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역사 최초 흑인 여성 대법관 임명 과정이 보여준 '희망'과 '좌절'
NYT "기이한 청문회"…흑인 여성들 "잭슨 참는 모습 보며 내 모습 떠올라 고통"
김효진 기자 | 기사입력 2022.04.09. 09:53:47
"여성이 무엇인지 정의해보세요."
"당신은 아기들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가르치는 책에 동의합니까?"
"당신의 종교적 신실함의 정도를 1에서 10 사이의 숫자로 표현해 보시죠."
7일(현지시간) 미국 상원에서 인준동의안이 통과되며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이 된 커탄지 브라운 잭슨(51)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달 상원 청문회 기간 동안 들은 질문들이다. 공화당 의원들의 각종 신랄한 공격에도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임했다는 평가를 받은 잭슨도 이 같은 질문 앞에서는 잠시 멈칫하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가르치는 책에 동의하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은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이 했다. 크루즈는 <반인종차별주의자 아기(Antiracist Baby)>라는 어린이를 위한 인종차별방지 교육 그림책을 들고 나왔다. 그는 이 책을 잭슨이 이사로 재직 중인 워싱턴에 위치한 사립학교 조지타운데이스쿨에서 4~7살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학교의 커리큘럼이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CRT)으로 가득차 있다"며 해당 질문을 던졌다. 잭슨은 "의원님" 하고 잠시 한숨을 내뱉은 뒤 "저는 어떤 어린이도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며 "그 책은 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비록 명시적인 법과 제도가 인종차별을 금하고 있더라도 미국의 법·제도·교육·노동시장·주택시장 등 사회 전반에 인종차별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비판적 인종이론은 1980년대에 공식화 됐고 사상의 기원은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혀 새롭지 않은 개념이다. 이는 또 법학 등 대학 이상의 고등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퍼진 인종차별 철폐운동인 BLM(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에 대한 백래시 차원에서 조명받게 됐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우파들은 이 비판적 인종이론이 백인들에게 죄책감을 심고 사회를 분열시킨다며 학교에서 관련된 교육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이 뭔지 정의해보라는 질문은 마샤 블랙번 공화당 상원의원이 던졌다. 잭슨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다 "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생물학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블랙번은 "여성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즉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보적 교육의 위험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블랙번의 해당 질문은 지난달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 수영 대회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인 리아 토마스 선수가 여자 자유형 500야드 종목에서 우승한 것을 두고 미국 사회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던 맥락에서 나왔다.
공화당은 백인들이 단체로 한 명의 흑인 여성을 공격하는 그림을 피하기 위해 잭슨 청문회를 시작하며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NYT)는 평가했다. 매체는 법에 대한 질문이 적고 정치적 질문으로 가득했던 이번 청문회가 "기이하기까지 했다"며 "상원의 대법관 인준 절차가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증거"라고 봤다. 패트릭 리히 민주당 상원의원은 잭슨 청문회를 두고 "공화당 의원들은 할당된 시간을 넘기며 후보자를 괴롭히고 질문에 답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며 "48년간 회의장에서 그 정도 수준의 무례함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고 이 매체는 보도했다.
첫 흑인 여성 대법관 탄생을 앞두고 청문회를 유심히 지켜 본 흑인 여성들은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변호사 지망생인 조던 심슨(25)은 청문회를 보며 대학에서 첫 흑인 학생회장으로 선출됐을 때 백인 남성들이 그녀를 방해하던 것이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인종과 정치 연구자인 앤드라 길레스피 에모리대 교수는 청문회를 보던 그의 어머니가 속이 상해 교회에 가서 마음을 풀었다고 전했다.
청문회에서 잭슨이 극단적 인종차별반대자로 매도되는 등 신랄한 공격을 당하는 것을 보며 흑인 여성들은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 겪는 잘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떠올렸다고 한다. 터무니 없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잭슨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보며 40년 이상 변호사로 활동한 린 위트필드(67)는 "우리 모두가 그 느낌을 알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친절하게 굴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공격적인 모습은 사회에서 용인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길레스티 교수는 2018년 브렛 캐버노 당시 대법관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자 강하게 분노를 표출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그러나 만일 잭슨이 그렇게 했다면 화를 참지 못하는 흑인 여성은 기질적으로 부적합하다는 평을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는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청문회에서 침착한 태도의 잭슨을 지켜보는 것이 "많은 흑인여성들에게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다"며 "우리는 잭슨 판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침착하고, 둔감하고, 인내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고 썼다.
과정은 험난했지만 잭슨은 그의 후배 흑인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잭슨의 출신 대학인 하버드 로스쿨에 재학 중인 흑인 여성 브리아나 뱅크스(26)는 이 매체에 "하버드 로스쿨 출신 대법관이 많지만 나는 절대 나는 대법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들 하지만 흑인 여성에게는 아니다"라며 잭슨이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됐을 때 울음을 터뜨렸다고 회상했다. 클리블랜드 주립대 로스쿨 학생인 스테파니 고간스(36)은 "내가 평생을 살아갈 이 나라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나와 같은 얼굴의 사람을 볼 수 있게 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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