 나를 보고 혀를 내두르더라. 아, 그래도 온전치 않은 거야, 집이. 정확히 2년이 지나니 비가 도루 새더구먼. 비니루 공장엘 찾아가서 거대한 비니루를 몇 장 얻어왔지. 다시 지붕에 올라가 돌멩이루 비닐을 꾹 눌러 놓구 매일 같이 지붕에 올라가 땜질을 했어. 나는 여자래두 지붕에 올라가 살았어.
어느 날 관광으로 강원도 인제 백담사엘 갔는데 거기 가서 보니 내 눈에 기와가 달리 보이더라구. 물어보니 그게 동기와래. 재질이 동판이고 묵직하면서도 얹으면 우아하다는 거지. 집에 돌아와서 마을에 좀 배웠다는 공학 박사를 시켜
동기와 회사를 알아봤어. 수소문 끝에 청주에서 사람을 불러 동기와를 얹었지. 지금 집 기와가 그 기와야. 그저 이 집을 건사하겠다는 일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 일꾼들이 여자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정신을 똑똑히 하자. 일꾼 여덟 밥을 섭섭지 않게 다 해주고, 금전을 관리하고 지붕엘 따라 올라가 지시하면서 엄하게 했지.
내 대에서 이 집 기둥을 살리지 않으면 모든 게 다 무너진다. 오직 그것만 생각했어. 집이 없으면 가문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정신으로 세 번이나 이 집 기와를 갈았다 이거야.
매일매일이 어제 꾼 꿈같아. 생생하지만 아득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지금은 물 한 꾸러미도 못 드는데 말야. 마을 사람들이 남자가 사는 집도 이렇겐 관리 못 할 거라고 날 추켜세우면 앞에서는 수줍어했지만, 사실 속으론 당당한 마음이었어. 우리 마을에서도 유명한 집이 됐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것
내 어린 시절 얘기도 이 집을 유지해온 얘기만큼 흥미롭다오. 내가 아홉 살 적에 또래 사촌이랑 나물을 뜯으러 간 거야. 나물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촌이 가자니 철모르고 따라간 거지. 그런데 까마귀 두 마리가 나랑 사촌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도는 거라. 그러더니 둘 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시작해.
그날 저녁부터 둘이 똑같이 병상에 드러눕더니 죽는시늉을 하면서 아무것도 먹덜 못해. 자꾸 뭐가 먹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사다 주면 입을 딱 다물고 먹덜 안 햐. 그렇게 다섯 달을 내내 앓아누웠어. 사람들은 죽을 거라고 했지. 자꾸 뭘 먹고 싶다고 하는데 구해다 주면 입을 열질 않는 거야.
동네 어른들 말을 들어보니 마귀가 붙었다더구먼. 뭘 얻어먹으려고 걸신 같은 마귀가 붙은 거야. 다섯 달을 드러누워선 먹지는 않고 죽지도 않고 계속 요구만 하더래.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누워서 창밖을 딱 보는데, 햇살이 환하게 느껴져. 따뜻하고, 어째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더라고. 그러더니 양지를 향해 머리를 먼저 들고 몸을 일으켰어. 그런데 그때 마침 내 사촌도 똑같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는 거야. 그날로 마귀가 떨어진 거지.
한번 죽었다 깨어나서 그런가? 내가 어릴 땐 꽤나 영명하고 총명했다오. 시집을 와서도 불을 때면서 책을 읽었지. 그때 그 총기를 이 집 유지하는 데 다 보탠 게야. 누구는 방이 줄고 집에 뭐가 많이 없어졌다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만, 나는 내 선에서 정리한 것들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오. 그 거대한 집채를 다 두고 있었으면, 이 늙은이 어깨는 더 무겁고 후손들은 그걸 돌보느라 버거웠을 게지.
텔레비전을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싶다가도, 이 집 바깥을 슬슬 걸어보면 많이 변하지 않은 것도 같다오. 마을 사람들 무해하고, 무득하고 인심 좋은 건 그대로구나, 늘상 고맙게 생각해.
그래 맞아, 그래도 세월은 많이도 변했어. 지금은 유행 따라 살아간다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어. 그저 진득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거지.
젊은 시절엔 어딜 놀러 가도 집들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더군. 내가 집을 세상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거야. 100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내 눈에도 조금씩 다른 것이 들어오기 시작한다오. 세상엔 보고 살만한 것들이 실은 무수히 많았던 게지. 그래서 내 집에 쏟아지는 관심이 그저 어리둥절해.
내 소원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 건강하게 잘 지내고 무탈하게 사는 것. 지금까지는 내 복을 이 집 건사하고 내가 살아오는 데 다 써버린 것만 같아. 그래도 내게 나눠줄 수 있는 복이 남았다면, 이 마을 누구든 가리지 않고 똑같이 나눠 주고 싶어. 이건 아주 옛날부터 영원히 변치 않을 나의 유일한 소원이라오.
월간옥이네 통권 57호(2022년 3월호)
글·사진 서효원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구입하기 (https://smartstore.naver.com/monthlyoki)
없어진 게 사당뿐인가. 광채며 사랑채, 행랑채도 관리가 어려워 전부 없앴지. 외양간이며 가매채(가마채), 목욕간, 사랑채, 사당, 행랑채, 안채 하다못해 방앗간도 있었어. 지금은 시어머님이 지내던 안채만 남겨놓고 나 홀로 생활한다오.
이 집에 대한 첫 기억이라... 나 새각시 시절에는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떠야만 했어. 어른들 기침 전에 세수도 하고 곱게 분칠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차려입었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 몸단장이 아냐. 이 집 삽짝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일이야. 해가 뜨기 전에 문을 열고, 해가 지는 찰나 문을 걸어야 하는 게 새각시의 일이었지. 이게 이 집에 대한 내 첫 번째 기억이라오.
우리 시아버지는 형제간에 우애가 참 좋았어. 집성촌인 이 마을에선 여기 사는 사람들이 죄다 형제였지. 집에 손님들이 엄청나게 드나들었다오. 이 집 관리는 시어머니와 내게 맡겨놓은 한량이었지. 술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내가 놋그릇에 술을 떠다가 20분에 한 번씩 술을 날랐어. 버선이 남아날 일이 없을 정도였지. 시어머니는 매일 술을 담았어. 누룩, 찹쌀, 멥쌀 그 냄새가 아직도 코끝을 스치네. 지금은 술이라면 그저 바라보기도 싫은 정도야.
내가 시집오던 때는 일제강점기였다오. 16살 정도가 되면 군인들이 처녀를 끌구 갔지. 철도에서 처녀들을 가로채서 기차에 태워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거야. 당시 어른들 말로 신세 조지는 거라고 그래.
우리 집 어른들은 나를 각별히 아꼈어. 특히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나를 많이 아꼈다오. 내 이름이 헌애잖아. 울 아버지 눈에 내가 하도 귀여우니, 평생 사랑받고 살라고 '사랑 애(愛)' 자를 이름에 붙여주신 거야. 그러니 일본 놈들이 나를 훔쳐 갈까 얼마나 노심초사했겠어? 시집 자리를 서둘러 알아본 게지. 그렇게 이 집으로 시집을 왔다오.
시집을 와서 3년간 아침 저녁으로 바삐 시집살이시키더니, 얼마간 쉬다 오라며 나를 친정에 보내더라구. 가을이었어. 친정 가는 길이 참 좋았어. 콩닥콩닥 가슴이 다 설레더라고. 내 고향이 영동 심천인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멀게만 느껴졌는지 몰라. 눈앞에 집이 아른거렸어. 친정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 날 시댁에서 편지를 한 통 부쳐 온 거야. 집에서 살림을 봐주던 할매가 돌아가셨으니, 날 더러 다시 돌아오라더군. 내참, 출가외인인데 별수가 있어? 돌아가야지.
나를 예뻐하던 울 아버지가 나를 이 동네까지 데려다줬어. 그때가 음력 4월이야. 아버지가 모시 두루마기를 점잖이 차려입고 친정서 직접 만든 귀한 엿 한 광주리를 들고, 자갈밭이며 흙탕길을 자신의 몸을 앞세워 나를 이끌고 왔어. 혹시 길에서 나를 놓칠까 돌아보며 노심초사 걱정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오.
청산에 도착하니 시댁 일꾼 몇 명이 나를 데리러 나와 있더라고. 아버지께서는 나를 앞에 두고 '앞으로도 시부모님 잘 받들고 살거라' 하시더니,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봐.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 '얘야, 헌애야. 내가 곧 회갑이니 너도 그날 집에 꼭 오너라' 당부하셨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그때 필히 오너라' 다정히 말씀하셨어. 이 애비 회갑 때 꼭 오너라. 그때 다시 만나자... 그 말이 내 기억 속 울 아버지 마지막 말씀이야.
전쟁통에도 떠날 수 없던 집
큰사진보기 | |
▲ 충북 옥천군 청산면 상예곡리 3대고택인 "김진사댁" | |
ⓒ 월간 옥이네 |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지더군. 쿵쿵 소리가 나고 인민군이 총을 차고 돌아다닌다고 하대. 그래도 나는 이 마을에만 있으니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잘 몰랐다, 이거야. 인민군이 마을에 오기는 왔어. 학교가 있으니 거기서 밥도 먹고 모여있기도 하더라고.
어느 날 내가 하늘을 올려 보니, 울 친정이 있는 심천 방향에 불이 번쩍번쩍하는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6.25 난리 통에 마을이 절단이 났다 하대. 마을 사람들이 다 죽거나 객지로 피난을 나간 게지.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는데, 감나무에 묶어둔 소가 그 소리만 듣고도 며칠을 날뛰다 놀라서 죽어버리더랴. 그 소를 땅에 묻으니 이듬해 주먹 두 개만한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고 그래.
근데 문제는 그 폭탄에 우리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마을에 거짓 소문이 났더라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놀라 그길로 며칠간 시름시름 앓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더구먼. 우리 오라버니는 집에 돌아와 이 소식을 알고 그 애통함에 가슴을 쳤대지.
우리 외할아버지가 내게 울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며칠을 걸어 걸어 청산엘 오려는데, 전쟁통에 길이 막혀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더라고. 며칠 뒤에 다시 출발하려는데, 울 엄니 꿈에 울 아버지가 나와서 그러더랴. 헌애한텐 알리지 말라고.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하염없이 이 집을 지키고만 있었다오.
우리 바깥양반? 이 집엘랑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외양간이며 가매채, 목욕간, 사랑채, 사당, 행랑채, 안채, 방앗간... 어휴 그걸 다 말해 뭐해. 400평에 이르는 큰 집을 그저 나와 시어머니께 맡겨놓고 객지 생활을 했다오. 바깥양반은 아무것도 할 줄 몰랐어. 그냥 이 세상에 없다고 일찍이 단념했지. 덕분에 이 집을 내가 도맡아 살림을 보는데, 혼자 이 거대한 집을 관리하는 것이 어디 편하겠남? 주먹을 꼭 쥐고 아침마다 마음을 굳게 먹었지.
새마을 운동할 때인가, 마을 초가집 지붕을 죄다 뜯겠다고 그러대. 그 찰나에 우리 집 지붕도 서까래가 무너지고 골이 지더군. 영동에서 기술자를 어렵사리 수소문해 그 양반을 불러다 마당에서 한 계절 내내 내둥 기와를 구워 올렸다오. 근데 어째 내가 속은 것 같아. 기와가 무거워서 집이 휘더구먼. 이건 아니다 싶걸래 다시 알아봐서 대전에서 대목이라 불리는 유명한 목수를 불렀어. 새마을 기와라는 게 있는데 그게 가볍다고 그걸 써보랴. 얹었지. 괜찮겠다 싶어 한숨 돌리는 순간 비가 새.
아, 날 더러 하라는 계시구나 싶더라.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가 닭의 눈처럼 뽕뽕 뚫린 구멍 수백여 개를 하나씩 땜질을 했어. 남자들이 나를 보고 혀를 내두르더라. 아, 그래도 온전치 않은 거야, 집이. 정확히 2년이 지나니 비가 도루 새더구먼. 비니루 공장엘 찾아가서 거대한 비니루를 몇 장 얻어왔지. 다시 지붕에 올라가 돌멩이루 비닐을 꾹 눌러 놓구 매일 같이 지붕에 올라가 땜질을 했어. 나는 여자래두 지붕에 올라가 살았어.
어느 날 관광으로 강원도 인제 백담사엘 갔는데 거기 가서 보니 내 눈에 기와가 달리 보이더라구. 물어보니 그게 동기와래. 재질이 동판이고 묵직하면서도 얹으면 우아하다는 거지. 집에 돌아와서 마을에 좀 배웠다는 공학 박사를 시켜
동기와 회사를 알아봤어. 수소문 끝에 청주에서 사람을 불러 동기와를 얹었지. 지금 집 기와가 그 기와야. 그저 이 집을 건사하겠다는 일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 일꾼들이 여자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정신을 똑똑히 하자. 일꾼 여덟 밥을 섭섭지 않게 다 해주고, 금전을 관리하고 지붕엘 따라 올라가 지시하면서 엄하게 했지.
내 대에서 이 집 기둥을 살리지 않으면 모든 게 다 무너진다. 오직 그것만 생각했어. 집이 없으면 가문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정신으로 세 번이나 이 집 기와를 갈았다 이거야.
매일매일이 어제 꾼 꿈같아. 생생하지만 아득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지금은 물 한 꾸러미도 못 드는데 말야. 마을 사람들이 남자가 사는 집도 이렇겐 관리 못 할 거라고 날 추켜세우면 앞에서는 수줍어했지만, 사실 속으론 당당한 마음이었어. 우리 마을에서도 유명한 집이 됐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것
▲ 충북 옥천군 청산면 상예곡리 "김진사댁"의 정헌애씨 | |
ⓒ 월간 옥이네 |
내 어린 시절 얘기도 이 집을 유지해온 얘기만큼 흥미롭다오. 내가 아홉 살 적에 또래 사촌이랑 나물을 뜯으러 간 거야. 나물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촌이 가자니 철모르고 따라간 거지. 그런데 까마귀 두 마리가 나랑 사촌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도는 거라. 그러더니 둘 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시작해.
그날 저녁부터 둘이 똑같이 병상에 드러눕더니 죽는시늉을 하면서 아무것도 먹덜 못해. 자꾸 뭐가 먹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사다 주면 입을 딱 다물고 먹덜 안 햐. 그렇게 다섯 달을 내내 앓아누웠어. 사람들은 죽을 거라고 했지. 자꾸 뭘 먹고 싶다고 하는데 구해다 주면 입을 열질 않는 거야.
동네 어른들 말을 들어보니 마귀가 붙었다더구먼. 뭘 얻어먹으려고 걸신 같은 마귀가 붙은 거야. 다섯 달을 드러누워선 먹지는 않고 죽지도 않고 계속 요구만 하더래.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누워서 창밖을 딱 보는데, 햇살이 환하게 느껴져. 따뜻하고, 어째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더라고. 그러더니 양지를 향해 머리를 먼저 들고 몸을 일으켰어. 그런데 그때 마침 내 사촌도 똑같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는 거야. 그날로 마귀가 떨어진 거지.
한번 죽었다 깨어나서 그런가? 내가 어릴 땐 꽤나 영명하고 총명했다오. 시집을 와서도 불을 때면서 책을 읽었지. 그때 그 총기를 이 집 유지하는 데 다 보탠 게야. 누구는 방이 줄고 집에 뭐가 많이 없어졌다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만, 나는 내 선에서 정리한 것들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오. 그 거대한 집채를 다 두고 있었으면, 이 늙은이 어깨는 더 무겁고 후손들은 그걸 돌보느라 버거웠을 게지.
텔레비전을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싶다가도, 이 집 바깥을 슬슬 걸어보면 많이 변하지 않은 것도 같다오. 마을 사람들 무해하고, 무득하고 인심 좋은 건 그대로구나, 늘상 고맙게 생각해.
그래 맞아, 그래도 세월은 많이도 변했어. 지금은 유행 따라 살아간다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어. 그저 진득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거지.
젊은 시절엔 어딜 놀러 가도 집들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더군. 내가 집을 세상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거야. 100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야 내 눈에도 조금씩 다른 것이 들어오기 시작한다오. 세상엔 보고 살만한 것들이 실은 무수히 많았던 게지. 그래서 내 집에 쏟아지는 관심이 그저 어리둥절해.
내 소원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 건강하게 잘 지내고 무탈하게 사는 것. 지금까지는 내 복을 이 집 건사하고 내가 살아오는 데 다 써버린 것만 같아. 그래도 내게 나눠줄 수 있는 복이 남았다면, 이 마을 누구든 가리지 않고 똑같이 나눠 주고 싶어. 이건 아주 옛날부터 영원히 변치 않을 나의 유일한 소원이라오.
월간옥이네 통권 57호(2022년 3월호)
글·사진 서효원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구입하기 (https://smartstore.naver.com/monthlyoki)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