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books] 가타야마 나쓰코 <최전선의 사람들>
2011년 3월 11일의 후쿠시마(福島) 사태로 일본 정부와 핵발전 세력은 큰 대가를 치렀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고, 일본 집권당이었던 민주당은 사고 이듬해, 정권을 잡은 지 불과 3년 만에 자민당에 다시 정권을 내줬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운영사인 도쿄전력은 사고 이듬해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 선정 '무책임한 기업'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가를 치른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일본 진보성향 일간지 <도쿄신문> 기자 가타야마 나쓰코(片山夏子)가 후쿠시마 사태 이후 8년간의 기록을 모아 지난 2020년 낸(일본 현지 기준, 한국어판 올해 4월 18일 푸른숲 펴냄) 책 <최전선의 사람들>은 핵발전소의 폐허에서 오염물을 치우고 망가진 시설물을 고치는 등의 노동을 한 평범한 일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참고로 이 책은 2020년에 이미 일본에서 출간됐기 때문에, 가타야마가 도쿄 기자실에서 이 사태를 처음 인식한 장면을 서술한 "가장 먼저 본 것은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의 수소폭발 장면이었다. 3월 12일 오후 3시 36분, 1호기에서 뭔가 하늘 높이 튀어오르더니 건물 뒤편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중략) 3월 14일 오전 11시 1분, 3호기 수소폭발. 이번에는 불꽃이 보였고 폭발 후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영상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밤에는 2호기 원자로 내부의 냉각수 수위가 급격하게 내려가 핵연료가 모두 노출돼 '빈 냄비가 끓는' 것 같은 상태가 됐다. 3월 15일, 4호기까지 폭발했다"라는 부분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폭발은 없었다'는 주장을 했던 한 한국 정치인에 대한 반박이 결코 아니다.편집자)
핵발전으로 만든 전기를 편하게 써온 전체 일본인을 대신해, 어쩌면 전체 인류를 대신해 핵발전의 대가를 치른 이들이 낸 값이야말로, 불행하게도 일본 정부, 집권당, 도쿄전력이 치른 대가보다 훨씬 비싸 보였다.
핵발전소의 폐허에서 노동자로 일한 이들은 20대 청년에서 70대 노인까지 다양했다. 대부분 남성이었고 "현지에서는 안정적이고 고수입이 보장되는 도쿄전력의 직원이 되는 것을 동경했"기 때문에 (이 지역 출신 한 작업자의 말)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백혈병으로 후송된 40대 노동자', '온열질환으로 쓰러진 20대 현장 작업자' 따위 무명의 존재가 아니었다. 가타야마 기자의 르포 속에서 이들은 생선요리를 깔끔히 발라먹는 바닷가 사람이었고, 갈색머리에 감색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인터뷰를 하러 온 차분한 눈의 남자였으며, 자식과 손자 이야기에 눈물짓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퇴근 후 캔맥주가 낙인 주종 불문의 술꾼이자 가라데가 특기인 힘 좋은 장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 이날을 경계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라고 저자와 인터뷰이들은 말한다.
도쿄전력은 3월에 직원과 작업자 약 3742명 가운데 99명이 피폭량 100밀리시버트를 초과했고, 6월에는 6명이 250밀리시버트를 초과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3,4호기를 운전하던 두 직원의 피폭량은 각각 678밀리시버트와 643밀리시버트였고 모두 내부 피폭량이 높았다. (책 37쪽)
한 20대 청년은 핵발전소의 터빈 건물에서 "방사선 농도를 알 수 없는 오염수를 손으로 퍼내고, 대형공작기를 분해"하는 일을 했다. "터빈 건물 1층 바닥 웅덩이에 들어가 플라스틱 쓰레받기로 오염수를 대형 양동이에 퍼담는 작업"이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발전시킨 과학기술의 정수라는 핵발전, 그 뒤치다꺼리를 한 이들에게 주어진 도구는 고작 '플라스틱 쓰레받기'였다.
이 터빈 건물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건물) 지하에 고인 물에 발을 담근 작업자들은 매우 높은 피폭에 병원으로 호송됐다."(책 166쪽)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뿌린 바닷물이 건물 1층과 지하로 흘러내렸고, 노동자들은 방사능 오염수가 된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일해야 했다.
이 영웅적인 노동자들에게 도쿄전력, 정확히는 그 하청업체가 해준 대우는 이랬다. "사람들은 고농도 오염수에 들어간 작업자의 발을 쓰레기봉투로 여러 겹 싸 차에 태워 데리고 나갔다. (중략) 이 물에 발을 담근 사람들은 무려 173~180밀리시버트의 피폭을 당했다."(책 168쪽)
저자인 가타야마 기자는 이들 핵발전소 노동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영웅들"이라며 "미증유의 사고를 지금 상태까지 그나마 안정적으로 끌고올 수 있었던 것은 방사선량조차 제대로 모른 채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한 사람들 덕이었다"고 지적한다.
후쿠시마 사태로부터 11년이 흘렀지만, 이 '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가타야마는 "사고 직후에 비해 방사선량은 현격히 낮아졌지만 녹은 핵연료를 꺼내는 등 위험한 고선량 작업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폐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며 "2021년 도쿄올림픽-패럴림픽 기간 중에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원전에서 사고가 나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위험작업이 금지됐다"고 고발한다.
가타야마는 "배상도 점차 중단되고, 피난지시 구역도 차례차례 해제되는 등 마치 원전 사고가 일단락된 것처럼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태가 흐지부지됨에 따라 "1일 1만 엔"이라던 비교적 고임금은 없던 말이 되고, 육체노동자 평균 노임 또는 심지어 그보다 낮은 임금이 책정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현장에 일본계 브라질인이나 동남아계 작업자가 동원된다"(398쪽)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물론, "사고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후쿠시마의 핵 재앙 역시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기존 사회가 갈라놓은 불평등의 골을 따라 방사능 오염수가 고이듯 불행이 고였다.
일본이라는 사회의 특성상, 정부 지침에 따라 노동자들에 대한 피폭량 관리를 하려 해도 하청, 재하청, 심지어 "7차, 8차 하청까지 줄줄이 있었"던 (책 54쪽) 고용 서열 말단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피폭량을 숨기면서까지 현장에 더 투입되려 했다. 생계를 위해서였다.
후쿠시마 사태와 그 수습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는 과연 일본만의 일일까? 일본 정치문화가 후진적이라는 비판은 어느새 통설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가스미가세키로 상징되는 일본의 관료·행정체계가 한국 또는 다른 국가보다 후진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전력이 모자라서, 전기요금이 올라가서, 경제성장에 장애가 돼서라는 이유로 그저 '탈핵 노선 폐기'를 외치기 전에 생각해볼 것은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던 일본인들이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에 발을 담그고, 그 물을 플라스틱 쓰레받기로 퍼서 치우는 일을 해야만 했던 현실임을 이 책은 주지시킨다.
사실 이런 고민은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한 것도 아니었다. 다음 소설의 일부분을 보자.
이는 일본 대중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천공의 벌> 중 일부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1995년작이다. (한국에서는 2016년 출간) 후쿠시마 이전에도 일본 사회에서나 국제적으로나 핵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를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산업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인류는 석탄을 때다가 1만 명 넘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고(런던 스모그), 광물을 캐거나 화학공장을 돌리다가 납·수은 등 중금속 중독(미나마타병·이타이이타이병 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마트폰 제조 과정에서 쓰이는 화학약품과 중금속이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에게 각종 수상한 질병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나온 바 있다. 핵발전으로 인한 위험도 이런 '문명의 비용'과 과연 질적으로 크게 다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인류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해질 수 있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걸 실제로 생산할 만큼 멍청할 수 있는가?"라는 한 평화운동가의 질문은, 반감기가 무려 수만 년에 달하는 방사능 물질을 아궁이에 땔감 때듯 다루는 일이 온당한지 되돌아보게 한다.
사실 기자도 하마터면 '대가'를 치를 뻔했다. 동일본대지진 닷새 후였던 2011년 3월 16일, <프레시안> 특별취재팀은 센다이현 게센누마, 시오가마, 이시노마키, 미나미산리쿠쵸 일대 해안을 훑으며 쓰나미 피해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이 해안가에서 서남쪽 100킬로미터 바다 건너편에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가 있었다.("쓰나미의 폐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구 자전축이 바뀌었다잖아요…너무 무서워요")
이날 시오가마에서는 한국 구조대원들이 수색 작업을 펼쳤는데, 때마침 내린 비에서 미량이나마 방사능이 검출되면서 이들은 방호복을 입은 상태로 번갈아 작업에 투입됐고 작업 인원의 거의 1/3은 구조 작업을 포기하고 방사능 측정만 해야 했다. 이 사실은 당일 저녁에 일부 언론에서 기사화됐고, 때문에 취재팀 기자들은 귀국길 방사능 검사장 앞에서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검사 결과 수치는 정상이었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당시의 불안은 후쿠시마로부터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그것도 고작 하루 몇 시간 동안의 외부 활동의 결과였다.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고통과는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다. 매일매일 출퇴근길마다 큰 번민을 겪으며, 생계를 위해 '피폭량 컨트롤'을 해야만 하는 핵발전소 현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과연 한국인들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기만 할까?
5월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통령직인수위에서는 "문재인정부의 비정상적 탈원전(탈핵) 정책을 정상화"하겠다며 "새 정부에서는 탈원전(탈핵)이라는 금기를 해체"하겠다는 말이 들린다. "탈원전(탈핵)이 폐기되고 원자력(핵) 발전이 늘어나게 된다"는 선언도 나왔다. 아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부터가 작년 7월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류 역사상 원전 사고라고 하는 게, 이제 체르노빌이 원전 사고이고, 후쿠시마는 이제 그건 지진과 해일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방사능이 외부에 유출돼서 사람이 죽고 다친 건 아니란 말이에요? 미국의 스리마일은 사고는 났지만 격납고가 확실히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압수형과 경수형이 나뉘는데 가압수형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서 격납고가 터질 일이 없다는 말이에요. 3세대 원전은 그런 수소 폭발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체르노빌 가지고 안전문제를 거론하기에는…(적절치 않다)."
한국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2011년 당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보다 더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이들이기를, 한국 핵발전소들이 후쿠시마 핵발전소보다 더 안전하게 지어졌고 운영되고 있기를, 그리고 한국에는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지 않기를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걸까.
덧붙여.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비겁한 대응은 이미 언론을 통해 그야말로 수도 없이 알려진 터라 굳이 비판을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2011년 사고 및 수습 당시 <프레시안> 국제팀 기자로 해당 사안을 보도했던 입장에서 아래 부분에 대해서는 뒤늦게나마 일본 정부에 유감을 표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사과드린다. 변명 같지만, 기자도 속았다.
"(일본) 정부는 '냉온정지 상태'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2011년 12월 '냉온정지 상태가 달성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녹아내린 핵연료가 냉각되고 있긴 해도 원자로의 밀폐성은 깨졌고 원자로에서는 매일 고농도 오염수가 대량 발생하고 있었다. 밀폐된 원자로에서 냉각수가 끓어오르지 않는 안전한 '냉온정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책 110쪽)
즉 가타야마 기자에 따르면, 2011년 당시 일본 정부가 선언한 '냉온정지 상태'는 사전적 의미의 '냉온정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프레시안>은 일본 총리의 발표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판단해 이를 비판적으로 보도(☞관련 기사 : 황당한 일본 총리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됐다"?)했지만, 설마 이런 치사한 '꼼수'를 쓰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핵발전과 관련된 분야에서 이런 식의 '언어 오염' 전술은 드문 일이 아니다. "3월 12일 나카무라 고이치로 원자력안전보안원 공보담당 심의관이 '노심용융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날 저녁을 마지막으로 나카무라 심의관은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았다. (중략) 그후 기자회견에서 노심용융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노심 손상'이란 말이 등장했다", "오염수 누수는 말 그대로 '사고'인데 도쿄전력은 원자력 용어인 사상(事象)으로 바꿔 말했다", "원자로 건물 지하에 고이는 고농도 오염수도 '체류수'라고 평범한 물처럼 표현했다"(책 110쪽) 등의 대목은 그 흔한 사례들 중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