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5월 24일, 북미회담을 코앞에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취소통보를 했다. 세 문단의 짧은 편지 아래에 대문짝만한 서명을 휘갈긴 '누가봐도 트럼프' 것인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 트럼프, 김정은에 보낸 편지 'Letter to Chairman Kim Jong Un' 미 백악관 홈페이지에 트럼프 대통령 명의로 '김정은 위원장에게(Letter to Chairman Kim Jong Un')'라는 제목의 편지가 올라왔다. 회담을 취소하자는 내용이 담겨있다. | |
ⓒ 미 백악관 |
이 오락 프로그램은 트럼프를 텔레비전 스타로 만들어 준 동시에, 정치와 전혀 인연이 없던 부동산 투자가를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 앉히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은인이다. <어프렌티스>가 없었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3월, 뉴욕주립대의 시라 게이브리얼 심리학 교수는 이에 관해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전세계가 경악했다. 그는 선거기간 내내 상스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선거 막판까지 성추행 논란이 그치지 않았으며, 민주당은 트럼프의 부정적 이미지를 부지런히 활용하며 공세를 폈다. 그런데 어떻게 당선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어프렌티스>가 무려 10년 넘게 방송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트럼프는 직원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신중히 판단하고 결정하며, 개인과 조직의 문제를 파격적으로 해결하는 억만장자로 등장했다. 유권자들은 이런 극중 리더십을 대선 직전까지 보아왔던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주어진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다. 게이브리얼 교수는 사람들이 극중 역할과 실제 인물간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길에서 배우를 만나면 넙죽 인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보아온 사람이고, 그것도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모습을 보아왔을 뿐인데도, 배우를 만나면 마치 오랫동안 서로 교류해 온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미국 유권자 다수는 트럼프가 연기한 캐릭터에게 표를 던진 셈이다.
'협상가 트럼프'라는 허구적 신화
물론, 트럼프는 주어진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다. 게이브리얼 교수는 사람들이 극중 역할과 실제 인물간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길에서 배우를 만나면 넙죽 인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보아온 사람이고, 그것도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모습을 보아왔을 뿐인데도, 배우를 만나면 마치 오랫동안 서로 교류해 온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미국 유권자 다수는 트럼프가 연기한 캐릭터에게 표를 던진 셈이다.
'협상가 트럼프'라는 허구적 신화
▲ NBC에서 방송된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는 트럼프를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 |
ⓒ 어프렌티스 |
<어프렌티스>의 주요 흥행요소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데 있다. 누가 봐도 가장 먼저 해고될 듯한 사람을 살려둔 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후보를 향해 '넌 해고야!'를 날림으로써 시청자의 허를 찌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극중 역할은 대통령이 된 현재까지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백악관에서 여전히 쇼의 진행자를 보고, 트럼프 자신도 마치 쇼를 진행하듯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가 느낌표를 붙여 수시로 날리는 격정적 트윗은 과거의 방송만큼이나 극적 효과를 연출한다.
심지어 외국의 지도자들까지 트럼프를 <어프렌티스>의 틀에서 바라본다. 그를 대할 때 '고도의 협상가'라는 두려운 이미지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이라는 책까지 썼지만 (정확히는 토니 슈워츠라는 대필작가가 썼다.) 실제로 그가 탁월한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물음표가 따라 붙는다.
올해 초 <어프렌티스>의 제작진 두 명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쇼는 사기극이었다'고 고백했다. 그 '리얼리티 쇼'가 '리얼리티'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트럼프가 회고록을 썼던 1980년대 후반이나, 방송에 나와 화려한 집무실을 배경으로 경영수완을 과시하던 2000년대 초는 '거래의 기술'을 과시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초 트럼프의 사업은 30억불(약 3조 2천억 원)의 부채에 시달렸고, 운영하던 세 개의 도박장이 파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방송출연 때까지도 회사는 큰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그에게 회생의 기회를 준 것은 '협상 능력'보다는 오히려 '방송 출연'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재능이 있으며,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가는 오락매체는 그에게 더 없이 좋은 수단이 되었다. 과거에 <어프렌티스>가 하던 역할을 이제는 트위터가 해주고 있다. 그가 '객관적 중재자'를 자임하는 다수의 언론과 사사건건 싸움을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 취소한 뒤 다시 번복하는 이유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준다. 그는 상황을 온전히 주도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보다는 형식이다.
트럼프는 6월로 잡혀 있던 북미회담을 회담을 취소한 시점은 불과 3주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단 한 가지 이유를 들었다. 자신은 김정은 위원장을 정말 만나고 싶었으나, 북측의 최근 성명에 담긴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의" 때문에 이 시점에서 회담을 갖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그동안 미국과 북한이 주고 받던 '말폭탄'에 비하면, 이번 북한 논평에서 드러난 '분노와 적의'는 경량급에 속하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말한 북한의 발언이란 최선희 부상이 펜스(부통령)를 "아둔한 얼뜨기"로 지칭한 것을 일컫는다.
지난해 가을, 북미 대화 분위기가 감지되던 상황에도 김정은은 트럼프를 겨냥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할 소리만 하는 늙다리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까지 했었다. 트럼프도 질새라 트위터에 "나는 김정은에게 '짧고 뚱뚱하다'고 안 하는데 왜 그는 내게 '늙다리'라고 욕하는지 모르겠다"고 응수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그 뒤에 따라붙은 글귀였다.
"어쨌든 나는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그러다가 올 1월에는 또다시 설전이 오갔다. 트럼프는 다시 트위터에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자기 책상 위에 핵버튼이 있다고 한다'며, "이 쪼들리고 굶주린 정권에서 온 누군가 그에게 좀 말해주면 좋겠다. 트럼프 책상 위에는 더 크고 강력한 핵버튼이 있고, 이건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한다고!"
이런 상황까지 겪은 트럼프가 자신도 아닌 펜스가 모욕당했기 때문에 회담을 취소했다는 말이 믿어지는가?
우려되는 미 정부의 대북 인식 부족
북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에 앞서 펜스가 북한을 향해 쏟아낸 발언도 시기나 내용 면에서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폭스뉴스에 나와 "북한이 미국의 충돌하면 리비아 모델의 최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북한 지도자도 카다피처럼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발언은 볼튼의 '리비아 모델' 발언이 북한의 심기를 잔뜩 자극한 상태에서 나왔다. 오죽하면 보수방송의 진행자조차 놀라 "그건 협박 아니냐"고 물었을까. 펜스는 태연히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답했다. 당사자의 의지에 달린 미래의 사태를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 '거 한번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전날 자신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 이후 나온 김계관 북한 외무성의 담화에 대해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라며 "아주 좋은 뉴스를 받았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나 "단지 시간(그리고 수완)이 말해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은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열린 소비자 보호 및 규제 완화, 경제성장 관련 법안 서명식에서 북한문제에 언급하며 손제스처하는 모습. | |
ⓒ 연합뉴스 |
미국이 상대국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가 있다면, '리비아'의 '리'자도 꺼내지 말았어야 옳다. 완성된 핵 능력을 지니지 못했던 리비아와 북한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오류일 뿐 아니라, 수장이 살해당한 나라를 언급하며 그 '모델'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화의 자세로 보기 어렵다.
그 발언이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는 사실을 떠나, '리비아 모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리비아 꼴이 날 것이다'가 논리적인 요구라고 생각하는가?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이 이 시점에서 대화를 원하는 이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북한이 미국의 압박전략이 주효했다고 믿고 있으며, 북한의 최대 관심사가 돈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북한경제는 2011년부터 계속 플러스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2016년에는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9%에 달했다. 금세기 들어 가장 높은 성장세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이들은 주민들의 삶이 현저히 개선되었으며, 개인들의 휴대전화는 물론 자동차를 소유하는 경우도 크게 늘었고, 대규모 건설현장도 쉽게 볼 수 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성과가 미국 주도의 경제봉쇄와 유엔 제재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압박작전'이 북한을 대화국면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는 없다. 북한의 입장에서 핵은 안전보장 수단이지, 투자수단이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를 대북 투자와 간단히 맞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북한이 최근 성명에서 밝혔듯, 그들은 '핵능력과 경제원조를 맞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북한이 핵개발을 시작한 후 일관되게 유지해 온 입장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이 발언을 듣고 '놀라며 분개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그는 '북한의 태도가 바뀌었다'며 중국에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트럼프는 한반도에 기회이자 위기
그동안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저주의 엇갈림'이 계속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처럼 대결보다 평화를 추구하는 정부가 집권하면 미국에는 부시같은 호전적 냉전세력이 들어섰고, 미국에 합리적 진보정권이 집권하면 한국에 이명박과 박근혜같은 냉전세력이 들어섰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다. 북한에 매우 완고한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이 지점까지 오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과 같은 뛰어난 중재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이 대화에 열정을 보이며 나선 까닭도 여기에 있다. 현 정부의 진정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북미 대화를 중재할 역량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 미국 정부가 '통제의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까닭에, 기회는 언제든 위기로 돌변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원하는 단기간의 해결 방식이 문제의 본질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북한이 바라는 체제 보장은 선언만이 아닌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믿을 만한 방식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이행되지 않는 한, 북한은 핵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회담 마치고 나오는 남북정상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오후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두번째 정상회담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통일각 입구 양쪽에 조선인민군 명예위병대가 도열해 있다. | |
ⓒ 사진제공 청와대 |
결국 북미회담에서 단계적이고 점진적 해결책이 논의 될 수밖에 없고, 이는 '화끈한'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트럼프의 욕망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는 미국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던 상황에서 벗어났다. 트럼프의 '취소' 선언 후 급박하게 이뤄진 2차 남북 정상회담은 현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단순한 수사학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런 면에서 '협상가'라는 호칭은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에게 돌아가야 한다. 물론 잘 돼도 비난하고, 잘 안 돼도 비난하는 세력이 있다. 냉전주의자들의 태도를 보면, 트럼프의 북미회담 취소는 '자기충족적 예언'에 가깝다. 평화를 원하지 않는 이들이 계속 판을 흔들어 댄 뒤, 대화의 진행이 순탄치 않게 되자 '봐, 내가 뭐랬어'라고 말하는 꼴이다.
미국 정부는 평창 올림픽 직전까지도 '북폭 시나리오'를 말했고, 주한미군은 지난달 4월 한반도 전쟁을 대비한 민간인 철수 훈련까지 했다.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하면, 북한의 보복공격은 차치하고라도,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가 방사능 오염지대가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북미정상회담 날짜가 6월 지방선거에 유리하니 불리하니를 따지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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