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장 “수제화 브랜드 본사에 공장이 없어요. 이름만 갖고 있어요”
‘노동자 열전’ 인터뷰를 위해 그와 마주했다. 그의 시선은 나의 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발을 먼저 주목한 뒤에 내 얼굴로 향하는 그의 시선.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발부터 봐요. 발에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먼저 보고 얼굴을 보는 게 버릇이에요.” 그는 이렇게 항상 발부터 쳐다보는 버릇을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했다. 그는 35년 동안 신발을 만들어온 제화노동자 박완규다. 35년은 박완규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얼굴보다 발로 향하게 할 정도로 반복된 시간이었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곧바로 뛰어든 제화의 세계에서 힘들게 싸우며 버텨낸 시간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10대 시절 배운 제화 노동
“너무 힘들었나 봐요. 아침마다 세수하면
코피가 나서 세숫대야 물이 빨갛게 물들었어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수업료를 제때 내본 적이 없어요. 당시만 해도 학생 인권이 존중되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업료를 안 내면 서무과에서 수업 중에 불러냈어요. 반 친구들도 서무과에서 나를 왜 부르는지 다들 알았거든요. 그게 너무 창피했고, 쪽팔렸어요. 그래서 학교 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전북 완주군 출신 박완규는 중학교를 졸업한 지난 1985년 그렇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뒤 고향을 떠났다. 처음 구한 일자리는 식당 배달일이었다. 성남에 있는 먼 사돈댁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1년쯤 일하다 고향에 부친 편지에 쓰여있던 주소를 보고, 이모부가 그를 찾아왔다. 제화노동자였던 이모부는 그에게 제화 기술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했고, 박완규는 1986년 그렇게 제화노동자로 명동에서 일을 시작했다.
1980년대 명동은 수제화 산업을 선도하던 곳이었다. 유명 수제화매장이 밀집해 있었고, 높은 임대료와 재개발로 성수동 등으로 수제화 공장이 옮겨가기 전까진 많은 업체가 명동에 모여 신발을 만들었다. 신발 제작은 신발 제작을 위한 패턴을 만들고, 이에 맞춰 가죽 등을 재단하고, 가죽 등으로 신발의 윗부분을 만드는 갑피 작업을 하고, 신발의 밑부분을 제작해 붙이는 저부 작업으로 이뤄져 있다. 제화노동자는 크게 패턴, 갑피, 저부로 나뉘는데, 이 모든 제화 작업을 다 할 수 있는 제화노동자는 사실 얼마 되지 않고, 각자 전문 분야가 따로 있다. 박완규가 맡은 일은 신발의 밑부분을 만들어 붙이는 저부 작업이다. 박완규는 명동의 수제화 공장에서 하루 16시간을 꼬박 저부 일만 했다. 열일곱 살을 갓 넘은 그가 견디기엔 너무나도 고된 노동이었다.
“너무 힘들었나 봐요. 아침마다 세수하면 코피가 나서 세숫대야 물이 빨갛게 물들었어요. 당시에 서울 수유리에서 명동으로 출퇴근을 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수유리에서 첫 전철을 타고, 명동역에 내려 공장에 오면 오전 6시 정도였어요. 그 시간엔 공장 문이 안 열려 있어요. 그래서 담을 넘어 일하는 사람들만 아는 창문 쪽 쪽문으로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어요. 퇴근은 당시 명동에서 수유리 가는 20-2번 버스 막차가 11시 40분에 있었는데, 그걸 타고 들어갔어요. 첫차로 나가서 막차로 들어오다 보니 힘들어서 수유리 정류장에 제때 못 내리고, 종점까지 가는 바람에 한 시간 걸어서 다시 집에 오기도 했어요. 그런 장시간 노동을 이겨내기에 열일곱 살은 너무 어리다는 걸 오랜 시간 지난 후에야 알았어요.”
“제화 기술을 배우면서
나중에 결혼해도 집안을 이끌어 가는데
이 기술만 있으면 문제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일해 그가 받은 월급은 17만 원이었다. 당시 700원 하던 짜장면 다섯 그릇 가격도 안 되는 한 달 용돈 3천 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부모님과 세 동생이 있는 고향으로 부쳤다. 아침마다 흐르던 코피는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멈췄다. 첫차와 막차를 타고 오가는 장시간 노동은 여전했지만, 그런 혹사가 몸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생각에 혹사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그때는 못살던 시절이어서 기술을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화 기술을 배우면서 나중에 결혼해도 집안을 이끌어 가는데 이 기술만 있으면 문제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제화 기술자로 대접받기까지 8년이나 걸렸다. 제화 기술은 오랜 견습 기간을 통해 현장에서 기술을 배우는 도제식 교육으로 전수된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최고 기술자 밑에 상견습, 중견습, 하견습이 함께 일한다.
“처음엔 단순 작업부터 시작해요. 잔심부름하면서 조금씩 기술을 배워요.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작업이 반복돼요. 가장 중요한 마무리 공정은 안 가르쳐 주는 거죠. 작업 공임을 서로 나눠서 가져야 하는데, 기술에 차이가 있어야 선생님과 견습이 가져가는 금액이 차이가 날 거 아니에요. 그렇게 견습을 6년 정도 하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맨땅에 해딩하는 심정으로 연장을 챙겨서 독립했어요. 그렇게 2년 정도를 부딪치고 나서 제대로 된 선생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어요.”
1980년대 중반 공무원 월급이 30만 원 정도 되던
당시에 한 달 수입이 120만~130만 원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제화노동자들의 호시절
선생님이 된 뒤 장시간 노동은 여전했지만, 열심히 일한 만큼 수입도 짭짤했기 때문에 보람도 컸다. 1980년대 중반 공무원 월급이 30만 원 정도 되던 당시에 한 달 수입이 120만~130만 원에 이르렀다. 이런 호황은 199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때문에, 그는 노동조합에 큰 관심이 없었다.
“1987년 한창 민주화 투쟁이 격렬할 때 만리동 고개 밑에서 견습으로 일했다. 그 시절만 해도 최루탄 때문에 투쟁하는 학생 때 힘들다고만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여서 함께 싸우진 않고, 괜히 우리만 일도 못 하게 됐다고 욕만 했던 기억이 나요.”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지나며 제화노동자들도 서울 등 각 지역에서 제화공노조를 만들었다. 제화노동자로 일하던 이갑동, 이해곤(지금은 고인이 된 이해삼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의 가명. 당시 이해삼은 성수동 수제화 공장에 위장취업해 활동하고 있었다.) 등이 주축이 돼 노조를 결성했고, 스무 살이 된 박완규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조에 가입하게 된 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영향이 컸어요. 당시 거의 모든 업종에서 쌓여있던 감정, 축적됐던 분노들이 터져 나왔고, 우리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우리나라 신발브랜드라고 하면 크게 금강, 앨칸토 에스콰이어 3사였어요. 그리고 당시에 미스미스터, 해피워크, 레스모아, 브랑누아 등 저 단가 브랜드들이 막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하청업체들이 활성화됐고, 노조는 현장이 많아지니깐 조직하기 쉬웠어요. 당시 활동했던 분들한테 들으면 조합원이 1천 명을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에 저는 제가 속했던 사업장에서 조직차장 정도 맡고 있었던 거여서 전체적인 상황은 솔직히 잘 몰랐어요.”
1997년 외환 위기와
값싼 중국산 신발이 대거 수입되면서
찾아온 위기··· 특수고용직이 된 제화노동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노동환경도 조금씩 나아지고, 제화업계의 호황이 이어지면서 제화노동자들은 호시절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와 값싼 중국산 신발이 대거 수입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직접 공장을 세우고 제화노동자들을 직고용했던 유명 브랜드들은 신발 생산을 하청업체에 넘겼다. 하청업체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화노동자들을 개인사업자, 또는 프리랜서 노동자로 만들었다. 4대보험은 물론 퇴직금도 사라졌고, 제화노동자들끼리 일감 경쟁을 하며 낮은 공임을 받는 특수고용직, 불안정한 노동자로 전락했다.
“수입의 3.3%를 세금으로 내는 일종의 프리랜서 제화노동자가 전체의 70~80% 정도예요. 나머지 20~30%는 개인사업자 등록을 한 사업자들이구요. 우리가 과거부터 이렇게 일했던 건 아니에요. 외환위기 이전엔 이런 일이 없었어요. 매년 현장의 재화노동자들과 단위 사업장 사장들의 협상을 통해 공임이 100원이든 200원이든 올랐고, 4대보험, 퇴직금도 보장됐어요. 심지어 노동자를 서로 모셔가려고, 선금도 있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200~300만 원을 미리 준거에요. 그런데 수입 신발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제화노조는 약화되고, 시장상황은 악화되면서
제화노동자들의 임금은 10년 넘게 제자리 걸음
상황이 나빠지게 된 데엔 수입 신발 때문에 시장 상황이 나빠진 것도 있지만, 제화노동조합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도 컸다고 박완규는 말한다. 막상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지만, 조합원들은 돈이 잘 벌리는 상황이다 보니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화노동자들의 신분이 직고용에서 특수고용직으로 바뀐 것은 노동조합에 결정적인 타격이 됐다. 정기만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전 지부장은 “제화노동자들이 특수고용 노동자가 되면서 노조에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노조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빠져나갔다. 세월이 가면서 임금은 10년 이상 동결이 되고, 개선 기미도 없다 보니 아무도 노동조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구나 고정 임금을 받는 게 아니라, 일한 신발 개수만큼 임금을 받는 상황은 제화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경쟁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힘은 모이지 못했다.
“제화노동자끼리 경쟁하다 보니 관리자들이 노동자 사이를 갈라치기 좋은 구조였어요. 서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노조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낮았지요. 이런 현실은 후배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됐고, 외환 위기를 지나면서 노조가 사라지면서 제화노동자들에게 닥친 위기를 막아낼 힘이 없었어요.”
2018년 탠디 본사 점거와
성수동 제화거리에서의 투쟁으로
얻어낸 10여 년 만의 임금 인상
제화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박완규는 “한해 한해 조건이 나빠졌고, 성수동에선 공임이 지난 2018년 인상 전까지 18년 동안 제자리 걸음이었다”고 말했다. 물가는 올랐지만, 공임은 그대로고, 일거리는 줄어들면서 제화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팍팍해졌다. 제화노동자들이 만든 신발은 백화점에서 수십만 원이 넘는 금액에 팔려도 이익 대부분은 백화점과 본사에 넘어가고, 제화노동자들에게 떨어지는 공임은 6천5백 원에서 7천 원에 불과했다. 2018년 당시 기준 시간당 최저임금 7,530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결국 2018년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가 제화회사인 탠디 본사를 상대로 제화 공임 인상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등 행동에 나섰다.
2018년 4월 4일부터 탠디의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고 일해온 제화노동자들이 6500원~7000원 수준인 공임을 2천 원 인상할 것과 퇴직금 지급, 직접고용 등을 요구하며 작업을 거부했다. 탠디는 약 7천억 원대에 이르는 수제화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업으로 상징성도 컸다. 26일엔 제화노동자 100여 명이 서울 관악 탠디 본사 3층을 점거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사실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오랫동안 스무 명 남짓한 조합원으로 조직만 유지해온 상태였다. 그러다 2014년 탠디 소속 하청 제화 노동자들의 퇴직금 소송에서 이기면서 조합원이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 정기만 전 지부장은 “변호사를 비롯해 모두가 진다고 했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노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8년 탠디투쟁이 시작되면서 조합원은 순식간에 수백명으로 불어났다. 탠디 하청공장에서 일하던 박완규도 이때 다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고, 선배 제화노동자들과 함께 농성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농성은 16일 동안 이어졌다.
“점거 투쟁은 저도 처음이지만, 연세 많은 선배들은 압박이 더욱 컸을 거예요. 바깥에서 20일 넘게 싸우다 방법이 도저히 방법이 없고, 점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보니 정기만 지부장님을 믿고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회사 건물이다 보니 바닥이 타일로 돼 있어서 한기가 심했어요. 대비하지 못한 채 들어가서 2~3일은 엄청 춥고, 고생이 심했어요. 그래도 내가 힘들어하면 연세 많은 분들은 어떨까 싶어서 티도 못 냈어요. 당뇨 등 아픈 분들이 많았고, 농성하다 세분 정도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는데, 선배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심히 싸워주셨어요. 한 선배는 자기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선거 때 보수정당 후보만 찍었는데. 이런 일을 겪게 되니깐 자기가 지금까지 한 투표가 잘못됐구나, 내 삶을 들여다 봐주는 이들에게 투표하는 게 맞는구나 깨달았다고 하셨어요. 그런 말을 들으니 이런 게 현장 투쟁이구나. 이렇게 현장 투쟁이 사람을 바꾼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어요.”
제화노동자 가족들의 절절했던 호소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제일 늦게 잠드신다. 주말이 되어서야
잠을 몰아 자는 눈에 띄게
살이 빠진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당시 한 달 넘게 이어진 투쟁 끝에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는 탠디본사와 제화노동자들의 공임을 갑피, 저부 각각 1천3백 원씩 인상하고, 소사장제 폐지 등을 논의하는 노사협의회를 상하반기 1회씩 열기로 합의했다. 곧이어 수제화 공장이 밀집해 있는 성수 제화거리에서도 그해 5월 임금 인상 투쟁이 벌어졌다. 성수 제화거리는 탠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탠디는 그나마 8년 전인 2010년 공임이 인상됐지만, 성수 제화거리는 18년 동안 공임이 5천5백 원에 머물러 있었다.
“탠디는 본사 한 곳을 대상으로 싸우면 됐지만, 성수동은 업체가 좀 많았어요, 성수동에 있는 업체 가운데 90%가 하청이에요. 미소페, 세라, 소다 등 브랜드 신발부터 시장 신발까지 별의별 업체들이 여기 다 있어요. 그런데 하청업체는 많아도 결국 싸울 대상은 본사뿐이기 때문에 각 본사에 공문을 보내고 찾아갔어요. 그렇게 본사를 찾아가서 임금 협약을 했어요. 그리고, 공임을 1천5백 원 올렸어요.”
2018년 탠디와 성수동에서 이어졌던 임금 인상 투쟁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로 나섰던 제화노동자들의 결심이 큰 역할을 했지만, 이들과 함께 연대한 진보정당을 비롯한 여러 노동단체와 시민단체들의 연대도 큰 힘이 됐다. 관악과 성수동 지역의 노동, 시민, 진보정당 활동가들은 열성적으로 제화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했다. 점거농성이 진행되던 도중 노동자들은 매일 창밖에 매달려 누가 오는 지, 얼마나 오는 지 지켜보며 힘을 얻었다고 한다.
부인과 자녀들, 자녀들의 애인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도 힘이 됐다. 탠디 점거 투쟁 당시 농성 중인 제화노동자의 자녀는 ‘민중의소리’에 보내온 ‘우리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탠디 노동자입니다’라는 글을 통해 “아버지는 새벽 5시 반에 나가서 밤 11시 반에 들어오셨다. 점심, 저녁밥도 못 드시고 일하셨다. 밤 11시 반에 집에 돌아와 겨우 끼니를 때우신다. 5시간도 못 주무시고 다시 출근을 하신다.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제일 늦게 잠드신다. 주말이 되어서야 잠을 몰아 자는 눈에 띄게 살이 빠진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런 힘겨운 노동에도 노동자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비판하며 “올해로 머리 좋은 나쁜 제화 기업들이 소사장제도를 이용한 지 18년째다. 소사장제를 폐지해야 한다. 아버지는 탠디에 직접 고용되는 노동자이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런 호소는 여론을 움직였고, 언론이 제화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루면서 승리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투쟁으로 다시 살아난 제화지부
다시 노조에 가입한 박완규,
부지부장을 거쳐 지부장에 나서다
아울러 탠디와 성수동에서의 승리는 제화노동자 박완규의 삶을 바꾼 계기이기도 했다. 제화노동자들 가운데 막내로 투쟁에 참여했던 박완규는 제화지부 부지부장으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정기만 전 지부장은 “열성도 많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친구”라며 믿음을 나타냈다.
“탠디 투쟁이 끝나고 일을 못 했어요. 다섯 개 탠디 하청 현장에서 저를 쓰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던 상황에서 정기만 지부장께서 부지부장으로 활동해달라고 요청해서 조직을 믿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2년 8개월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지부장으로 출마해 올해부터 제화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4대보험 도입 등 산적한 제화노동자 문제는
결국. 본사가 개입해야 가능한데,
본사가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진 않을 거다.
노동부를 비롯해 서울시, 정부 등
공공기관이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제화노동자들이 뭉쳐 공임을 올렸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1천여 개에 이르는 제화업체 중에 4대보험과 퇴직금이 있는 곳은 3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제화공장 가운데 대부분은 하청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결정해 4대보험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최근엔 신발 본사들이 자체 공장 없이 100% 외주 하청으로만 회사를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제화지부장을 맡은 박완규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그는 “브랜드 본사가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 하청업체에 4대보험을 도입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결국 본사가 개입해야 가능한데, 본사가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진 않을 거다. 노동부를 비롯해 서울시, 정부 등 공공기관이 나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있다. 박완규는 “사양산업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정부는 1도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 100% 다 수입 신발만 신고 다니게 할 것도 아닌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런 무관심 속에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심지어 하청도 국내가 아닌 중국 등 싼 인건비의 해외공장으로 넘기는 경우도 많다. 최근엔 본사에 제작 공장없이 100% 하청 제작하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유명 브랜드를 달고 팔리는 신발도 그 회사가 직접 만든 신발이 아니고, 백화점에서 비싸게 팔리는 국내 유명 브랜드 신발이 실제론 중국에서 만들어진 신발인 경우도 흔하게 된 것이다.
“브랜드 본사 대부분이 비슷해요. 브랜드 본사에 공장이 없어요. 이름만 갖고 있어요. 백화점에 있는 브랜드 가운데 탠디만 본사 공장을 운영해요. 탠디도 원래는 본사 공장에 4개 현장이 있었는데 다 하청으로 돌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2018년에 다섯 개 하청 현장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파업하면서 어쩔 수 없이 본사 라인을 유지한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땐 브랜드를 가지고 장사를 하려면 최소한 브랜드 현장 공장을 운영하고, 공장 확장이 어려운 경우 하청라인을 가동해야 정상이라고 봐요. 그런데 이름만 가지고 장사 하는 건 이해가 안 돼요. 현장을 직접 운영해야 신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안 해요. 그냥 하청에 언제까지 이렇게 만들어오라고, 주문서만 내려요.”
해외 신발은 날이 갈수록 시장을 잠식하고, 내수 규모는 축소 또는 정체되는 등 위기는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선 신발이 사양산업이라고 인식해서 그런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제화노동자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서 제화노동자들의 삶도 더욱 힘들어졌지만, 지난 2019년 조선일보 등 보수매체를 통해 ‘성수동 수제화 거리, 민노총 개입 1년 만에 170여 곳 문 닫았다’(조선일보 2019년 4월 17일)는 식의 보도가 쏟아졌다. 2018년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가 투쟁해 18년 동안 동결돼 있던 제화 공임을 1천3백 원 인상해 많은 제화공장이 문을 닫게 됐다는 것이다. 박완규는 “공장 임대료 부담, 신발 시장 상황 등 여러 원인이 있는데, 민주노총이 개입해 공임을 올려서 일거리가 줄어든 것이라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최근엔 코로나19를 핑계로 기껏 올린 공임을 500~600원 정도 깎은 하청공장도 있다고 한다.
“청소, 경비 업무 하시는 노동자들에겐 죄송하지만,
사회적으로 힘들고 열악하다고 알려져 있고,
그분들도 열악하다고 싸우고 있는 현장이 많은데,
우린 그런 환경조차 처우가 좋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이 힘들다고 생각하니 서러웠어요.”
그에게 “제화노동자를 선택한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 기술만 있으면 문제없겠다”는 생각에 아침마다 쏟아지는 코피를 참아내고, 첫차로 출근해 막차로 퇴근하는 힘든 시간들을 견디며 제화노동자로 30년 넘게 살아왔고, 지금은 제화노동자들을 대표해 지부장까지 맡은 박완규의 입에서 나온 “후회한다”는 말엔 수많은 회한과 아픔이 묻어났다.
“진짜 후회하죠.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건 아니었고, 필요해서 선택한 거 였어요. 일하는 환경이 힘들긴 해도 열심히 하면 그만큼 대접은 받으니깐 괜찮았던 거다. 이런 환경이 영원할 줄 알았던 건데 상황이 달라졌어요. 많은 부분이 기계화되면서 수량이 늘어나고, 기술적 값어치는 떨어졌어요. 그 일이 무엇이든 고정급여를 받는 직군을 선택해야 하는 게 나았다는 아쉬움이 남아요. 미소페 6공장이 폐업하면서 일을 못 하게 된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예순이 다 된 분들인데 청소, 경비 등 일을 하고 계셨어요. 안쓰러운 마음에 힘들지 않냐고 여쭤봤는데, 제화에서 일하는 거보다 좋다고 하세요. 고정으로 임금을 받아서 좋다구요. 청소, 경비 업무 하시는 노동자들에겐 죄송하지만, 사회적으로 힘들고 열악하다고 알려져 있고, 그분들도 열악하다고 싸우고 있는 현장이 많은데, 우린 그런 환경조차 처우가 좋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이 힘들다고 생각하니 서러웠어요.”
현실이 이렇다 보니 노동자로서의 보람이나,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어느새 꿈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젠 제화 기술을 배우려 하는 젊은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 보니 일하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다른 업종으로 말하면 퇴직이 가까워진다고 느낄 나이인 쉰세 살의 박완규는 제화지부에서 여전히 막내다. 박완규는 “35년 제화노동자 생활 동안 저보다 어린 사람을 단 세 명 밖에 못 만나 봤다”고 했다.
제화지부 지부장을 맡은 박완규는 이런 현실을 자신이 나서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장의 제화노동자들은 대한민국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비합리적인 삶을 살고 있어요. 최소한 제가 나서서 지부장으로 일하는 2년 임기 동안 어느 정도까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우리나라에선 기술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저평가해서
너무 속상해요. 반도체, 전기차 뭐 이런 것만
소중한 기술이 아니잖아요.
신발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필수품인데,
이렇게 제화노동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나중에 누가 남겠어요.”
지난 3월 16일 2021 서울도심제조노동자 매니페스토 대행진 공동준비위원회 소속 노조원들이 서울시청 앞에 모여 도심제조노동자에게 4대 보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화섬식품노조의 서울봉제인지회, 금속노조의 주얼리분회와 인쇄업종분과(준), 그리고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가 나선 이날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들은 4대 보험 전면실시와 코로나19 긴급 대책 마련, 그리고 도심 제조산업 노정교섭 실시와 업종협의체의 구성을 요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완규는 “제화노동자들은 요즘 출근하면 일감이 없어 오전 안에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한다. 주변 동료들에게 들어봤더니 지난달과 이번 달엔 한 달 동안 110~120만원 밖에 못 벌었다고 한다”며 제화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렸다. 그는 이어 “서울시가 사측으로 구성된 협회들을 통해 제화업종에 1년에 억 단위의 금액을 지원하고 있지만 성수동 제화거리에 조형물을 놓는 식으로 지원금이 쓰인다”면서 “그런 재정이 있으면 제화노동자들에게 4대 보험·복지를 적용하는 등 실제로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한민국 노동자라면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4대보험과 퇴직금, 매달 나오는 고정급여가 2천 5백여 명에 이르는 제화노동자들에겐 절박한 꿈이 되어버린 것이 어쩌면 제화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면서도 절박한 이런 박완규의 호소에 정부와 서울시, 노동부는 과연 필요한 해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박완규는 끝으로 절실한 마음을 전했다.
“유럽은 기술을 존중해요. 그에 맞는 보상도 해주고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기술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저평가해서 너무 속상해요. 반도체, 전기차 뭐 이런 것만 소중한 기술이 아니잖아요. 신발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필수품인데, 이렇게 제화노동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나중에 누가 남겠어요. 신발을 100% 수입해서만 신을 순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지금은 싼 수입 신발도 가격이 올라갈 텐데 말이에요. 이런 부분을 정부와 노동부 등 공공기관에서 꼭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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