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최전선, 제주바다 인터뷰③] 고광민 서민 생활사 연구자
고광민 서민 생활사 연구자가 쓴 <제주 생활사>(한그루, 2016)에는 "OOO씨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OOO씨'는 제주 생활사의 주체임과 동시에 그에게 제주 생활사를 가르쳐준 '스승들'이다. '국가'와 '국사'는 있지만, 백성의 생활사는 없다는 절박함에 전국을 다니며 스승을 만났다고 한다.
제주대학교 후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선생의 집은 흡사 '생활사 박물관'과 같았다. 그곳엔 모양이 서로 다른 해녀의 망사리(그물)가 걸려 있었고 미늘(갈고리) 없는 다금바리 낚시 바늘도 볼 수 있었다. 고광민 연구자를 찾아간 것은 제주 바다의 과거와 현재, 해민(海民)의 생활사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는 '서민생활사 연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지요. "통상 '민속학'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시선이 있어요. 권위적이랄까. '서민생활사'라고 한 것은 주체로서의 '서민'을 강조한 언어예요. 왜냐하면 삶의 주체는 다름 아닌 서민, 그들이지요."
- 땅, 물, 숲, 오름 등에 깃든 제주 서민생활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오셨는데, 그 중 바다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옛 문헌에 '바다의 소나무'라는 산호의 한 종류인 '해송'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하던데요.
"'무회목(無灰木)'이라고 했어요. 혹은 제주어로 '무낭'이라고도 했고요. 옛 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에 제주도 토산물로 나와요. '우도牛島에서 난다. 바다 가운데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여 물결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물 밖에 나오면 굳고 단단하여진다'라고 했어요. 무회목으로 만든 비녀를 관광토산품으로 팔기도 했고요."
- 제주 바다만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한국에는 4가지의 바다가 있다고 봐요. 부산에서 두만강까지는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산이 높고 바다가 깊은 '산고해저山高海底'의 모습이에요. 동해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50cm에 불과하고, 조류가 그렇게 세지 않은 순한 바다입니다. 배의 앞부분도 물살을 가르기 좋은 뾰족한 형태가 많아요. 반면에 제주나 서해의 배는 큰 너울에 강하도록 앞이 뭉툭하지요. 서해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8m에 이르고 경운기가 달릴 수 있는 너른 갯벌이 있는 반면, 남해바다는 고저 차가 3~4m인데, 빠져 버리는 바다입니다. 남해는 낙지를 여자가 감각으로 잡지만, 서해는 낙지를 남자가 힘으로 잡아요. 제주바다는 고저 차가 2.8m 정도인데, 한마디로 화산 바다입니다."
▲ 다금바리 낚시 바늘을 보여주는 고광민 연구자 | |
ⓒ 녹색연합 |
- 제주바다가 예전보다 오염도 심하고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1968년 9월 21일, 이날은 제주도에서 경운기 교육자 수료식이 있던 날입니다. 농촌사회에 기계가 들어간 날이지요. 소로 밭을 가는 방식이 없어지고 더불어 소의 방목지, 소가 먹는 풀도 그다지 필요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상징적인 날이지요.
경운기가 들어오고, 플라스틱이 나타나면서 환경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파도와 마라도, 우도에는 아직 남아 있겠지만, 오분자기가 제주에서 거의 사라졌어요. 'ᄆᆞᆷ국(몸국)'의 재료인 모자반도 우도나 성산 시흥리 외에는 찾기 어려워요. 최근에 기후변화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제주바다가 변한 것은 기후 때문만이 아니에요. 만약 기후변화가 원인이라면 오분자기, 모자반이 제주에서 똑같이 사라져야 하는데, 오염이 덜한 곳은 아직까지 살아 있어요. 자업자득이라 생각합니다. 지구상에서 톳이 가장 긴 곳이 제주였어요. 강원도나 중국의 톳은 손바닥만한데 제주 톳은 3발 정도로 길었어요. 제주 사람은 톳을 밭 거름으로 쓰기도 했지요. 한때 일본에 수출을 하곤 했는데, 제주 톳도 거의 사라져 버렸어요."
- 녹색연합에서 올해 2~3월에 제주바다 조간대 해조숲을 조사했는데, 선생님 말씀처럼 톳, 모자반을 찾기 어려웠어요. 특히 한라산 남쪽인 '산남'이 '산북' 지역보다 상황이 안 좋았어요.
"바다와 땅의 시간은 정반대입니다. 땅의 초목은 봄에 싹이 나 여름에 자라 가을에 열매를 맺고 시들지만, 바다의 초목은 가을에 싹이 나서 겨울에 한참 자라고 봄이 되면 포자를 퍼트리고 삭아버립니다. 땅에 봄이 왔지만, 반대로 바다는 가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때, 풍성해야 할 바다가 텅 비어 있어요. 바다숲이 정말, 싹 사라졌어요."
▲ 감태 줍기(안덕면 대평리, 1998년 6월 26일) 이 마을 "대국"이라고 하는 갯가에 떠밀려온 감태를 한 아낙네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줍고 있다. 이렇게 채취한 감태는 개인소유가 된다. | |
ⓒ 고광민 |
▲ 우뭇가사리 줍기(구좌읍 행원리, 1998년) 우뭇가사리를 허채한 날이다. 저 멀리 경운기가 줄줄이 세워져 있다. 해녀들이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실어 나를 모양이다. 한 할머니가 허리에 구덕을 차고 갯가로 밀려든 풍조 속에서 우뭇가사리를 골라내고 있다. | |
ⓒ 고광민 |
- 제주는 4면이 바다이며 화산섬이라 제주 생활사에서 바다의 의미는 각별할 텐데요. 제주 사람에게 바다란 어떤 존재인가요.
"제주도는 섬이지만 일 년 내내 바다에서 사는 사람(물론 '해민海民'이라는 말은 있지만)은 없었어요. 근본은 농사입니다. 제주도는 화산섬이기에 논이 없고 밭이 있을 뿐이에요. 한때 저수지를 쌓아 논을 만들고자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어요. 애월읍에 있는 수산저수지가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 비가 오면 땅속으로 비가 다 들어가 버리니, 논이 될 수 없는 섬이지요. 제주의 생활하수는 땅속에 들어가 지하수로 흘러 바다에서 나와요. 혹여 바다의 지명 중에 '물 뿜는 여'가 있는데, 이것은 용출수가 나오는 곳이에요.
제주바다는 알다시피,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어요. 현무암의 숭숭 뚫린 구멍은 미역, 모자반 같은 해조류가 섬유질 뿌리를 내리기 좋아요. 어렸을 때 낚시하다 보면, 해조류가 원수였어요. 빽빽이 들어찬 해조류에 걸려 고기를 놓치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할 일이 없어졌어요. '텅에'(물고기 은신처)가 사라지고 먹이도 사라지고 일이 그렇게 돼 버렸어요.
제주 사람에게 제주 바다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미역과 거름이었어요. 제주는 화산섬이기에 논이 없어 쌀이 귀했고 소금도 구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지천으로 널린 미역을 했어요. 캐낸 미역을 싣고 충청도로 가서 쌀과 소금으로 바꿔왔어요. 또한 제주 백성들은 바닷풀을 메다가 밭에 거름으로 줬어요. "듬북을 ᄌᆞ물아사 산다"는 말이 있어요. '듬북'은 제주에서 거름용 해조류를 가리키는 말이고, 'ᄌᆞ물다'는 해녀들이 물질로 물속의 해산물을 건져 올린다는 말이에요. 듬북을 따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인데, 톳과 모자반 같은 해조류를 베어다 육지에서 말려 밭에 거름으로 뿌렸어요. 그래야 농사를 짓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 제주에서 미역이 사라지고 있어요. 제주대학교에서 만난 해조류 전문가는 '미역 실종사건'의 주범을 기후변화에 따른 수온 상승이라고 지목했어요(관련기사 : 마라도 미역 실종 사건... "이번 겨울 딱 1개체 봤다" http://omn.kr/1y171).
"수온 상승? 글쎄요. 나는 오히려 백성들의 관심, 간절함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해요. 예전 어머니들은 미역을 캘 때 미역귀를 덜 잘랐어요. 포자가 잘 나와야 또 미역을 캘 수가 있으니까요. 바다나 땅이나 제 맘대로 하니 이런 사태가 벌어졌겠지요. 1970년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천연비료의 시대는 끝났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써왔어요. 제주도 땅이 버티지 못하는 거지요. 농산물은 맥아리가 없어졌어요. 바당의 미역과 듬북도 사라지기 시작했고, 갯녹음도 심해졌어요. 바다가 사라지면, 결국 인간이 멸종 위기에 들어설 겁니다."
▲ 갓물질 출어(1950년대) 서귀포 해녀들이 갓물질을 하려고 출어하고 있다. "갓물질"은 해녀들이 가까운 바다로 헤엄쳐나가 미역 따위를 따는 물질을 말한다. 앞에 "문섬"이 보인다. | |
ⓒ 홍정표 |
- 예전엔 톳과 같은 듬북을 농사 거름으로 썼다고 하셨는데, 해조류에 남아 있는 소금은 어떻게 처리했나요. 농사에 영향이 없는 건가요.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일본에도 듬북을 농사 거름으로 썼는데 민물로 좀 씻고 밭에 깔았어요. 그런데 제주에는 듬북을 그냥 밭에 깔아도 보리가 잘 자랐어요. 제주의 땅, 화산섬이라 그런 겁니다. 비가 한 번 내리면 듬북에 남아 있던 소금이 싹 씻겨 내려갔어요. 민물로 씻을 필요가 없어요. 듬북은 생명줄입니다. 듬북이 있어야 겨울 보리농사, 여름 조 농사가 가능했어요. 제주도는 듬북 때문에 마을끼리 싸움이 나서 마을이 갈라진 적도 있었어요."
- 제주도 해녀 생활사에서 감태가 큰 역할을 했다는데요. 감태가 먹고사는 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감태는 요오드 성분이 있어서 상처에 바르는 약품으로 일상적으로 사용했지만, 전쟁이 나면서 폭탄의 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어요. 일제시대 이야기입니다. 당시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국방성은 성산포 오조리 다리 옆에 감태 공장을 지었어요. 교역로가 차단되니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오드의 1/5을 제주도에서 구했던 겁니다. 제주 해녀들은 파종기와 수확기 사이인 음력 7~8월 농한기에 감태를 따서 팔았어요. 품질이 좋은 가파도와 마라도 감태를 배에 실어다 성산 공장에 팔기도 했습니다. 미역을 캐는 게 주 생업이었는데 감태가 돈이 됐어요. 그 돈으로 해녀의 아들들이 일본 관동지역의 와세다, 관서지역의 리츠메이칸 대학으로 유학을 갔어요. 아이들이 똑똑했지요. 감태 판 돈으로 깜깜이인 해녀 어멍을 대신해 글을 배우고 영수증 전표를 쓰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공부를 시켰어요. 그런데 해녀 아들들이 유학 간 일본 대학들은 당시 사회주의 이념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라 그곳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배워서 돌아온 거죠. 제주로 돌아온 그 아들들은 일본이 패망했으니 민중이 주인인 사회를 만들자며 주민들과 열심히 공부 모임도 열고 집회를 했고요.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다 1948년 '4.3 항쟁'이 터졌고… 어쩌면 제주도의 4.3은 풍족했던 감태 때문이었어요."
- 풍족한 감태와 비극적인 제주 4.3, 그런 연관성이 있었네요. 제주도는 소라와 성게도 풍족했었지요. 일본으로 수출도 많이 했다고 하던데요.
"한국에서 소라는 전라도 청산도와 남해안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섬에도 났지만, 제주도가 으뜸이었어요. 서울이나 서해안 사람들은 굴을 먹어봤지만, 소라는 먹어보지 못했어요. 그 진가를 몰랐지요. 일본 사람들은 소라를 무척 좋아했어요. 소라로 통조림을 만들고 전쟁 때는 군납을 하기도 했어요. 식민지 시대에 제주도에는 '구쟁기(소라) 공장'이 많이 생겼어요. 오늘 가서 물질해오면 그 자리에서 전표를 쓰고 현금으로 바꿨어요.
1960년대는 성게를 소금에 절여서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나무 포장이 된 '곽성게'를 수출했어요. 제주 전역을 돌아 걷어 온 '솜'(말똥성게)이나 보라성게를 동네 삼춘들이 차 스푼으로 하나씩 까서 곽 위에 예쁘게 담아 비행기로 보냈어요. 제주도 해녀는 미역, 감태, 소라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성게를 했습니다. 청정바다이니 가능한 일이었지요."
- 지금 제주바다는 어떤 상황인지요.
"지금은 청정바다도, 듬북도 찾을 수 없어요. 최근까지도 우도에 가면 삼사월에 모자반이 늙어서 떨어지고 뭉쳐서 바다에 떠다녔어요. '멀레 듬북'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낚시질도 멈추고 낫으로 듬북을 걷어왔어요. 횡재였지요. 갯가로 몰려온 '멀레 듬북'은 마을 공동 소유였어요. 20~30년 전만 해도 제주 서민 생활사의 생명줄이었어요. 이제는 슬픈 자화상만이 가득해요. 제주 해녀는 바다에서 할 물건이 없어 보령이나 태안으로 '출장 물질'을 갑니다. 소라에도 갯녹음이 껴서 상태가 안 좋아요. 다, 자업자득입니다. 제주섬이 넘쳐나고 있어요."
제주바다 인터뷰 | |
ⓒ 녹색연합 |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녹색연합 해양생태팀 전문위원이며 이 글은 녹색연합 홈페이지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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