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외교문서 40만쪽 공개, ‘UN 동시가입’ 등 담겨
- 김치관 기자
- 입력 2022.04.15 19:37
- 수정 2022.04.1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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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공관장들, 외교장관에게 범민련 동향 공문으로 보고
“현재까지 귀주재국 등 단체의 결성현황(지역본부 및 각지부 결성현황, 관련인사 및 참고사항등)을 종합 파악 보고바람.”(1권 0040쪽)
최호중 외교부장관은 1990년 11월께 각국 대사와 총영사들에게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와 지부 결성 현황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각국 대사와 총영사들은 속속 현황을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주 라성(LA) 총영사는 90년 11월 26일 “남가주 범민련 결성”을 외교장관에게 공문으로 보고했고, 주 시애틀 총영사는 12월 7일 ‘범민족 연합 시애틀지부 결성대회’를 보고했다.
외교부가 30년이 경과한 1991년 전후의 외교문서 2,466권(약 40.5만여 쪽)을 15일 공개했고 이 문서 중에는 범민련 결성 과정에서 외교부가 재외공관 등과 주고받은 문서 등 2권 340여 쪽이 포함됐다.
[2019080119]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 및 동향, 1990-91. 전2권(V.1 1990)
[32400]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 및 동향, 1990-91. 전2권(V.2 1991)
외교부 장관은 지시 공문에서 “향후 동 단체의 특이동향에 관하여도 수시 보고바람”이라고 덧붙였고, 주 독(일) 대사는 1990년 12월 7일 “범민련 시위보고” 제목의 공문을 보고했다. 주 시애틀 총영사는 12월 11일 “범민련 데모”를 보고했고, 주 백림(베를린) 총영사는 12월 13일 가두시위 “첩보보고” 공문을 보냈다.(1권 0088쪽)
주미 대사는 1991년 3월 29일 장관에게 “반체제 시위”를 보고하면서 “당관은 범민련 측이 당지 교포 언론에 사전 배포한 자료를 통해 일시및 장소를 탐지하고 워싱턴 시경및 US SECRET SERVICE 에 경비를 요청,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음”이라고 내세웠다.(2권 0046쪽)
주일 대사는 1991년 8월 13일 장관에게 “당지 조총련 및 한통련측은 8.15(목) 13:00 동경소재 “진산소”(연회장)에서 1천명 규모의 범민족 대회를 개최하며... 91명의 해외교포가 동대회 참가를 위하여 이미 일본에 입국하였다 함. 이와관련 당관은 상기인들이 동 대회 이후 한국입국을 기도할 가능성에 대비, 주일지역 전공관에 동인들의 명단을 통보하고 입국사증 신청시 이를 불허하도록 지시하였음을 참고바람“이라고 보고했다.(2권 0199쪽)
외교부는 베를린 3자회의 등에 대해서는 남북해외 참석자 명단은 물론 토의 내용 등을 상세히 수집, 보고했고, 범민련과 관련 단체들의 각종 성명서 등이 공문에 첨부되기도 했다.
각 재외공관의 범민련 지역본부(지부) 결성과 ‘특이동향’ 보고 공문은 여러 쪽(예: 0042-0056쪽, )이 ‘공란’으로 남겨져 당시 정보기관이나 협조자(이른바 프락치)들의 정보활동이 담겨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외교부 관계자는 지난 12일 기자들에게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외교관계상 공개가 어려운 민감한 상황이 있거나, 국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들은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며 “1991년도 생산 문서에 대해서는 정보 투명성과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차원에서 다른 해에 비해서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검토를 했고 심의를 해서 공개를 하게 됐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올해 공개된 문서의 분량은 예년에 비해 대폭 늘었다.
정부, “범민족대회는 ‘통일전선전략’의 일환”
공개된 외교문서들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범민련과 남북해외 3자연대로 추진한 범민족대회에 대해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이라며 행사 ‘불허’는 물론 적극적인 맞대응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는 이번에 공개된 「정부의 입장」에서 “개별단체들이 범민족적 대표성을 자처하고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으로 개최하려는 정치행사에 참여하려는 것은 남북관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범민족 대회를 불허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음”이라고 확인하고 “북한의 ‘조평통’이 민간단체로 가장... 통일전선전략 차원의 정치선전 등 불순한 기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시했다. (1권 0008쪽)
또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48.4) 등 북한의 역사적 제안들을 예시하며 “우리 사회내의 일부 재야 및 운동권을 고무‧선동함으로써 사회혼란과 국론분열을 조장, 이를 반정부투쟁으로 연계시키려는 통일전선전술(대남전복전술)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낙인찍었다(2권 0195쪽).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대교류’를 천명하면서 8.15 범민족대회 서울 개최가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정부측이 제시한 조건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이창복 회고록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삼인) 참조)
정부는 “전민련측은 사회각계 단체에게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했던 약속(7.24)을 스스로 어기고 각계의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자신들만의 범민족대회를 고집하여 결국 성사되지 못한바 있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음이 확인됐다.(1권 0036쪽)
91년 8.15 범민족대회에 맞서 우리 정부는 같은 날 ‘통일대행진’ 행사를 별도로 추진했다. 정부는 ‘통일대행진’을 추진하면서 “우리측이 전민련, 전대협 등을 행사주체에서 배제시킨 것은 이들 재야 및 운동권 단체들이 정부타도를 외치면서 북한의 통일노선에 동조하고 있어국가안보차원에서 우리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이들의 불순행위를 묵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북한과 일부 친북분자들이 정치선전의 마당으로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권 0197쪽)
아울러 91년 범민족대회 추진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친북‧반북 정치선전행사임이 객관적으로 입증됨”이라고 일축했다.(2권 0196쪽) 범민련 핵심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한 것이야말로 당시 노태우 정부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구속자는 조용술 목사(70세), 이해학 목사(45세), 조성우 선생(40세), 이창복 선생(52세), 김희택 선생(40세), 홍근수 목사(53세) 등이다.(2권 0050쪽)
‘범민련’에 대해 “북한 주도하에 철저한 친북‧반한인물들로 구성되어 북한의 통일 및 대남노선을 지지‧동조하는 북한 통일전선전술의 전위조직체”라는 규정은 향후 범민련 남측본부가 95년 이래 ‘이적단체’로 낙인찍힌 전조를 보여준 셈이다.(2권 0184쪽)
외교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올해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실현을 위한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 미주, 일본 등 순방,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1990년대 초 한국 인권 상황, △1967년 발효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이용할 수 있으며, 목록은 '외교사료관 누리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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