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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9일 금요일

욕먹고, 왕따당하던 미국 생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시아계 증오범죄 사건을 접하고 떠올린 인종차별의 경험... 이 혐오의 광풍을 멈추려면

21.04.09 19:55l최종 업데이트 21.04.09 19:5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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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걱정스럽게도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 사건들이 미국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16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백인 남성에 의한 마사지샵 연쇄 총격사건이 있었고, 30일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인 편의점이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최근 뉴욕의 지하철에서는 한 아시아계 남성이 이유 없이 주먹질을 당했는데 주변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휘파람을 불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으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미국에서 난 '차별받는 사람'이었다 
 
    아시아계 증오범죄에 항의하는 시위
▲   아시아계 증오범죄에 항의하는 시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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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이 중국에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아시아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증오범죄들이다. 걱정스러운 소식들을 접하다 보니 한동안 미국에서 살았던 때가 떠오른다. 문 밖을 나설 때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영어가 어설프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적대감을 맞닥뜨릴까봐 조마조마 살얼음판 걷듯 염려하며 긴장과 불안감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던 그날들 말이다.

2004년 LA에 머물던 어느 날, 장을 보려고 주차장에서 카트를 끌고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기부를 권유하는 한 백인 남성이 천천히 다가왔다. 미안하다고, 기부할 의향이 없음을 예의 바르게 밝히고 지나치는데, 뒤통수에 아시아 여자 운운하는 욕지거리가 날아들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돌아서서 뭐라고, 당신 지금 욕한 거냐고,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요구했다.
 

그는 즉각적 반발을 예상 못 했는지 약간 주춤하면서 아니라고, 욕한 적 없다고, 네 갈 길이나 가라고 꼬리를 내려 버렸다. 나도 더는 다그치지 않아 다행히 가볍게 끝이 났지만, 개인의 총기 소지가 가능한 나라에서 언제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이런 은근한 멸시를 받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위축되고 불안해지기에 충분했다.  잘 드러나지 않는 따돌림을 당한 일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 프리스쿨 부모 모임이나 생일잔치에서 내가 무리에 다가가면 하나, 둘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든지, 나는 알지 못하는 화제를 자기들끼리만 활발하게 계속 나눈다든지 그럴 때다. 분명 함께 있는데, 그림자 취급당하는 그 순간의 씁쓸하면서도 수치스러웠던 기분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인종이나 언어 때문에 배제되고 차별당했다고 느끼는 경험은 외국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 없는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른다는 일상적 불안함.

하루를 마칠 때마다 '아, 오늘 하루도 온 가족이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보냈구나, 다행이다'라는 마음을 셀 수 없이 가졌더랬다. 제 나라에서 제 잘난 줄만 알고 살던 사람이 외국살이를 통해 어설프게나마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던 귀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차별을 하고, 또 차별을 받는다 

그런데, 굳이 외국살이가 아니더라도 같은 인종, 같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은 수시로 일어난다. 종교, 성별, 장애, 학력, 지역, 성적 지향 등등의 이유로 말이다. 중요한 사실은 차별을 하고, 받는 상황이 늘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따르면, 여러 분류의 기준과 범주에 따라 내가 차별을 당하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아는 사람들과, 공공장소에서 축제를 벌이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조롱 섞인 농담에 따라 웃었던 일이 있었다. 웃으면서 뭔가 께름칙했는데,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어떤 대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유머 뒤에 숨은 비하나 조롱은 사회규범을 느슨하게 만들어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되는 분위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약자의 서러움을 알 것 같다던 자가 어느새 다른 약자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데 동조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언젠가는 제주도의 한 관광지에서 한 70대의 어르신이, 휠체어를 타고 조용히 전시물을 관람 중인 다른 노인의 뒤통수에 대고 뜬금없는 타박의 말을 던지는 걸 들었다. "몸이 불편하면 집에나 있을 일이지, 뭐하러 나와 돌아다녀 사람들 눈에 띄는지 모르겠네." 그 말은 분명 혼잣말을 가장한 공개적인 장애인 인신공격이었다.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
▲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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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뱉을 수 있는지. 그 70대 어르신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다른 약자들을 쉽사리 모욕하거나 인신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통 사회에서 유리한 지위에 있거나, 억압을 느낄 기회가 적을수록,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 한다"며 상대에게 비난을 돌린다고 한다. 약자를 무턱대고 비난하기 전, 시야가 좁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건 아닌지 먼저 살펴볼 일이다.

대개 차별은 약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시작될 때가 많다. 편견을 앞세워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이 차별이 되고, 혐오가 되고, 증오범죄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차별과 혐오와 증오가 세상에 판칠수록 마음 편하게 거리를 활보할 자유는 점점 줄어들기 마련일 것이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미국의 아시아계 증오범죄가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이다.

나와 내 가족이 좀 더 따뜻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매사 편견을 갖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열린 마음으로 알아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잘 모르는 것, 궁금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자세히 알아갈수록 편견을 피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가끔은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이해를 넘어 공감으로 나아갈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그 생각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혜진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를 보면, 동성애자인 딸을 어떻게 해서든 고쳐놓으려는 엄마가 나온다. 대학 강사인 딸은, 동성애 관련 수업 내용 때문에 사전고지 없이 해고당한 동료를 위해 교문 앞에서 매일같이 해임 철회 촉구 시위를 벌인다. 엄마는 남의 일에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딸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딸과 딸의 동거인이 원하는 삶에 대해서도 그저 소꿉놀이 같은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딸이 정신만 차리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엄마는 필사적으로 딸을 설득하지만, 딸은 결국 반대 시위대들에게 폭력을 당해 응급실에 실려 간다. 엄마는 그제야 딸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며 살아내기 위해 적대자들의 공개적인 폭력 속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살고 있는지 자각하게 된다.
 
"정말이지 딸애가 원하는 게 정말 그런 것인지 묻고 싶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관계,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헛된 사이, 영원히 불완전한 채로 남는 삶,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뒤를 따라다닐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 감수해야 하는 수치심과 자괴감의 무게.
넌 정말 그런 걸 원하니?
나는 알고 싶다... (중략) 그러나 뭔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나는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묻고 또 묻고 지칠 때까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딸애는 내 자식이니까. 끝내는 내가 알고 싶고, 내가 알아야만 한다. 적어도 나는 도망가는 부모이고 싶지 않다." (p.155~156)
 
가능한 한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동성애자인 딸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첫발을 떼는 엄마의 두려움과 다짐이 마음을 크게 울린다.

뭔가를 새롭게 안다는 것은 당연하게 옳다고 믿어왔던 자신의 가치관, 신념, 주관을 깨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지적하듯이, 사회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우리들에게 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옳다고 여기는 것들도 언젠가는 어처구니없다고 판정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의 생각만을 고집할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내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함으로써 이 사회의 누군가가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일상의 안전과 행복을 위협받는다면, 여전히 내 생각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언젠가 그 차별과 혐오가 퍼져 나에게까지 향한다면? 사회적 약자의 안전과 행복을 위하는 일이 곧 나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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